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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포말

기자명 법보신문

이미 꽉 차 있는 바위
다른 것들 수용 못해
‘나’라는 관념도 같아
‘자아’는 집착의 포장

 

‘절벽을 타고 떨어진 물줄기가 하얗게 포말(泡沫)을 일으키고’, 혹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과 같은 표현은 꽤나 시적이다. 포말은 사전적 정의를 보면, 물이 무엇인가에 부딪혀 생겨나는 거품을 의미한다. 유사한 표현으로 물방울이란 단어가 있다.


불교 경전에서 이 포말은 자주 사용되는 비유가운데 하나이다. ‘상윳따 니까야’에 '포말의 비유 경(Pheṇapiṇḍūpamasutta)’이 있다. 말 그대로 부처님께서 포말의 비유를 통해 가르침을 주신 경전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갠지스 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물질에 대해서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가르침이 이 경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져서 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설명된다. 즉 오온(五蘊)은 그 어느 것에도 실체가 없음을 물질(色)은 포말에, 느낌(受)은 빗방울이 떨어져 생기는 물거품에, 이미지 작용(想)은 아지랑이에, 개념작용(行)은 파초 줄기에, 의식(識)은 마술사의 환술에 비유해서 설명되고 있다.


허공은 텅 비어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그 안에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예를 들어 바위덩이가 있다고 하자. 그 바위덩이는 이미 꽉 차 있어 그 안에 다른 것을 수용할 수가 없다. ‘나’라는 관념은 이처럼 나를 세상과, 대상과 분리시킨다. 이러한 분리는 나를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인식하게 한다. 일단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확고하게 세우고,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고집을 일으키며, 집착과 욕망의 근원을 이룬다. 이러한 고집, 집착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자아 정체성’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으로 포장한다. 불교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식이 아닌, 정체성을 파괴하는 방식을 권한다. 이러한 파괴는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인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는 방식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집과 집착을 파괴하게 되면, 그만큼의 정신적 유연성과 자유를 얻게 된다.


부처님은 우리들이 자꾸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에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아지랑이나 마술사의 환술 등의 비유를 통해 오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것’임을 반복해서 자상하게 가르치신다. 하지만 오온에 실체가 없음은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안다면 그것은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어야 한다. 즉 앎(智)과 생활이 그대로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오온무아(五蘊無我)를 말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권력과 명예와 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오온무아일 뿐이다. 그것은 그의 삶과는 무관한 지식일 뿐이다.

 

▲이필원 박사

이는 어린 아이가 빈주먹 속에 무언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빈주먹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사실은 주먹 속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어도, 주먹을 쥐고 눈앞에 보여주면 다시 주먹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이필원 동국대 연구교수 nikay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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