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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하게 머리 깎은 중들이 여기에서 무슨 밥을 찾고 있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세월이나 축내는 스님이
스스로 부처라 착각해서
거드름 피우는 모습에 일갈
모르는 것보다 무서운 건
그걸 안다고 착각하는 것


임제가 ‘할’이라 고함친건
이런 형편없는 스님에게
공부하고 있는 대중 또한
형편없는 사람이란 호통

 

 

▲혜능 스님이 삭발수계한 광효사에 남아있는 의발탑.

 

 

到翠峯하니 峯이 問, 甚處來오 師云, 黃檗來니라 峯云, 黃檗이 有何言句하야 指示於人고 師云, 黃檗은 無言句니라 峯이 云, 爲什麽無오 師云, 設有하야도 亦無擧處니라 峯云, 但擧看하라 師云, 一箭이 過西天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취봉 스님을 방문했다. 취봉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황벽 스님에게서 왔습니다.” 취봉 스님이 물었다. “황벽 스님은 어떤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황벽 스님은 가르침이 없습니다.” 취봉 스님이 물었다. “어째서 없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비록 있다하더라도 소개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취봉 스님이 말했다. “어쨌든 말해 보게.” 임제 스님이 말했다. “화살 하나가 서천을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의) 취봉 스님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는 스님입니다. 그래도 당대에는 뛰어난 스님으로 평가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임제 스님이 굳이 찾아간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세간의 명성과 실제 모습은 다를 때가 많은데 취봉 스님이 바로 그런 좋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취봉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묻습니다. 스승 황벽 스님은 어떤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황벽 스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단편이라도 주워들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범부들이 볼 때는 평범한 질문이기도 하고 그리 잘못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임제 스님이라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임제 스님은 취봉 스님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몽둥이질을 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을 합니다. “황벽 스님은 가르침이 없습니다.” 만약에 눈이 밝은 스님이었더라면 이 정도에서 임제 스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취봉 스님은 어째서 없는가 하고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도 임제 스님은 다시 친절하게 대답해 줍니다.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소개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평소와 다른 임제 스님을 보면 아마도 취봉 스님이 연세가 아주 지긋했거나, 아니면 황벽 스님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제는 알아들었을 법도 하건만 끝내 못 알아듣고 다시 묻습니다. “어째든 말해 보게.” 임제 스님도 참 답답했을 겁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 해줘도 모르니, 평생 공부가 헛됐음이 안타까웠겠지요. 선의 정신은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문자를 따로 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취봉 스님은 이런 선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벽 스님의 가르침이 왜 없겠습니까. 말씀이 없었을 턱이 없지요. 그렇지만 말이라는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입니다. 말은 말이 행해진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때의 그 인연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미 그 상황을 떠나 버리면 현장감을 갖지 못한 의미 없는 말이 되는 것이고, 이것을 글자로 옮긴 문자 또한 깨달음을 저해하는 병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이나 문자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임제 스님이 “설사 황벽 스님의 가르침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소개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한 말의 뜻은 이런 의미입니다. 오히려 말해주면 말과 문자에 사로잡혀 분별심만 낳을 뿐입니다. 번뇌와 망상이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취봉 스님은 보채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은 “화살이 이미 서천으로 지나가버렸다”고 말합니다. 선어록에는 서천 대신 신라가 나오기도 합니다. 중국을 벗어나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그만 집착을 버리라는 말일 겁니다. 또 다르게 보면 황벽 스님의 가르침은 이미 지나가 버린 화살처럼 그런 식으로는 자취조차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취봉 스님이 이 말의 뜻을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到象田하야 師問호되 不凡不聖하니 請師速道하라 田이 云, 老僧이 祇與麽니라 師便喝云, 許多禿子야 在這裏覓什麽椀고

 

해석) 임제 스님이 상전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경지가 어떤 것입니까, 빨리 말해주십시오.” 상전 스님이 대답했다. “노승은 이렇게 있을 뿐이네.” 임제 스님이 곧 “할”하고 고함을 치며 말했다. “허다하게 많은 머리 깎은 중들이 여기에서 무슨 밥을 찾고 있는가?”

 

강의) 상전 스님에 대한 것도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준은 취봉 스님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상전 스님을 찾아간 임제 스님이 묻습니다. “범부도 성인도 아닌 경지가 어떤 것인지 빨리 말해보시오.” 불법의 대의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상전 스님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임제 스님은 꽤나 황당해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이 보기에 상전 스님은 스님입네 하며 세월이나 축내고 있는 게으른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부처라고 착각하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함을 지른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임제 스님의 마지막 말은 대중들에게 비수처럼 날아듭니다. 이런 형편없는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다는 당신들 또한 형편없는 사람들이라는 호통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이 없습니다. 상전 스님이 그런 스님인 것 같습니다.

 

到明化하니 化問, 來來去去作什麽오 師云, 祇徒踏破草鞋로다 化云, 畢竟作麽生고 師云, 老漢이 話頭也不識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명화 스님이 계신 곳을 방문했다. 그러자 명화 스님이 물었다. “왔다 갔다 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그냥 쓸데없이 짚신만 닳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명화 스님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이 노인네가 화두도 못 알아듣는군.”

 

강의) 임제 스님이 이번에는 명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 임제 스님에게 명화 스님이 묻습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은 “그냥 쓸데없이 짚신만 닳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눈 밝은 스님이라면 이 대목에서 알아들었을 겁니다. 임제 스님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대사(一大事)를 끝마치고 할 일이 없어진 한가로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화 스님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재차 묻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답답할 노릇입니다. 이미 목적 자체가 사라져 버린 사람에게 다시 목적을 묻습니다. 돌이켜보면 쉬는데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쉬는데 목적을 가지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겠지요. “전혀 화두를 못 알아듣는군.” 임제 스님의 이 한마디 말에 명화 스님에 대한 모든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화두는 선문답으로 이해해도 되고 그냥 말귀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명화 스님은 전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러니까 더불어 도를 논할만한 스님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往鳳林타가 路逢一婆하니 婆問, 甚處去오 師云, 鳳林去니라 婆云, 恰値鳳林不在로다 師云, 甚處去오 婆便行이라 師乃喚婆하니 婆回頭어늘 師便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봉림 스님에게 가다가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가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봉림 스님에게 갑니다.” 노파가 말했다. “마침 봉림 스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어딜 가셨습니까?” 노파가 그냥 가버렸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불렀다. 노파가 고개를 돌리자 임제 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선어록에서 노파가 나오면 일단 긴장을 해야 합니다. 조사들의 선어록에 나오는 노파들은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뛰어난 선지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조주 스님과 만난 오대산 노파도 그렇고 덕산 스님과 만난 떡 장수 노파도 그렇습니다. 특히 덕산 스님과 떡장수 노파의 대화는 유명합니다. ‘금강경’에 조예가 깊어 주금강이라는 칭송을 받던 덕산 스님은 남쪽에서 교학을 무시한 선종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던 중 점심 때가 돼 배가 고파지자 길가에서 떡을 팔고 있는 한 노파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점심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노파가 그냥 주지 않고 조건을 답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떡을 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금강경’의 대가라는 덕산 스님에게 ‘금강경’의 내용을 인용해 묻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합니까?” 이 질문에 덕산 스님은 그냥 꽉 막혀 버립니다. 대답을 못한 덕산 스님은 점심을 얻어먹지 못한 채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점을 찍다, 즉 점심(點心)의 유래가 나옵니다.


이런 고사들에 비춰보면 여기에 나오는 노파도 보통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찌됐든 임제 스님이 봉림 스님이 계신 곳에 가던 도중에 한 노파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노파가 대뜸 임제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봉림 스님에게 간다고 하자 봉림 스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봉림 스님이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임제 스님과 노파의 대화에서 봉림 스님은 그냥 의미 없는 이름일 뿐 “본래면목이 무엇이냐”는 선문답을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가는 노파를 임제 스님이 불러 세웁니다. 노파가 그냥 가버리면 됐을 텐데 뒤를 돌아봅니다. 아마도 임제 스님을 떠 본 것이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고,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한 부분이 걸렸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노파가 대답을 하지 않고 앞으로 그냥 가버린 것은 임제 스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회피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임제 스님에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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