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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청세고빈(淸稅孤貧)

기자명 법보신문

소유욕이 완전히 사라진 그곳에서 진정한 보시는 시작된다

무소유, 보시가 아니라면
어떤의미도 가질 수 없어


보시는 인류애적인 사랑
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


조산(曹山)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저 청세(淸稅)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 화상은 말했다. “세사리(稅闍梨)!” 그러자 청세 스님은 ‘네’라고 대답했다. 이어 조산 화상은 말했다. “청원의 백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무문관(無門關) 10칙 / 청세고빈(淸稅孤貧)

 

 

▲그림=김승연 화백 

 

 

1. 부처가 되는 수행의 길, 바라밀

 

일체의 집착과 편견을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삶을 주인공으로 산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부처가 되는 길이 너무나 멀어서 일종의 피안으로 보일 정도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부처가 되는 치열한 수행을 불교에서는 바라밀(波羅蜜)이라고 부릅니다. 이 한자어는 파라미타(pāramitā)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가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글자는 파람(pāram)과 이타(itā)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람’이 ‘저 멀리’, 혹은 ‘저 너머’라고 뜻한다면, ‘이타’는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멀고 험하게만 보이는 부처가 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서 이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라미타, 즉 바라밀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보시(布施, dāna), 지계(持戒, śila), 인욕(忍辱, kṣānti), 정진(精進, vyāyāma), 선정(禪定, dhyāna), 그리고 지혜(智慧, prajn͠ā)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여섯 가지 방법, 여섯 바라밀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지계’, 온갖 모욕에도 원한을 품지 않으려는 ‘인욕’, 악을 제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정진’, 마음을 응시하는 ‘선정’,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이 다섯 가지는 수행자의 치열한 자기 수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타자에게 재물이나 지혜를 나누어주는 ‘보시’는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가 무엇인가 주체의 내면과 관련되어 있다면, ‘보시’는 주체가 내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타자와 관계하는 수행법이라는 것이 눈에 띱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너무나 쉬운 길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보시’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타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스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보시’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힘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섯 가지 바라밀 중 첫 번째 자리에 오는 것이 ‘보시’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자선 행위와도 비슷한 보시가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로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자비(慈悲, karuna)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비는 타자에 대한 환대, 혹은 생면부지의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비가 가족이나 친구나 애인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인류애적인 사랑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제대로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묵은 소유에의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사랑의 논리는 소유의 논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소유에의 의지가 강할수록, 우리에게서 사랑의 힘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용수의 공은 소유의지의 해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친구가 배가 고픕니다. 지금 내게는 빵 한 조각이 있습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빵을 배고픈 친구에게 건네줄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빵의 소유권을 포기한 겁니다. 만약 자기 빵을 소유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우리는 무척 괴로워할 겁니다. 빵을 준다는 것이 너무나 아깝지만, 그래도 친구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랑은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동력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보시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끈덕지게 우리를 따라다니는 소유에의 욕망을 가라앉혀야만 합니다. 자, 이제야 여섯 바라밀의 논리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 보시는 바라밀의 시작이자 동시에 완성이기도 했던 겁니다. 보시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은 소유에의 욕망을 가라앉히려는 치열한 자기 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네요.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 보시를 시행하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처음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보시를 하다보면, 누구나 자신이 타자에게 내어주는 것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치열한 자기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는 치열한 자기 수행이 왜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치열한 자기 수행이 완성되었는지의 여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남이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주는 행위, 즉 보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보시라는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를 수반하는 수행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보시이기 때문이지요.


불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가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 250?), 그러니까 용수(龍樹)일 겁니다. 그의 이론은 지금도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이란 난해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용수는 공(空, S´u-nyata-)이란 개념을 무척 강조합니다. 용수가 이렇게 공을 강조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사랑과 자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집요한 소유 의지를 해체하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중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입니다. “자아가 없는데 어찌 자아의 소유가 있을 것인가. 자아와 자아의 소유라는 생각을 진정시키면, 우리는 ‘나’나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실천적으로 용수는 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집요한 소유 의지를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물론 소유 의지를 완화, 혹은 제거하려는 이유는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결국 공은 자비와 사랑에 이르도록 의도된 개념이라는 겁니다.


3. 게을러 없는 것, 무소유와 달라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도 바로 용수가 강조했던 공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착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을러서 집도 없고 지혜도 배우지 못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 무소유의 화신이라고 떠벌릴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가난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법정 스님이 강조했던 무소유의 상태에 이미 이른 것 아닌가.” 분명 이 사람이 겉보기에 무소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게으른 사람은 무소유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실천, 즉 보시가 아니라면 무소유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게으른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지혜를 나누어주어서 무소유의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애초에 자비의 마음조차 품을 수 없는 그냥 게으른 사람일 따름입니다.


무소유와 보시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무문관(無門關)’의 열 번째 관문도 통과해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임하는 청세(淸稅)라는 젊은 스님이 조산(曹山, 840~901) 화상에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열 번째 관문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번지게 됩니다. “저 청세(淸稅)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젊은 스님의 패기가 볼 만 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이미 무소유의 경지에 올랐는데, 당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내게 무슨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조산 화상은 갑자기 한 마디 말을 던집니다. “세사리(稅闍梨)!” 여기서 사리(闍梨)라는 말은 아사리(阿闍梨, ācārya)의 줄인 말로 고승(高僧)을 경칭하는 말입니다. 얼떨결에 젊은 스님은 “네!”하고 대답해버리고 맙니다. 청세 스님은 인정받고 싶었는데, 조산 스님은 쿨하게 젊은 스님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버린 겁니다. “청세 스님, 당신은 이미 고승이네요.” 바로 이 순간 청세 스님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을 겁니다. 자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조산 화상은 그런 평범한 사람에게 보시를 행하는 깨달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처음의 패기는 간 곳이 없이 망연자실하는 젊은 스님에게 조산 화상은 마지막 결정타를 한 방 더 먹입니다. “청원의 백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여기서 세 잔의 술이란 ‘세사리’라는 세 음절의 단어를 상징하는 겁니다. 네가 원하던 칭호를 얻었으니, 이제 된 것 아니냐는 겁니다. 너는 자비의 화신이 아니라 인정을 구걸하는 거지에 불과하다는 조산 화상의 사자후는 청세 스님을 천 길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겁니다. 게을러서 무소유에 있게 된 사람은 구걸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력해서 무소유의 상태에 이른 청세 스님도 구걸하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강신주

그렇습니다. 청세 스님은 몰랐던 겁니다. 무소유의 정신은 보시의 정신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소유(無所有)’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無)’라는 글자를 ‘없다’라고 좁혀서 해석하지 말고, 아주 적극적으로 ‘없애다’는 동사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없애다’로 무소유를 해석하는 순간, 무소유의 정신이 바로 보시의 정신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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