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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승권렴(二僧卷簾)

기자명 법보신문

편견과 습관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라

공으로 세상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


마음 속의선글라스 벗어야
푸른 허공 바로 볼 수 있어

 

점심공양 전에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와 앉자 청량(淸凉)의 대법안(大法眼) 화상은 손으로 발[簾]을 가리켰다. 그때 두 스님이 함께 가서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대법안 화상은 말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무문관(無門關) 26칙 / 이승권렴(二僧卷簾)

 

 

▲그림=김승연 화백  

 


1.‘타타타’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

 

‘타타타(tathatā)!’ 대중가요의 제목으로도 쓰일 정도로 유명한 불교 개념이지요. 한자로는 ‘진여(眞如)’나 여여(如如)라고도 번역되는 타타타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열반이나 깨달음이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얻게 되는 순간, 우리는 바로 부처가 되는 거니까요. 이건 거꾸로 말해 평범한 우리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엇인가 왜곡을 가해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번데기 아시나요. 6~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간식이 아마 번데기였을 겁니다. 그러나 최근 젊은이들 중 번데기는 아마 혐오식품 중 하나일 겁니다. 어린 시절 번데기 대신 피자나 햄버거 등을 먹었던 세대들이니까요. 사실 외국인들은 우리가 번데기를 먹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번데기는 바퀴벌레와 별반 다름없는 벌레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4,50대에게 번데기는 군침이 도는 간식일 겁니다. 눈앞에 번데기가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먹고 싶어 안달을 할 겁니다. 그들은 번데기가 고소하고 구수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론적으로 말해 바로 이 순간 주체(subject, 自)와 대상(object, 他)의 이분법이 작동하게 됩니다. 자신들은 번데기를 먹고 싶은 주체이고, 번데기는 먹음직스러운 대상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그렇지만 돌아보면 4,50대들이 번데기를 먹고 싶은 주체가 된 것도 그리고 번데기가 먹음직스러운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였던 것도 그들의 오랜 습관 때문일 겁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번데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겁니다. 물론 2,30대 젊은이들이 번데기를 혐오식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메커니즘일 겁니다. 벌레에 대한 해묵은 편견과 습관으로 번데기를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 최소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객 관계에 사로잡힌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번데기는 맛있는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좋아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반대로 번데기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싫어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가 먹음직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여전히 번데기를 좋아하거나 혐오하리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과거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를 기호 식품으로도 혐오 식품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깨달은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알라야’는 일종의 습관, 기억의식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와 함께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탄탄히 마련한 사람으로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320?~400?)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나가르주나의 불교를 ‘무종(無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공(空, Śūnyatā) 하다는 그의 주장 때문일 겁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니까 ‘무종’이라고 나가르주나를 규정한 셈이지요. 반면 바수반두의 불교를 ‘유종(有宗)’이라고 규정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의식의 표상들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어쨌든 의식은 존재한다고 긍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수반두, 즉 세친 보살의 불교 사상을 ‘유식불교(唯識佛敎)’라고 규정하기도 하는 겁니다. “단지 의식일 뿐임을 주장하는 불교”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를 대립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낳게 됩니다.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는 서로의 이론적 한계를 보충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모든 것을 실체로 보는 사람이 모든 것을 공으로 볼 때,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막연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평범한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깨달음의 길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려고 했던 바수반두의 속앓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속앓이는 그의 작품 ‘삼성론(Trisvabhāva-nirdeśa, 三性論)’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바수반두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데기를 보고 먹고 싶어서 입맛을 다시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변계소집성’이고, 번데기가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시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가 ‘의타기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서 번데기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상태가 바로 ‘원성실성’입니다.


바수반두의 유식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개념이 바로 ‘알라야 의식(ālaya-vijn͠āna, 阿賴耶識)’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알라야 의식은 일종의 습관, 즉 기억 의식을 말합니다. 흔히 불교에서는 생선 가게를 들리는 것으로 알라야 의식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선 가게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생선 가게의 비린내가 옷에 배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생선 비린내가 몸에 배듯이 우리 마음에 저장된다는 겁니다. ‘알라야’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저장하다’나 ‘모으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어쨌든 번데기를 보고서 갑자기 먹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도 바로 이 알라야 의식 때문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알라야 의식과 마음의 세 상태를 연결시켜볼까요. 변계소집성에서 우리는 작동하는 알라야 의식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의타기성에서는 우리는 작동하는 알라야 의식을 의식하게 됩니다. 반면 원성실성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라야 의식을 끊는 데 성공한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


3. 법당 드리운 발은 알라야 의식 상징
 
이제 분명해지셨나요. 공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자 동시에 알라야 의식을 끊고 세상을 본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체와 대상을 나눈 것도 알라야 의식이었고, 당연히 주체가 대상을 집착하도록 하는 것도 알라야 의식이었던 겁니다. 간단히 말해 과거의 습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알라야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알라야 의식은 일종의 선글라스와 같은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물의 색깔을 왜곡시켜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스물여섯 번째 관문에서 대법안(大法眼) 화상, 즉 법안(法眼, 885~958) 화상은 이 알라야 의식을 ‘발[簾]’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서구화된 주거 공간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 많이 사용했던 것이 ‘발’입니다. 더운 여름에 사용하는 일종의 블라인드라고 할 수 있지요. 바깥의 시선을 피할 수 있으니 옷을 벗고 있을 수 있어 좋고,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니 좋고, 어쨌든 일석이조가 따로 없을 겁니다.


점심공양에 앞서 모든 제자들이 법당에 들어왔을 때 법안 화상은 그들에게 또 가르침을 내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법안 화상은 조용히 축 내려져 있던 발을 가리켰던 겁니다. 아마도 날씨가 흐려져 법당이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로 그 순간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일어나 발을 걷어 올리려고 했나 봅니다. 발이 컸던지 아니면 스승 앞에서 조용히 발을 걷으려고 두 사람의 제자가 달려들었을 겁니다. 그러자 법안 화상은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도대체 어느 스님이 옳고 어느 스님이 그르다는 것일까요.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발을 통해 내다본 세상과 발을 걷고 내다본 세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어느 순간에 내려진 발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라면, 이것은 알라야 의식에 매개되어 바라본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발을 걷고 내다본 세상은 알라야 의식을 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는 법안 화상의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두 스님 중 누가 옳았던 것일까요. 발의 왼쪽을 걷었던 스님이 옳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오른쪽을 걷었던 스님이 옳았던 것일까요. 발을 걷는 순간에 참여해보세요. 아마 일망무제의 푸른 허공이 여러분의 시야에 펼쳐질 겁니다.

 

▲강신주

멋지지 않습니다. 발을 걷고 바라본 허공은 나가르주나의 ‘공’을 상징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법안 화상에게 있어 발은 법당을 어둡게 하는 발을 직접 의미하는 것이자, 동시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막는 알라야 의식을 상징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파악한 스님이 옳은 것이고, 그 중 하나만 파악한 스님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오른쪽 스님인지 왼쪽 스님인지 고민하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법안 스님은 가차 없이 사자후를 던질 겁니다. 할(喝)! 할(喝)! 할(喝)!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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