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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두진보(竿頭進步)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의 자비는 자신의 본래면목마저도 버리는 비약

백척간두는 본래면목 상징
이것마저 버려야 불교자비
타인에게 완전히 몸 던져야
타인 모두가 주인임을 확인

 

석상(石霜) 화상이 말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 스님은 말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46칙 / 간두진보(竿頭進步)

 

 

▲그림=김승연 화백

 


1. 경험자만이 실연 아픔 제대로 위로

 

불교의 자비(慈悲)는 분명 사랑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비는 서로를 소유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띠는 남녀 사이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왜냐고요. 자비는 자리(自利, ātma-hitam)와 이타(利他, para-hitam)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로움’이란 바로 ‘자유롭게 한다’, 혹은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의 본래면목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리’라면, 타인에게 그만의 본래면목을 찾아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타’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녀 사이의 사랑을 강한 소유욕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남녀 사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자리와 이타의 정신이 전제되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자리와 이타 정신을 가진 남녀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만, 반면 서로를 소유하려하고 심지어는 스스로나 남도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은 한 순간의 희열로 짧게 끝나게 됩니다.


어쨌든 자비의 이념은 이타에서 완성이 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자리는 이타를 위한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본래면목을 찾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타자가 나와는 다른 그만의 고유한 본래면목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실연을 당한 사람만이 실연한 사람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고,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 것이 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도 막말로 똥줄 빠지게 힘든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마흔여섯 번째 관문이 자리(自利)의 노력을 백척간두(百尺竿頭), 즉 30m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오르는 것에 비유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매끄러운 대나무에 오르는 것도 무척 힘듭니다. 그렇지만 더 힘든 것은 그 꼭대기, 한 발도 지탱하기 힘든 그 꼭대기 위에 마치 평지처럼 서 있는 겁니다. 자기 혼자만 서 있을 수 있기에 그 대나무 꼭대기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확고히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다른 누구와도 함께 서 있을 수 없이 날카로운 자리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마흔여섯 번째 관문에서 석상(石霜, 986~1039) 스님은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백척간두에 발을 떼는 순간, 우리는 백 척이나 되는 허공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나 부지할지 모를 일입니다. 생명을 떠나서 백척간두에서 발을 뗀다는 것이 애써 찾은 본래면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어떻게 쉽게 발을 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올라온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2. 자리에서 머문다면 이타는 불가능

 

석상 스님은 매정한 사람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스님은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아예 스님은 지금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어떻게(如何)’, 즉 발을 떼는 방법입니다. 이런 석상 스님에게 우리는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왜, 엄청난 시간과 치열한 노력으로 도달한 백척간두를 버리라는 겁니까?” 아마 이런 질문을 했다가는 스님의 몽둥이찜질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석상 스님에게 애써 올라서 간신히 발을 딛고 서 있게 된 백척간두, 즉 자신의 본래면목을 버려야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자리(自利)’를 달성하라고, 그래서 주인으로 당당히 서라고 그렇게 채찍질했던 당사자가 바로 석상 스님 아니었나요. 이렇게 내려올 바에야 무엇 때문에 백척간두에 오르라고 우리를 떠밀었던 것일까요.


차라리 올라가지 않았다면 백척간두에서 발을 뗄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황망함과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갔다가 평지로 내려온 사람과 그렇지 않고 계속 평지에 머물렀던 사람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척간두에 올랐다가 평지로 내려온 사람과 아예 백척간두에 오를 생각조차 못하고 평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석상 스님은 왜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자리(自利)’로는 불교의 이념인 자비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타(利他)’를 실천할 수 없다면, 자비는 공허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의 본래면목을 묵수할 수는 없습니다. ‘자리(自利)’에서 머문다면, 이타(利他)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이 대목에서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해에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 중 한 권인 ‘사랑의 작동(Kjerlighedens Gjerninger)’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조금 어려운 구절이지요. 그렇지만 ‘자신에 대해서 주관적이다’라는 말과 ‘타인들에 대해서 객관적이다’라는 말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다지 어려운 구절도 아닙니다. ‘주관적’이란 말은 ‘subjective’를 번역한 겁니다.

 

잘 알다시피 철학에서 ‘subject’는 주관이자 주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 주관적이다’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그리고 주인으로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객관적’이라는 뜻을 가진 ‘objective’는 사물이나 대상을 뜻하는 ‘object’라는 말에서 유래한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다’라는 말은 타인을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지요.


3.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야 자비도 가능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지만, 타인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타인을 물건처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당연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임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겁니다.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고민하니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타인을 주관으로, 즉 당당한 주체로 보아야만 가능한 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것이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제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셨나요.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 ‘자신에 대해 주관적인 것’이라면, 그곳에 발을 떼고 평지로 내려오는 것은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게’ 된 것을 의미했던 겁니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사람은 타인의 주관이나 주체를 의식하는 사람, 즉 타인도 그만의 본래면목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지요.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자기만이 주인이 아니라 타인도 주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손님의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주인의 자리인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야 했던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미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은 평지에 머문 사람이 아니듯이, 백척간두에 올랐다가 내려온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니까요. 정확히 말해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은 사람은 동시에 주인 노릇과 손님 노릇을 자유자재로 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이렇게 백척간두에서 내려온 사람만이 자신만이 주인이 아니라,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타인들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흔여섯 번째 관문에서 석상 스님 이외에 무명의 스님은 이야기했던 겁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석상 스님의 화두를 풀 준비가 갖추어진 셈입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자비가 아니라면 백척간두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냥 타인에게 몸을 던지는 겁니다.

 

▲강신주

그렇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사랑은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불교의 자비도 자기의 본래면목마저 버리는 비약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냥 눈 딱 감고 한 걸음을 내딛어버려야 합니다. 갑자기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이 떠오르네요.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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