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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임해군 아들 일연스님 존안상 귀환

기자명 법보신문

비운의 조선 왕손 409년만에 돌아오다

2002년 10월23일 도착
종묘·덕수궁 등서 다례
임진왜란 때 볼모로 잡혀
日서 출가 일련종 이끌어

 

2002년 10월23일, 조선 선조의 맏손자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그곳에서 출가해 큰 족적을 남긴 일연(日延, 1589~1665) 스님이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인질로 잡혀 친누이와 함께 현해탄을 넘은지 꼭 409년만의 귀환이었다.


‘일연상인 환국추진위원회’와 김제 금산사의 초청으로 이날 방한한 일본 후쿠오카 묘안사(妙安寺) 주지 가도다 쇼에이 스님 일행은 15cm 크기의 일연 스님의 존안상을 들고 서울 종묘와 덕수궁을 참배했다. 특히 이틀 뒤인 25일 금산사는 화재로 소실된 일연 스님 상의 나머지 신체를 별도로 제작, 함께 봉안하는 개안법회를 성대히 열기도 했다. 이날 법회에 대해 일본 아사이 신문 등은 “일연 스님이 일한우호의 상징이 됐다”며 주요소식으로 타전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장남 임해군의 큰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4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함경도로 피난하던 중 회령 인근에서 임해군이 왜장에게 붙잡히면서 함께 포로가 됐다. 이후 명과 왜군 사이에 강화가 이뤄지면서 임해군은 풀려났지만 스님과 두 살 위의 누나는 볼모의 신세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스님은 이후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하게 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 오누이는 “너희를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버지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한해 두해 세월이 가도 아버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어느새 13세가 된 왕손은 출가를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삶의 무게와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불교에 대해 깊이 천착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1601년 일본 일련종 계통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직접 머리를 자르고 왕손으로서의 삶이 아닌 출가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발원했다. 이후 16세에 교토 본국사(本國寺)에서 3년간 수학하고 다시 지바(千葉) 반고사(飯高寺)에서 불법을 공부해 가관원(可觀院)이라는 당호를 받았으며 ‘일연상인’으로 불렸다. ‘상인’은 고등교육과정을 마치고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승려에게만 부여하는 호칭으로 약관의 나이에 이미 스님은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행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608년 조선에서 뜻하지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선조의 죽음을 앞두고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밀려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됐다가 이듬해인 1609년 강화도에서 35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마저 꺾이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접은 스님은 대신 수행과 포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스님은 26세 나이에 일련종 종조 일련상인이 태어난 지바 탄생사(誕生寺)의 제18대 주지를 역임하면서 사실상 종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특히 스님은 탄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후쿠오카에 용잠사(龍潛寺)를 건립해 중생교화에 나서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섰다.


그러나 스님은 1631년 새로운 막부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계에 혼란이 발생하자 스스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30여년 만에 친동생을 만난 누이는 솜씨 좋은 조각가를 시켜 동생의 모습을 새기도록 했다. 그 존안상이 409년 만에 귀환한 그 조각상이었다.


후쿠오카로 돌아온 이후에도 대중교화에 헌신해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스님은 그곳 번주 구로다(黑田忠之)로부터 귀의를 받고 그가 바친 향정사(香正寺)에 주석하며 20여년 간 수행과 교화에 매진했다. 스님은 또 1660년 나이 72세가 되던 해 고향 바다가 보이는 후쿠오카 해복산에 묘안사를 창건하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리곤 1665년 1월26일 일연 스님은 7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왕손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전란을 맞아 부모와 생이별하며 이국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일연 스님. 그럼에도 불법에 귀의해 적국 왜의 중생들마저 끌어안고 교화에 나서 성인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스님의 삶은 지금도 불교의 대자비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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