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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불시심불(不是心佛)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은 말 아니라 구체적 삶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구별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옳은 태도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일은
중생이 결합된 깨달음 상태

 

어떤 스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이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남전(南泉) 화상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인가요?” 남전 화상은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고, 부처[佛]도 아니고, 중생[物]도 아니다.”

무문관(無門關) 27칙 / 불시심불(不是心佛)


 

 

▲그림=김승연 화백

 


1. 디테일에 집중 말고 핵심을 직시하라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게 되면, 상기된 얼굴로 대화를 조심스럽게 시도합니다. “저, 저랑 차나 한 잔 하실 수 있나요.” 만일 상대방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지요. 만일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면, 포옹을 한다든가 아니면 춤을 추는 사이로 발달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방식이지요. 이런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 남미를 방문하면 아마 경악하게 될 겁니다. 해가 지면 도시 광장이나 카페에서 가벼운 파티가 항상 열립니다. 이곳에서 누군가 여러분에게 접근해 춤을 청하게 될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면 춤을 추면 됩니다. 서로 허리를 감싸고 춤을 추다가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동석하여 대화가 시작될 겁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춤이 끝난 뒤 상대방은 당신을 표연히 떠날 겁니다. 남미에서는 춤으로 서로에 대한 호감을 테스트하고, 이어서 대화를 나눕니다. 남미 스타일이지요.


분명 우리와 남미 사람들은 연애 방식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정수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랑의 열정이랄까. 이것은 똑 같은 것 아닐까요. 그러니 디테일에 빠지지 말고, 그 핵심을 보아야만 합니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남미 사람들이 무례하고 천박한 욕정의 화신인 것처럼 보일 겁니다. 반대로 남미 사람들도 우리를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남미 사람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사랑의 본질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니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니까요. 그렇지만 철학이나 사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디테일에 빠지지 말고, 그 본질과 정수를 보면 서로 대화 가능한 철학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 동양과 서양, 혹은 옛날과 지금이라는 디테일의 차이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 가능한 철학, 즉 형제와 같은 철학을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제 궁금해지시지요. 그렇다면 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 중 가장 불교와 가까운 철학자는 누구일까요. 서양철학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아마 많은 철학자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겁니다. 무(無, Néant)를 중시했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떠오르시나요. 이런 분들이라면 중관불교가 강조했던 공(空)을 생각하고 있으실 겁니다. 아니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 대상, 즉 노에만(noema)일 뿐이라고 역설했던 독일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생각나시나요. 이런 분들이라면 “오직 의식일 뿐이다[唯識]”라고 주장했던 유식불교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겁니다. 혹은 신을 죽인 자리에 인간을 초인(Übermensch)으로 긍정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떠오르시나요. 이런 분들의 귀에는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야”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될 수 있다는 임제(臨濟) 스님의 사자후가 아직도 쩌렁쩌렁 울리고 있을 겁니다.


2.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없다

 

옳습니다. 디테일에 빠지지 않는다면, 사르트르도, 후설도, 그리고 니체도 방대하고 심오한 불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사람의 철학자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입니다. 왜냐고요. 그는 침묵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동기에서 철학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도외시하도록 만드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침묵했던 싯다르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아서 생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논리철학논고’는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야심찬 책입니까. 이 책에 다루고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논리철학논고’를 마무리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은 출판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스승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도움으로 출판사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저명한 스승의 소개라고 할지라도 책을 내려면 저자는 어쨌든 출판사와 직접 교섭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출판사측에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사단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책에 담겨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출판사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담지 않은 책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간신히 러셀의 중재로 책은 출간됩니다.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책에 쓸 수는 없었던 겁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글로도 쓸 수 없는 것이니까요.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논리철학논고’이 출간되자마자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대학을 훌훌 털고 떠나버린다는 점입니다. 이것만으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비범한 사람이었는지를 직감하게 됩니다. 누구나 탐내는 세계 최고의 명문대 교수 자리를 헌옷처럼 던져버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니지요. 그는 생각했던 겁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해명했으니, 더 이상 철학은 불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면서 삶을 영위하면 되니까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고 이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려고 삶의 세계에 뛰어드는 모습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나 우리의 원효 스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궁금하지 않으시나요. 도대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3. 말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무문관(無門關)’의 스물일곱 번째 관문은 너무나도 비트겐슈타인적입니다. 남전(南泉, 748~834) 화상과 어느 젊은 스님 사이의 대화를 살펴보십시오. 젊은 스님은 패기만만하게 물어봅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이 있으신가요?” 남전 화상에게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침묵해야만 하는 것이 있냐고 물은 겁니다. 그러자 남전 스님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은 이미 깨달음에 이른 남전 화상을 유혹합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인가요?” 남전 화상으로는 위기가 닥친 셈입니다. 젊은 스님에게 자신이 침묵하고 있었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면, 남전 화상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충분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스승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게으름이자 무책임 아닐까요. 반대로 젊은 스님에게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법인지 그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남전 화상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 “있다”고 말한 앞의 말을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있다면 이야기해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잠시 마음을 놓았다가는 어느 한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아찔한 능선 위에 남전 화상을 올려놓은 젊은 스님도 예사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에 이른 남전 화상은 가뿐하게 젊은 스님이 펼쳐놓은 함정을 빠져 나옵니다. “마음[心]도 아니고, 부처[佛]도 아니고, 중생[物]도 아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대답 아닙니까. 불교의 모든 경전은 결국 마음, 부처, 그리고 중생을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화엄경(華嚴經)’의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揭品)’에서는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등장 합니다. “마음, 부처, 그리고 중생, 이 세 가지에는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말입니다. 마음, 부처, 그리고 중생에 관한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단 마음, 부처, 그리고 중생이 구별된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구별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 침묵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깨달음에 이른 남전 화상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회복해서 부처가 되는 데 성공한 중생”입니다. 이런 존재를 어떻게 마음이니, 부처니, 혹은 중생이니 하고 일면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 아니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법은 바로 마음, 부처, 그리고 중생이 결합되어 있는 깨달음과 자유의 상태였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혼란만을 가중시키게 될 겁니다. 그것은 사변적인 논의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나야 할 영역이니까 말입니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다면, 깨달음에 대한 모든 논의는 횡설수설에 불과한 법입니다.

 

▲강신주

깨달음은 남전 화상이나 젊은 스님이 스스로 삶의 차원에서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놀라운 통찰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아마 남전 화상의 답을 들은 젊은 스님의 얼굴에는 빙그레 미소가 번졌을 겁니다. 쓸데없는 농담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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