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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양종 복원과 승과 실시

기자명 법보신문

꺼져가던 조선불교에 중흥의 불씨 지피다

1550년 12월15일 하명
허응당 보우스님과 함께
교단복원·승려양성 매진
유생 반대로 다시 폐지돼

 

1550년 12월15일 조선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날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가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연산군 때 폐지된 불교 승단인 선(禪)·교(敎) 양종을 복원하고 성종 때 폐지된 스님들의 과거제도인 승과를 실시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정 대신은 물론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이 즉각 반발에 나섰다. 또 성균관을 비롯해 지방유생들까지 나서 양종 설치와 승과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양종 복립에 반대하며 수업을 거부하는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지방유생들도 이듬해 5월까지 무려 446건에 달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유림들의 반발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문정왕후는 유림들의 상소에 대해 “이 법이 시행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인데 옛 제도를 되살린다고 하더라도 유교만을 전적으로 공부하게 하면 무슨 해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극도에 이르는가”라고 꾸짖고 양종 복원과 승과를 예정대로 추진했다. 특히 문정왕후는 이듬해 5월 선종과 교종에서 시행해야 할 조목인 ‘양종응행절목(兩宗應行節目)’을 예조에 내리고 팔도에 공문을 보내 모든 사찰에서 시행하도록 했다. 또 같은 해 6월 특명을 내려 보우 스님을 선종을 책임지는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로, 수진 스님을 교종을 책임지는 판교종사 도대사 봉선사 주지로 임명했다. 이로써 침체기에 맞았던 조선 불교계는 새롭게 교단 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처럼 문정왕후가 친불 정책을 소신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깊은 불심(佛心)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조선불교를 중흥시키겠다는 허응당 보우<진영 사진>스님의 원력 때문이기도 했다.


허응당 보우 스님은 조선 중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1510년 태어난 스님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해 1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24세 되던 해 금강산 이암굴에서 6년간 경전과 참선 수행을 하다 크게 깨달아 세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무술법난(戊戌法難, 중종 33년에 발생한 훼불사건)으로 수많은 사찰이 부서지고 많은 스님들이 처참하게 탄압받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스님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금강산에서 보림 수행을 하던 스님은 1548년 문정왕후의 명을 받아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침체된 조선불교의 중흥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 특히 선교 양종을 복원했고 1552년부터 승과를 실시하면서 선종과 교종에서 300여명의 스님을 선발해 서산·사명 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했다. 또 도승제를 시행해 5000여명의 스님들을 양성하는 등 질식사 위기에 놓여 있던 조선불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보우 스님은 유림 등 척불세력의 모함을 받아 요승(妖僧)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으며 온갖 배척과 탄압으로 결국 46세 되던 해 봉은사 주지를 사임하고 서산 스님에게 후임을 맡기고 홀연히 청평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경기도 고양에 위치해 있던 중종의 능을 옮기는 천릉을 진행하는 책임을 맡아 달라는 거듭된 간청을 못 이기고 스님은 다시 ‘도대선관교’라는 직위를 맡고 봉은사로 돌아왔다. 비록 문정왕후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 봉은사로 돌아오긴 했지만 스님은 그 길엔 이미 죽음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불교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했다.


예상대로 한 동안 잠잠하던 유생들은 다시 보우 스님을 공격했고, 운부사 사건을 교묘히 이용해 스님을 음해했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은 그 직위를 삭탈 당했다. 더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때를 기다린 듯 전국 유생들의 참소가 연일 계속되면서 스님은 승직마저 삭탈 당하고 제주로 유배됐다. 그리곤 제주목사 변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세수 56세, 법랍 49세였다. 스님의 입적과 동시에 조선 조정은 다시 양종과 승과를 폐지했다. 숭유억불의 조선조에서 꺼져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헌신했던 보우 스님. 늘 불교중흥과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던 보우 스님의 사상은 훗날 국난을 좌시하지 않고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의승장들로 이어졌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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