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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3000일 복원불사 끝내고 낙산사 떠난 정념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 특별기획
  • 입력 2013.12.17 16:59
  • 수정 2013.12.17 17:19
  • 댓글 0

“복원했다는 생각도 다 잊었다…이제 기도만이 내 소임”

이제 낙산사는 국민의 문화재
회향날 ‘낙산사 정념’ 지웠다


자연·가람·사람 조화에 역점
종교·남녀·세대·지역 넘어
모두에 설레임 주는 도량되길

 

소임 대중 엄하게 대한 것은
하심하라는 뜻…고맙고 미안

 

“관음도량이니 자비 행하라”
오현 스님 가르침 버팀목 돼

 

도움받은 분들 위한 기도는
지난 날 빚 갚는 유일한 길

 

 

▲서울 흥천사에서 만난 정념 스님은 “낙산사 복원에 시주하신 불자님들의 시은을 갚기 위해 기도 정진하는 것이 이제 가장 중요한 소임”이라며 “부족하고 허물있는 삶을 성찰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는 말로 그 간의 소회를 대신했다. 

 

 

‘낙산사 정념 스님’을 서울 흥천사에서 만났다. 12월10일을 끝으로 낙산사 주지와 회주를 거치며 3000여 일간 짊어져왔던 도량 복원의 소임을 내려놓은 다음 날이다. 지난 10여 년간 따라붙었던 ‘낙산사 스님’이라는 세간의 수식어를 이참에 털어내려는 듯 인터뷰 요청에 굳이 ‘흥천사에서 만나자’더니 함박눈이 내린 도량을 가로질러 다실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시원섭섭하시겠다”는 첫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질문과 대답은 막힌 물꼬가 트이듯 거침없이 진행됐다. 다음은 정념 스님과의 일문일답.

 

-. 짐이 무거웠던 만큼 마음은 가벼울 것 같다.
“섭섭할 것도 없고 시원할 것도 없다. 11월24일 복원불사 회향하는 날 ‘낙산사 정념’이라는 두 자를 놓아버렸다. 내가 낙산사를 복원했다는 생각, 정성을 들였다는 생각도 다 놓았다. 그저 낙산사가 성지로 잘 보전되고 천년고찰로 아름답게 후대에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 3000일 넘게 머릿속에 낙산사를 품고 살았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회향이 다가올수록 어떻게 하면 낙산사가 천년고찰의 모습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더 큰 화두가 됐다. 복원불사를 이끌고 왔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낙산사 복원에 공이 있다거나 정성을 들였다는 생각 자체를 놓고 싶었다. 누가 복원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낙산사는 국민의 사찰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 낙산사가 앞으로 어떤 사찰이 되길 바라는가.
“설레임이 있는 사찰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희망을 품고 설레임을 느끼고 돌아오는 절이 됐으면 좋겠다. 종교, 남녀, 세대, 지역을 넘어 누구에게나 희망, 꿈을 주는 사찰이 되었으면 좋겠다.”


-. 도량을 복원했다고 해서 저절로 될 일은 아닐 것 같다.
“낙산사를 복원하며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자연과 문화, 사람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었다. 원통보전을 참배한 후 ‘꿈이 이뤄지는 길’을 걷고 해수관세음보살님을 참배하고 ‘설레임이 있는 길’을 가도록 도량을 배치했다. 이런 테마가 참배객들에게 희망과 설레임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 복원과정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다.
“도량이 소실된 후 많은 분들이 달려와 위로와 희망을 주셨고 복원과정에서도 수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주셨다. 모두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설악산 신흥사 조실 오현 큰스님은 커다란 버팀목이셨다. ‘천년고찰을 복원하는 것이 정념이가 사는 길이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살아도 죽은 것’이라며 ‘낙산사는 관세음보살님의 도량이니 모든 이웃들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큰스님의 말씀은 낙산사 복원의 가장 큰 지침이자 힘들고 지칠 때마다 종신불퇴의 힘이 되었다.”


-. 소임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나.
“주지 소임을 더 맡도록 마지막까지 권하셨다. 낙산사 복원에 기울인 정성과 의미가 큰 만큼 그것을 가장 잘 지키고 가꿔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 육체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몸이 힘든 것 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원형과 다른 복원, 천년고찰의 자태를 벗어나 조화가 깨지는 일이 벌어질 때 때였다. 예를 들면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거나 작은 석재 여러 개를 써야할 곳을 큰 석재 하나로 끝내버리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잠시라도 신경을 못 쓰거나 자리를 비우면 공사가 쉽다는 이유로, 혹은 편리하거나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잘못된 부분을 다 뜯어내고 원형대로, 전통기법에 맞게 다시 일을 진행해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실무자들이나 시공업체들의 반발이나 불평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다보니 정초 칠일 기도 때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다.”


-.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사중의 대중들에게 무척이나 엄하게 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천년의 성지가 나로 인해 상처 입는 것이었다. 도량이 제 모습을 찾아가면서 대중들이 마음의 긴장을 놓을까 염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조금씩 편안함에 취해가다 보면 실수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돼야 하는데 자칫하면 권위를 내세우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결국은 낙산사라는 천년성지의 이름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소임자들이 하심하도록 더욱 엄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것도 내 욕심이었겠지만 믿고 따라준 대중들에게 고맙다. 특히 지난 4년간 주지 소임을 맡아 궂은일을 도맡아했던 무문 스님은 영수 스님 상좌인데도 은사를 시봉하는 것 못지않게 나를 도와줬다. 큰 힘이 되었다.”


-. 이제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낙산사 복원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한다면.
“낙산사의 역사에는 세 번의 큰 전환점이 있다. 첫 번째는 의상대사께서 이곳에 산문을 열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에 이르러 세조가 낙산사를 복원한 것이다. 세조의 복원으로 낙산사는 대가람을 이뤘고 그 모습이 오늘날 낙산사 복원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세조 이후 낙산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수차례의 화재와 한국전쟁을 겪어 전소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스님들이 조금씩 도량을 복원하며 명맥을 이어왔지만 체계적인 도량 복원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전각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2005년 화마로 도량이 전소된 것은 더 할 수 없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초의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가람을 되살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히 전화위복이라 할 만하다. 특히 이번 복원을 계기로 낙산사가 불교만의 성지가 아닌 국민 모두의 문화재로 거듭났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낙산사 화재 직후 관계기관에서는 화재 직전의 모습으로 복원하자고 했다. 하지만 원형복원이라는 원력을 세우고 2년여의 설득 끝에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난 2008년 낙산사 일원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제는 국가와 국민들이 함께 지키고 보전해야할 문화재가 된 것이다. 낙산사 역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이라고 생각한다.”


-. 원형복원을 강조하는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이 많이 신축됐다.
“낙산사 불사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과 자연, 가람의 공존이었다. 어디서나 설악산과 동해바다를 볼 수 있고 전각과 자연이 서로를 거스르지 않도록 소박하게 배치했다. 특히 바람이 지나 갈 수 있도록 바람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다시는 도량 전체가 전소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동시에 화장실, 템플스테이수련관 등 필요한 편의시설들을 함께 갖춤으로써 사람과 자연, 사람과 도량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원형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시대에 따른 가람의 진화도 중요하다.”


-. 시대에 따른 진화란 어떤 형태를 의미하는가.
“전통적인 사찰의 구조와 법당의 형태는 편리한 시설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편을 개선하고 현대인들의 신행에 알맞은 사찰의 형태를 흥천사에서 찾고 싶다.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지 않고 언제나 찾아와 편하게 수행하고 기도할 수 있는 도량의 형태, 특히 돌아가신 부모님을 가족들이 함께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사찰이 제공함으로써 가족 간의 유대가 견고해 질 수 있도록 사찰이 노력해야 한다.”

 

-. 이 시대 불교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전국의 전통사찰은 수행자들에겐 수행의 공간이고 재가자들에게는 힐링의 공간이다. 동시에 도심 사찰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생활 속 수행과 신행, 공동체의 공간이 돼야 한다.”

 

-. 향후 거취와 관련 있는가.
“흥천사 주지소임을 맡은 이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흥천사의 원형도 복원해야 한다. 동시에 도심 속 도량인 만큼 현대인들의 신행 패턴에 맞춰 열린 공간을 만들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흥천사에서 이 시대 불교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다. 무엇보다 낙산사 복원과 종단의 소임을 동시에 떠맡고 있다 보니 허물도 많았고 불사에 시주하신 신도님들을 위해서도 충분히 기도하지 못했다. 약속을 지켜야할 때다. 도움을 받은 분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것은 업이라고 생각한다. 빚을 갚는 기분으로 기도정진하면서 부족하고 허물있는 내 삶도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참회하며 정진할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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