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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시선·부당한 차별 맞서 더불어 사는 세상 일군다

  • 새해특집
  • 입력 2014.01.05 01:43
  • 수정 2014.01.0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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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삶 '동행'] 2. 인권·평화운동 펼치는 이주민 활동가들

인권운동 소모뚜
본국으로 돌아가 뜻 잇기를

통역봉사 닛타야
이둣 돕는건 모든 불자의 의무

담마프랜즈 싸밀
스리랑카사찰 건립이 서원

NGO활동가 민수
작아도 변화 단초 된다면 만족

2013년 11월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 수는 156만명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절반에 해당되는 70여만명이 노동력 제공을 위해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국내에 머물고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사는 88올림픽 이후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각국의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다. 햇수로 벌써 25년이 됐다. 그럼에도 2013년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노동환경은 통제돼 있고, 이를 악용한 ‘인종·인권 차별’은 전국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이 언어와 신분의 한계에 갇혀 차별받고 고통받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일어선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며 우리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 이주민노동자 인권운동가인 소모뚜씨.

미얀마 출신의 소모뚜씨는 대표적인 이주민노동자 인권운동가다. 그는 19세 때인 1995년 가족의 생계를 위한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다. 여행자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한 그는 ‘불법체류자’가 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 다행히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들은 과연 선진국 대한민국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언어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즈음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요청이 밀려들어왔다. 불법(佛法)이 곧 삶인 불교국가 미얀마에서 태어난 그에게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동법과 노동인권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조직적인 지원을 위해 버마행동한국에 동참했다. 2003년 정부가 이주노동자 정책을 산업연수생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전환하자 생계마저 제쳐두고 인권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정부가 이주노동자의 신분을 ‘산업연수생’에서 ‘노동자’로 바꾸는 대신 기존에 한국에서 일해 온 외국인들을 모두 출국시키고 새로운 이주민을 받겠다고 한 것은 화근이었다. 그동안 산업연수생이라는 신분에 갇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대우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강제출국을 당할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고,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10여명에 달했다. 소모뚜씨 역시 천막농성장을 지키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노동인권 보장을 위해 싸웠다.

현재 소모뚜씨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2004년 신청한 정치적 망명이 7년만인 2011년 받아들여졌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운동뿐 아니라 한국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미얀마 정부가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소모뚜씨는 비슷한 형편의 미얀마 사람들과 함께 지난해 식당과 상점을 열었다. 인권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지원에만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당과 상점을 통한 수익은 미얀마와 이주민 인권개선을 위해 사용됩니다. 한국에서 경험한 노동과 인권의 의미를 각자의 고국서 꽃 피운다면 미얀마 등 후발국의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앞당기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 태국이 고향인 통역자원봉사자 정닛타야씨.

정닛타야씨는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태국어 통역봉사를 하는 결혼이주여성이다. 닛타야씨 역시 출발은 불법체류 노동자였다.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일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월급은 80만원 남짓이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그렇지만 몸이 아플 때면 더욱 서러웠다. 주위의 도움으로 어렵게 병원을 방문해도 의사전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나마도 불법체류자인 까닭에 대부분의 경우 참고 견뎠다.
2010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돼 현재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자원봉사활동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후 곧바로 시작했다. 서툰 한국말이지만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서글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김포지역 태국공동체 활동도 시작했다. 닛타야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는 한 달 평균 50~60건. 대부분은 병원 등 단순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이고, 임금체불·부당해고 등의 법적인 부분은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 것은 불자로서 당연한 도리입니다.”

닛타야씨는 김포지역에 태국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으로 오기 전 매일 새벽 탁발하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렸고, 절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대다수 태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활했다. “김포지역에만 1500여명의 태국출신 이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공간이 마련되도록 한국불교계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종교를 넘어 이주민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는 싸밀씨.

담마프랜즈 부회장 싸밀씨는 스리랑카 이주민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회장 담마끼띠 스님을 보좌하며 스리랑카 이주민들의 고통과 아픔의 현장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고 있다.

싸밀씨는 2005년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 현재는 대진대 한국어문학부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그는 2007년 스리랑카 불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며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스리랑카공동체를 발족시켰다. 12명으로 시작된 공동체는 현재 500여명 규모로 성장했다. 친목모임으로 출발한 스리랑카공동체는 이후 회원들의 자발적 보시에 의한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 어려움을 겪는 스리랑카 이주민을 돕기에 이르렀다.

이러던 중 그는 스리랑카 출신의 무슬림들이 한국에서 겪는 문화적 어려움을 접하게 됐고, 결국 2011년 스리랑카공동체를 확대한 담마프랜즈를 출범시켰다. 스리랑카는 국민의 70%가 불교를, 15%가 힌두교를, 10%가 이슬람을 종교로 하고 있다. 스리랑카공동체가 스리랑카 출신 불자들의 모임이라면, 담마프랜즈는 종교의 벽을 넘어 스리랑카 이주민을 지원하는 단체인 셈이다. 담마프랜즈는 비단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한 경제적 후원뿐 아니라 언어적·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별을 개선하는 일에도 적극 매진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찰을 건립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기도하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자치공간을 만드는 것이 서원입니다.”

▲ 네팔 출신의 티베트인 민수씨는 NGO활동가다.

민수씨는 네팔 출신의 티베트인 NGO 활동가다. 1998년 미국으로 향하던 중 경유지였던 한국이 좋아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가 한국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불법체류뿐이었고, 생계를 위해 공장과 농장,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러나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실상은 생각과 달랐고 2003년 인권운동에 동참했다. 이주노동자들의 강제추방 반대를 외치며 2년간 천막농성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 후 민수씨는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에 더해 다문화 차별금지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지만 은행·병원·관공서 등 일상에서 겪는 차별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의 자유와 평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티베트인 민수씨에게 티베트의 자유와 평화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서울 명동에 티베트식당 ‘포탈라’도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티베트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평화적 시위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던 중 2010년 명동 재개발 사태의 직접 피해당사자가 되면서 철거민운동에도 뛰어들게 됐다.

벌서 16년. 한국이 좋아 미국행을 포기하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이래로 민수씨의 삶은 부당함에 맞서는 고단함의 연속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일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라며 “나의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는 이미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불교계에 바라는 것은 일불제자로서 차별 없는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응원하고 차별에 함께 맞서는 도반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27호 / 2014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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