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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고산 흥국사

기자명 김택근

북한산 흰봉우리 향해 화두 세우고 가슴엔 민초를 품다

▲ 약사여래기도도량 흥국사 경내엔 새해의 희망을 담은 연등이 소담스럽게 걸려있다. 문무왕이 즉위한 서기661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흥성암’이 조선시대 영조의 중창 이후 ‘흥국사’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를 동여매는 일은 아무래도 쓸쓸하다. 갈수록 인간들은 시간을 쪼개고 그래서 뾰쪽해진 시간에 찔린다. 허겁지겁 달려온, 아슬아슬했던 길들을 눕혀 놓고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 다시 새해가 밝았다. 따지고 보면 생성과 소멸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미래인이듯 우리도 누군가의 미래인이다. 어둠이 빛이고 빛이 어둠이다. 우리가 끌고 온 것들을 모두 어둠 속에 묻었다. 저무는 해를 보며 손을 흔드는 것은 결국 우리를, 나를 떠나보냈던 것이다. 지난 ‘나’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기에는 겨울 산사가 제격이다. 서울 근교의 천년 고찰을 찾았다.
 
다행히 볕이 좋았다. ‘흥국사’라 쓴 표지석이 자못 거대했다. 육중한 표지석 아래는 가는 시내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과 경기도를 경계 짓는, 또 북한산과 노고산을 가르는 창릉천이다. 창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는 사곡교(寺谷橋)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리를 지나 다시 작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방 일주문이 나온다. 약사여래기도도량 흥국사(주지 대오 스님). 대개의 천년 도량이 그렇듯이, 일주문에서 엎드리면 마을에 닿을 듯했다. 겨울임에도 경내는 포근했다. 개와 고양이가 어울려 오후의 햇볕을 굴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북한산 봉우리의 하얀 머리와 이마가 보였다. 아무리 쳐다봐도 절경이다. 정작 북한산 속에 박혀있는 절들은 연봉의 위용을 알지 못할 것이다. 원효, 의상, 승가, 문수, 보현, 나한…. 산봉우리마다 불가의 이름을 붙였으니 두 손만 모아도 경배였다. 절은 노고산(할미산)에 있지만 그곳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에너지가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할머니 품에 안겨 원대한 기상을 꿈꾸고 있음이다. 거대한 북한산 연봉을 품고 있는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이는 누구일까. 창건설화를 보니 661년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설화를 따라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솥발처럼 갈라져 견고했던 삼국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신라가 백제를 무릎꿇렸지만(660년), 죽고 죽이는 살육전은 계속되었다. 피비린내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당시 승려들의 관심사는 온통 민초들의 고통 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나라님들의 야심이었지만 민초들에게는 공포이며 눈물이었다. 하지만 불법으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품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척박했다.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즉위하던 해(661년) 원효대사는 양주 천성산을 떠나와 북한산 원효암에 머물고 있었다. 신라불교의 쌍벽인 의상 대사는 그 해 다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원효는 이미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밤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경지를 깨달은 고승이었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멀리 보니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고 있었다. 서기(瑞氣)를 좇아 북한산을 내려오니 건너편 노고산에 약사여래 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 스님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석조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셨다.
 
약사여래불을 모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병을 고쳐주고,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약사여래의 ‘현세의 가피’가 가장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지었다. 사람들은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라는 뜻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당시에 흥성암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중에 번듯한 사찰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신심을 모으기 위해 기왕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원효를 끌어들였는지도 모른다.

북한산 머물던 원효대사
북서쪽서 서기 발견하고
661년 흥성암으로 창건

삼국 말기 피비린내 속
고단한 민초 삶 보듬어
조선 영조 흥국사로 개명
국태민안 기원 도량으로

1904년 스님·신도 뜻 모아
30년간 염불 ‘만일회’ 결사

6·25당시 인민군 토벌 포격
도량 에워싼 소나무가 막아

2001년 대오 스님 취임 후
어린이 불자 양성에 주력

올 가을 선원 개원 이후엔
참선 도량으로 변모 기대

지금의 이름 흥국사를 얻은 것은 조선 영조 때였다. 1770년(영조 46) 왕이 생모 숙빈 최씨의 묘원인 소녕원(파주군 광탄면 고령산 소재)에 행차했다. 왕을 낳았으면서도 왕후가 되지 못하고 빈이 되어야만 했던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게 영조의 ‘사후 효도’는 지극했다. 영조는 소녕원을 자주 찾아가 향을 사르고, 릉이 아닌 묘원(墓園)에 묻혀있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해에도 세모에 소녕원을 찾았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북한산 아래 절골 부근에서 큰 눈을 만났다. 왕은 근처 절에 머물러야 했다. 바로 흥국사였다. 다음 날 아침 왕은 북한산을 쳐다봤다. 빼어난 설경에 눈을 떼지 못했고, 이윽고 시흥이 일었다.
 
조래유심희(朝來有心喜)
척설험풍미(尺雪驗豊微)
아침이 오니 마음이 기쁘고
한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
 
왕은 버들가지로 시를 적어 편액을 내렸다. 그러면서 절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라 일렀다. 또 ‘약사전(藥師殿)’ 석자를 써주며 법당을 중창하도록 했다. 이후 흥국사는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 도량이 되었다.
 
흥국사에는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다. 그리고 왕실과 관련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궁에서 평생을 보낸 상궁들이 말년에 흥국사를 찾아와 노후와 사후(死後)를 의탁했다. 1904년 흥국사에는 의미 있는 결사가 있었다. 해송 스님을 회주로 맞이하여 스님과 상궁들을 중심으로 한 신도들이 뜻을 모아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했다. 만일회는 백련사(白蓮社)의 다른 이름으로 30년 동안 염불하며 부처님을 받들겠다는 결사체였다. 그 후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1915년 건물 2동 32간을 짓고, 2년 후에는 향각과 동별동 2동 14간을 세우니 대가람이었다. 인근이 모두 흥국사 땅이었고, 가을이면 사찰 전답에서 나오는 곡물이 경내에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화엄법회를 열어 서로의 마음을 닦았다. 결사체 만일회는 비상하게 정진했던 세월을 비문(흥국사만일회비기)으로 남겼는데, 지금 흥국사 입구에 서있다. 지금 봐도 빛이 난다.
 
▲ 입구에 세워져 있는 ‘흥국사만일회비’.

‘아아! 오늘날 사문의 풍조가 예전과 아주 달라서 부처님을 팔아먹고 상주물을 함부로 쓰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며 바깥에 권속과 사가를 두어 저자를 이루니, 거의 사문으로서의 행실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그러나 해송 스님과 그 청정대중들은 연사를 맺은 이래 26년 동안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함께 기십만번 염불정진하여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과연 경에 이른 바대로 연잎 위에 성태(聖胎)가 이미 향기롭구나. 또한 사묘(寺廟)를 장엄하고 화엄법계를 연설하니, 이와 같은 가람은 옛날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거늘, 하물며 말법시대에 있어서는 일러 무엇하겠는가.
 
태산, 화산과 노고산의 영령들은 때맞춰 와서 길이 산문을 보존할지어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법당 바닥을 뜯어내고 그 밑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이에 국군이 북한산 삼천리골에서 포를 쐈다. 그러자 흥국사를 에워싸고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약사전과 나한전, 그리고 그 안에 모신 부처님은 무사했다. 지금도 포탄 파편이 박혔던 흔적들이 법당 곳곳에 남아 있다. 흥국사 사하촌 노인들은 당시를 기억하며 불타버린 소나무들을 아쉬워했다. 흥국사를 에워싸고 있던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기상이 늠름하고 자태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나무들이 온 몸으로 흥국사를 지켜낸 것이었다. 간절한 기도와 치열한 수행정진을 지켜봤던 나무들이 제 몸을 살라 부처님을 지켜드린 것이리라.
 
일제 강점기에도 불법을 드높이던 흥국사였지만 전쟁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91년 홍선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사격을 높였다. 재임 중 끊임없이 크고 작은 개보수 공사를 벌였고, 사찰의 제반 시설을 갖추었다. 2001년 주지에 취임한 대오 스님은 눈을 밖으로 돌려 대외 봉사활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인재불사에 주력하고 있다. 지역 아동센터를 개설하여 소외계층 자녀들을 돌보며 교육시키고 있다. 초등 생태학교, 어린이 불교학교, 숲 유아학교 등을 수시로 열고 있다. 이렇듯 어린이에 각별한 정성을 쏟고 있음은 그들이야말로 천진불이고 가장 확실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또 여러 자비나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왕성한 사회활동이 곧 확실한 포교활동이기 때문이다. 고양시 사회복지활동은 흥국사에서 시작되고 있다.
 
또 스님은 흥국사 선원을 완공했다. 올 가을에는 개원식을 갖고 선승을 들일 계획이다. 기념법회와 기념행사를 열어 ‘참선도량 흥국사’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깨어 있으면 원효가 빛을 보고 찾아왔듯이 전국의 선객들이 선방의 작은 불빛을 찾아 사곡교를 건너올 것이다. 흥국사는 이를 서원하고 있다.
 
▲ 흥국사 경내에서 보이는 맞은 편 북한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도량을 지키는 외호신장 같다.

한 해가 밝았다. 한번쯤 흥국사 경내에서, 아니 산 주변 어디서라도 북한산의 흰 이마를 보자. 아마 그 이마를 닮아 내일은 희게 빛날 것이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28호 / 2014년 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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