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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인문, ‘송림야귀도’

기자명 조정육

진리의 길 위에선 다른 사람 행동을 핑계 삼지 않는다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젖지 않은 연꽃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지난 연말 택시를 탔다. 수원에서 일이 있어 택시를 탔는데 하필이면 퇴근시간과 겹쳤다. 용인에서 수원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릴 뿐이었다. 혹시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는데 운전기사는 천하태평이다. 점멸등이 켜지면 미리 출발해도 되는데 완전히 파란불이 될 때까지 꿈쩍도 안한다. 달릴 때도 마찬가지다. 앞차가 천천히 가면 추월할 법도 한데 그저 느린 차를 따라갈 뿐이다. 끼어들기 같은 것은 아예 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기사들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다.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나는 그가 흥미로웠다.

“연말에 운전하기 힘드시죠?”
대화가 하고 싶어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그렇죠, 뭐.”
단답형 대답이다.
“손님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불편하신가요?”
이번에는 내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긴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분명히 잘못했는데 남들도 다 그러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요즘 연말이니까 술을 많이 마시잖아요. 그렇게 마셨으면 대리를 부르면 되는데 ‘만땅으로’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돈 몇 푼 아끼려고 운전대를 잡아요. 그러니 사고가 안 나겠어요? 대형사고가 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되면 자기가 한 잘못은 모르고 어쩌다 재수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해요. 남들 다 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고 따지면서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의 택시를 이용한 승객에 대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 음주운전자 얘기다. 연말이다 보니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던 모양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의미심장한 멘트를 날린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살든 상관할 필요가 뭐 있어요? 자기만 똑바로 살면 되지. 안 그래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현재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기본적인 법과 계율이 과거의 부처님들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과 꼭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여쭈었다.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과거 여러 부처님들이 재일(齋日)을 지키는 시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가르침만은 지금의 당신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셨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셨다.
 
“일체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諸惡莫作)
 착한 공덕을 힘껏 행하며(衆善奉行)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

일체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한 공덕을 행하는 것의 당위성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창한 논리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온 진리다. 한 부처님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두 부처님만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일곱 부처님이 한결같이 가르치신 진리다. 그냥 하신 말씀도 아니다. 고구정녕(苦口丁寧) 하신 말씀이다. ‘고구정녕’은 ‘입이 쓰도록(苦口) 간절히 당부하다(丁寧)’는 뜻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입이 아프도록 간곡하게 당부하셨을까. 그렇게 입이 닳도록 강조한 것에 비해 내용이 너무 평범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 아닌가. 알고 있지만 지키기 힘든 것. 그것이 진리다. 진리를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다면 진리대로 사는 거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진리와 어긋난 삶을 살더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이 게송을 흔히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 한다. 과거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게송이라는 뜻이다. 한글로 번역된 부분을 읽어도 상관없지만 문구가 워낙 좋고 짧으니 이번 기회에 한문으로 된 부분을 외워도 좋을 것이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어떤가. 좀 있어 보이지 않은가. 공부는 이런 멋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입술에 착 달라붙을 때까지 무조건 외우는 거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이 문장이 완전히 내 것이 될 것이다. 내 것이 된 논리는 소멸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 힘을 발휘한다. 도저히 뿌리치기 힘든 유혹에 직면했을 때 단호히 빠져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신념처럼 말이다.

김홍도와 동시대 활동했지만
묵묵히 일가를 이룬 이인문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 걸어야

조선시대 화가 중 소나무를 가장 잘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주저 없이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1)을 들고 싶다. 정선과 이인상도 소나무를 잘 그렸지만 그림에서 솔향기를 맡을 수 있게 그린 사람은 이인문이 단연 최고다. 그가 그린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2점)와,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를 보면 두 세 명의 선비가 솔 향기 흐르는 계곡 가에 앉아 두런두런 한담(閑談)을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구성 요소가 등가(等價)다. 소나무도 바위도 계곡물도 바람도 심지어 사람조차도 다른 구성 요소를 밀어내지 않는다. 서로가 주인공이다. 소나무가 아무리 우람하기로서니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물소리가 아무리 세차기로서니 대화 소리를 방해하지 않는다. 바위가 아무리 굳건하기로서니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고 바람소리가 아무리 세차기로서니 듣는 사람의 귀를 가득 채우지 않는다.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계. 이인문의 그림 속에는 조화로움이 담겨 있다.

▲ 이인문, ‘송림야귀도’, 종이에 연한 색, 24.7×33.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 사람의 필치에서 나온 작품이 ‘송림야귀도(松林夜歸圖):솔숲으로 밤에 돌아가다’다. 화면 중심에는 소나무가 가득하다. 소나무 주위로는 밤안개가 내려앉았다. 달빛 속에 은은한 밤안개는 땅을 덮고 나무 허리를 휘감더니 소요(逍遙)하는 선비의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계절이 언제일까. 밝은 달이 돋보이는 계절이니 가을일 듯 싶다. 안개 때문에 앞에 선 나무는 자취가 뚜렷하다. 뒤에 선 나무의 흐릿함 속에 거리감과 공간감이 느껴진다. 소나무만 그린 걸까. 조금 심심하다 싶어 두리번거릴 때쯤 한 선비가 그림자처럼 오솔길을 걸어간다. 죽장을 짚고 느리게 걸어간다. 거문고를 들고 주인의 뒤를 따르는 시동이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 느린 걸음이다. 그림 속에 선비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밋밋하고 평범한 산수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이인문이 선비를 그려 넣었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슬쩍 집어넣었다. 마치 인물을 전혀 그려 넣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게 그려 넣었다. 작가는 정말로 인물을 잊고 있었던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선비를 염두에 두고 소나무를 그렸다. 선비와 시동이 서 있는 지점을 보라. 인물이 서 있는 장소를 동그라미 치듯 소나무가 원형이 되게 배치했다. 비록 작게 그렸지만 여기야말로 진짜 이 그림의 핵심이야,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치밀한 계산속에 구도를 잡았으면서도 짐짓 무관심한 듯 붓질로 풀어낸 작가의 능청스러움이 얄밉다. 소나무와 인물이, 안개와 달빛이 힘겨루기를 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배려다. 알고 보니 대단한 그림이네, 싶을 때쯤 시동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동의 오른손에는 거문고가, 왼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다. 선비의 다음 행보가 짐작되는 물건이다. 평소에 눈여겨 본 장소에 도착하면 선비는 달빛에 취해 거문고를 뜯으리라. 맑은 바람(淸風)과 밝은 달(明月)이 한 자리에 있으니 흥에 겨워 대작할 친구가 필요하면 술 한 잔 따라 달에게 건배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이인문은 중인 출신 화원으로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이었다. 산수(山水), 인물(人物), 영모(翎毛), 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다. 소나무 그림 외에도 이인문의 대표작으로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대부벽준산수도(大斧劈皴山水圖)’등이 있다. 근대 서화가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이인문 그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마른 붓으로 산을 그리고 젖은 먹으로 나무를 그려서 밝고 어둡고 향하고 등지는 형상을 그리는데 있어 묘한 법을 얻었으니, 그린 사람은 고송유수이다.”

‘송림야귀도’에서는 마른 붓으로 나무를 그리고 젖은 먹을 연하게 우려내 안개를 그렸다. 밝고 어둡고 향하고 등지는 데서 묘한 법을 얻는 것은 ‘송림야귀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인문은 특히 그는 소나무를 잘 그렸다. 조선 말기의 학자 유재건(劉在建:1793-1880)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이인문의 소나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내가 일찍이 내성에서 이공(李公)이 소나무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운필(運筆)하는 것이 능란하고 임리(淋漓:사람이나 그 글씨, 그림 따위가 넘칠 듯 힘차다)하야 칠 십 노인의 필치 같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다 그렸는데 그 서리고 굽고 높고 꿋꿋한 줄기와 말쑥하고 깨끗하고 푸른 잎들이 축축 늘어진 것이 핍진(逼眞:진짜 같음)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이라고 일컬었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함께 활동하면서 열등의식은 없었을까. 당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김홍도 곁에 서 있는 중압감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송림야귀도’에서는 친구 재능이 뛰어난 것을 시기하는 자의 위태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담겨 있다. 택시기사가 얘기했듯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반듯하게 걸어가는 자의 넉넉함이다. 그게 어찌 그림뿐이겠는가. 우리 삶도 그러해야 하는 것을. 출발은 똑같이 했는데 어느 새 나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나가는 동료. 아직도 나는 치성한 번뇌에 시달리는데 좌복에 앉자마자 삼매에 드는 도반. 돈 잘 버는 남편과 좋은 대학에 들어간 자식을 가진 친구. 모두들 나를 좌절시키려고 있는 원수들이 아니다. 당신의 길을 잘 가라고 격려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젖지 않은 연꽃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게.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29호 / 2014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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