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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단개혁의 배경 - ① 총무원장의 권력독점

입법·사법·행정 장악한 독재권력이 개혁 열망 키워

▲ 의현 스님이 종단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종단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갈등과 대립이 이어졌다. 1991년 7월 월정사 주지 인선과 관련해 탄허문도회가 총무원을 항의 방문해 임명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94년 4월13일 조계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산성처럼 견고하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이날 새벽 1시 서울 조계사를 에워싸고 있던 경찰병력이 철수를 시작했고, 더 이상 버팀목이 사라진 의현 스님은 결국 새벽 5시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8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였지만 ‘종단을 개혁하겠다’는 사부대중의 원력은 넘어서지 못했다. 스님은 이날 대각사에서 “사직원을 종정에게 제출했다”는 짤막한 말만 남긴 채 잠적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월26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선우도량, 중앙승가대 학인 등 스님들과 재가자들로 구성된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가 ‘종단개혁을 위한 구종법회’를 연지 20여 일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계사에서 보름 넘게 단식을 하던 스님들과 불자들은 환호성을 쏟아냈다.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맞잡고 눈시울을 적셨고,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범종추를 이끌었던 젊은 스님들과 노구를 이끌고 종단 개혁에 동참한 원로스님들도 두 손을 꼭 부여잡고 기뻐했다. 당시 언론이 보도한 이날의 풍경이다.

1994년 종단개혁은 종단의 낡은 행정제도와 비민주적 종단 운영, 정권에 예속되는 구태를 혁신한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젊은 스님을 비롯해 종단의 원로 스님과 재가자까지 힘을 합쳐 종단의 절대 권력을 무너뜨린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종단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비불교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급진적 개혁방식은 대중공의로 문제를 해결했던 불교전통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지적도 있다. 일각에서 1994년 종단개혁의 이면에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종단분쟁사의 어두운 그늘이 잠재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방 이후 조계종은 혼란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불교정화운동이 취처승들의 분종으로 일단락됐지만 이후 종단 권력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현대 조계종사는 종권분쟁사’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조계종은 종권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67년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대립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인사와 재정 등 종단의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대립이었다.

이는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비구 측이 종헌개정을 통해 종단의 모든 권력을 종정에게 집중되도록 한 것에서 비롯됐다. 종정이 인사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반면 총무원장은 종정을 보좌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종정을 맡기로 한 비구측이 종단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도입한 방안이었지만 정화 이후 오히려 종단 내분의 빌미가 된 셈이다.

1966년 통합종단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된 청담 스님은 종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 했고, 당시 총무원장 경산 스님은 종정이 지나치게 실무에 관여하려 한다며 반발했다. 급기야 갈등은 극에 달해 조계종은 청담 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파와 경산 총무원장을 지지하는 계열로 양분됐다. 이후 청담 스님은 비상종회를 통해 다시 원로원장으로 복귀했고, 봉은사 땅 매각 문제로 월산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사퇴하자 직접 총무원장을 맡아 종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도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종권 다툼은 계속됐다. 1974년 제5대 종정에 오른 서옹 스님은 다시 종정중심제를 구축했다. 종단의 안정을 위해서는 법의 상징인 종정이 행정까지 관할하는 게 효율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의현스님이 임명한 주지
중앙종회 의원까지 겸직
규정부가 사법기능 대신
견제보다 원장 눈치보기

사회민주화 경험한 스님
종단내부문제 관심 갖자
종단 개혁 논의 ‘급물살’

대중공의 전통 배제하고
힘 논리 앞세운 급진개혁
종단분쟁사의 잔영 남아

그러나 이 제도는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급변하는 시대에 종단이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종정과 총무원장의 역할이 구분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중앙종회는 총무원장 중심제로 환원하려는 종헌개정을 추진했고, 곧 심각한 대립이 시작됐다. 양측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자 서옹 스님은 11월11일 비상종령 37호를 내려 중앙종회해산을 명령했고, 중앙종회 측은 법원에 서옹 스님 등 집행부의 직무집행중지 가처분신청으로 맞섰다. 갈등의 골이 깊게 패인 양측은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종정 측은 조계사에, 종회 측은 개운사에 각각 총무원을 설치함에 따라 조계종은 ‘1종단 2총무원 체제’로 양분됐다.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은 1980년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가 불교정화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사찰을 군홧발로 짓밟는 ‘10·27법난’을 자행했다. 교단안정화를 위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월주 스님은 강제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뒤이어 ‘정화중흥회의’가 발족됐다. 정화중흥회의는 종헌을 개정해 종정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인사와 재정 등의 실권을 총무원장에게 두도록 했다. 또 종회는 원로원과 중앙종회의 양원제로 나누었으며 사법기능의 호계위원회를 신설해 3권 분립의 모양을 갖췄다. 그럼에도 종권분쟁은 그치질 않았다. 과거와 같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대립은 줄어든 반면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노리던 총무원장과 중앙종회간의 갈등이 커졌다. 이로 인해 종회 때마다 종회의장이 바뀌고, 총무원장도 수시로 교체됐다. 1986년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기 이전까지 4년 임기를 채우는 총무원장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스님은 처음으로 4년의 임기를 채웠을 뿐 아니라 재선에 이어 3선까지 강행하려 했다. 일각에서 의현 스님을 종단사의 입지적 인물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정치권과의 유착과 측근의 관리, 정적들의 효과적인 제압 등 의현 스님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뒷받침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조직과 제도를 통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꾸준히 다진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의현 스님은 1988년 중앙종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종헌 개정을 통해 독주체제를 확고히 했다.

당시 종헌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입법과 사법, 행정 등 종단 3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입법부에 해당되는 중앙종회의 경우 간선직 27명에 대한 선출권을 총무원장이 당연직 의장이 되는 간선의원 선출위원회에서 뽑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교구별로 선출되는 종회의원도 총무원장이 임명하는 본사주지가 겸직하도록 했다. 총무원을 견제해야 할 중앙종회가 총무원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또 총무원장 산하에 규정부를 두고 감사권과 인사를 실질적으로 행사했으며, 호계위원회의 업무까지 관장했다. 이런 규정을 바탕으로 의현 스님은 역대 어느 총무원장도 갖지 못했던 막강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은 상대적으로 소외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주지 인사로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일방적 종단 운영에 대한 내부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런 가운데 1970~8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스님들이 종단 내부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종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급속도로 커져갔다. 여기에 1987년 군부독재권력을 무너뜨린 ‘6·10민주항쟁’의 경험은 곧 사부대중이 원력을 모은다면 종단 독재 권력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다보니 불교적 문제해결 방식을 찾기보다는 ‘힘의 논리’가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당시 범종추 대변인을 맡았던 법안 스님은 “입법과 행정, 사법의 권한을 모두 갖고 있었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 내에서 종단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독재권력 체제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종단의 체질을 바꿀 수 없었다”고 말했다. 범종추 상임고문을 역임한 지선 스님 역시 “(당시 개혁세력들은) 지도자가 바뀌지 않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며 “지금 당장 종단 집행부부터 말단까지 썩어가고 있는데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점진적 개혁을 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1년 해인사 승려대회를 계기로 구성된 종단제도개혁위원회를 중심으로 종단개혁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급진적 개혁논리만이 옳았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1993년 11월 서암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발표한 11개항의 ‘종단개혁안’은 종단운영과 재정, 포교, 교육 등에 대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1994년 종단개혁 때 내세운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94년 종단개혁세력들은 서암 스님의 개혁안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개혁 인물로 내몰았다는 지적도 있다. 종단 내부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던 1994년 3월까지 대다수 언론이 종단개혁보다는 또 다른 종권다툼으로 인식한 경향이 뚜렷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19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종단운영의 민주화 등 수많은 제도개선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득이했더라도 힘의 논리를 내세운 개혁방식은 4년 뒤인 1998년 종단사태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0호 / 2014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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