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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사임당, ‘묵포도도’

기자명 조정육

시절인연 나무에 맺힌 열매는 어제 뿌린 행업의 결과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선한 사람도 재앙이 따른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선인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법구경

수닷타의 보시 만류하는 신장
부처님, 설법으로 깨우침 선사
“선의 과보는 반드시 나타나”

신사임당 그림 속 세 송이 포도
익는 속도 빨라도 우쭐대지 않아
제대로 온전히 익는 것이 중요

아침에 TV를 켰다. 뉴스를 틀자마자 밤새 발생한 사건 사고가 줄줄이 나열된다. 사건의 피해자들은 힘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독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이 푸념한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 인간들은 잘 살게 놔두고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사람들한테만 벌을 준단 말인가. 진짜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생각을 우리들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운 수닷타 장자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을 바닥에 깔아 땅을 사서 기원정사를 지은 사람이 수닷타 장자였다. 그는 평소에도 널리 베푸는 것을 좋아해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사람들을 구제해왔다. 수닷타라는 본명 대신 ‘아나타(의지할 데 없는 자) 핀디카(먹을 것을 주다)’라는 뜻의 ‘급고독(給孤獨) 장자’로 알려진 것만 봐도 그의 보시행을 짐작할 수 있다. 급고독 장자는 특히 부처님께 헌신적이었다.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씩 기원정사를 찾아와 부처님께 공경 예배를 올렸다. 올 때마다 단 한 번도 빈손이었던 적이 없었다. 항상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는 음식과 꽃과 향이 들려 있었다.

이같이 오랜 세월을 두고 보시를 하다 보니 그는 가난해지고 말았다. 가난해진 다음에도 여전히 그는 매일 부처님을 찾아뵙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어 더 이상 가지고 갈 물건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자기 논에서 흙을 파가지고 가서 수도원의 꽃나무 주변에 쏟아놓고 왔다. 그만큼 보시에 철저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급고독 장자의 보시행을 지켜보다 못한 대문의 신장(神將)이 장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당신의 집 문을 지키는 신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재산을 모두 석가모니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자신의 장래는 생각하지 않아 이제 아주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부처님께 보시하지 말고 당신의 장래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다시 부자가 되십시오.”

이 말을 들은 급고독 장자는 신장을 크게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야단침과 동시에 그를 내쫓아버렸다. 신장은 서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급고독 장자는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수행을 통해 도달한 첫 번째 성인의 경지. 이 경지에 이르면 그릇된 견해, 진리에 대한 의심 따위를 버리고 성자의 지위에 들어 일곱 번 이상은 윤회하지 않게 된다)에 이른 성자였고 그의 가족들도 성자였기 때문에 신장으로써는 감히 그들의 성스러운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쫓겨난 신장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신장은 도리천으로 올라가 천왕에게 억울한 자기 사정을 하소연했다. 얘기를 다 듣던 천왕은 불쌍한 신장이 급고독 장자의 집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너는 먼저 수닷타 장자를 위해 좋은 일을 하도록 해라. 그런 다음 용서를 빌면 될 것이다.”

의아해진 신장이 되물었다.

“제가 무슨 방법으로 주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왕이 대답했다.

“수닷타 장자는 어느 때 1800만 냥의 황금을 어느 장사꾼에게 빌려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장사꾼은 아직 그것을 수닷타 장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그것을 네가 받아다가 돌려주어라. 그리고 수닷타 장자의 조상이 또 다른 1천 8백만 냥을 땅에 묻어 둔 일이 있었는데, 그 황금은 홍수에 떠내려가서 지금은 어느 브라흐만에게 가 있으며 또한 주인이 없는 재산으로 황금 1800만 냥이 바다 속에 있으니 네 신통력으로 그것들을 모두 찾아서 수닷타 장자의 창고에 가득 채워 놓도록 해라. 네가 그같이 해놓고 용서를 빌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신장은 이 일을 다 처리했고, 급고독 장자는 다시 억만장자가 되었다. 일이 끝난 후 문지기인 신장은 자기 주인에게 사건의 경과를 고했다. 깜짝 놀란 급고독 장자는 신장을 데리고 부처님께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설법하신 내용이 오늘의 경전 구절이다.

“악한 사람도 그 악의 과보인 고통을 오래 겪지 않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리고 착한 사람도 그 선의 과보인 행복을 오래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렇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과보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마느니라.”

‘법구경’에 나오는 얘기다. 오늘 읽은 게송은 없는 얘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급고독 장자가 받은 전생의 업보 때문에 부처님이 설법하셨음을 알 수 있다.

▲ 신사임당, ‘포도’, 비단에 먹, 31.5×21.7cm, 간송미술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그린 ‘포도’는 5만 원 권 화폐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와 포도그림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전칭작들이 대부분인데 ‘포도’는 그녀의 진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포도’는 포도송이를 근접 촬영하듯 가까이 다가가 보고 그린 작품이다. 포도는 모두 세 송이다. 화면 가운데 수직으로 걸려 있는 송이가 중심이고 위쪽에 걸린 두 송이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려 넣었다. 포도송이 앞에는 손바닥만한 오엽(五葉)의 포도잎을 그려 현장감을 살렸다. 신사임당은 포도 줄기와 잎사귀, 그리고 포도알갱이를 몰골법(沒骨法:윤곽선을 쓰지 않고 먹이나 채색만으로 형태를 그림)으로 그렸다. 손으로 만지면 탱글탱글한 포도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질 것 같다. 계절이 아직 덜 여물었는지 포도 색깔이 일정하지 않다. 먹 하나만으로 이렇게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같은 줄기에 달린 포도 알갱이라도 익는 속도는 전부 다르다. 보는 사람을 군침 돌게 하는 시커먼 알갱이에서부터 익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은 연두색 알갱이까지 제각각이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부모 밑에서 자랐어도 전부 다른 인생을 사는 형제간 같다.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포도는 서로의 익는 속도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은 포도는 연두색 포도 앞에서 우쭐대지 않는다. 연두색 포도는 검은 포도에게 돌맹이를 던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저절로 익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각각의 알갱이는 오직 자기만의 포도로 깊어지는 것에만 몰두해 있다.

빨리 익었다 하여 좋아할 일이 아니다. 늦게 익는다 하여 조바심 낼 일도 아니다. 제대로 온전히 익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업보가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다.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왜 지금 당장 벌을 받지 않느냐고 분개할 필요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이 지은 악업의 결과를 달게 받을 것이다. 착한 일 하는 사람이 왜 지금 당장 복을 받지 않느냐고 억울해 할 필요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이 지은 선업의 결과를 당연히 받을 것이다. 포도송이처럼. 인생의 모든 과정은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다. 선업선과(善業善果)에 악업악과(惡業惡果)다. 착한 행동은 착한 열매를, 악한 행동은 악한 열매를 맺는다. 착한 나무에 악한 열매가 열릴 수 없고 악한 나무에 착한 열매가 열릴 수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지 콩 심는데 팥 나는 이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착하게 살았는데 불행한 일을 만나면 그것은 전생의 결과다. 하늘이 무심해서 벌을 준 것이 아니다. 전생의 악업이 이제야 시절인연을 만나 열매를 맺어 떨어진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이유 없이 나를 도와주고 은혜를 베풀 때도 역시 전생의 업보다. 전생에 그는 나의 은혜를 입었을 것이다. 다만 한 생을 사는 우리 눈에는 삼생(三生)에 걸쳐 일어나는 업보의 진행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틀린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면 그는 다음 생에 내게 은혜를 갚을 것이다. 다음 생이 꼭 죽어서 가는 곳만 의미하겠는가. 내일도 다음 생이다.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된다. 어떤 형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들 모두 나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선한 사람을 보면 좋은 점을 따르고, 악한 사람을 보면 좋지 않은 점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53선지식 중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위대한 스승과 더불어, 의사, 도둑, 거지 등도 포함돼 있다. 그들 모두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들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사회의 악과 부조리를 눈감아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밖으로만 향하는 눈을 안으로 돌려보자는 얘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 실수를 통해 꼭 배워야 할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류시화가 엮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는 ‘상처 입은 가슴’이란 이름을 가진 인디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인디언들의 오랜 믿음이며, 나는 언제나 그 믿음에 따라 살아왔다. (중략)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한 계절에 한 번씩이라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본 적이 있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새겨보면 좋은 문장이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 걸까. 한탄하고 절망하는 대신 그 사건이 내게 가르쳐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깊어질 것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0호 / 2014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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