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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단개혁의 배경 - ② 불교의 정치예속화

선거 때마다 권력자와 결탁으로 불교자주화 훼손

▲ 1994년 종단개혁은 의현 스님 1인을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체질화된 불교의 정치예속화에서 벗어나 불교자주화의 실현이 목표였다. 1991년 1월31일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을 비롯해 불교주요종단 대표자들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근현대 한국사를 들여다보면 정치와 종교는 오랜 기간 공생의 관계였다. 정치는 표를 모으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고, 종교는 정치를 기득권 유지의 배경으로 활용했다. 정교유착은 적지 않은 곳에서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 때마다 종교계에 남발한 선심성 공약은 원칙과 형평성을 무너뜨려 사회갈등의 원인이 됐다. ‘단물’에 익숙해진 종교계도 점점 더 정치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종단개혁은 불교가 정치권력에 예속화된 것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은 선거 때마다 스스로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보로 종단 안팎의 공분을 샀다. 정치권과 결탁한 각종 비리의혹도 불교계에 대한 불신의 폭을 키웠다.

개혁종단 총무원장을 역임한 월주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동아일보 2011년 12월14일자)에서 “1980년대 들어 종단은 정치권과의 유착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며 “특히 상무대 이전 공사과정에서 정치자금이 의현 스님에게 전달된 사건이 불거지면서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의현 스님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 상임고문을 맡았던 지선 스님도 “(종단 집행부의 정치예속화로) 우리 종단은 자주성이 심각히 훼손된 상태였다”며 “여기에 일부 스님들의 사리사욕과 관련된 비리가 만연되면서 내부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법보신문 2009년 1월1일자) 개혁세력들이 ‘불교의 자주화’를 종단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정치예속화는 비단 의현 스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정치권력과의 유착은 한국불교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때론 호국불교를 왜곡해 군부독재정권을 옹호했다. 선거 때마다 중립성을 훼손하고 특정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정권으로부터 권력과 특혜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과 손잡은 의현 스님
선거 때마다 중립성 훼손
정권 도움으로 권력 유지
‘상무대 사건’으로 이어져

정교유착, 한국불교 고질병
일제강점기 사찰령서 비롯
정화 땐 이승만 도움 얻어

바른 정치를 이끄는 것은
종교에 부여된 역할이지만
선 넘을 땐 ‘자주화’ 요원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1년 6월 반포된 ‘사찰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시행한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사찰의 주지는 산중공의로 임명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임의로 30본산을 나누고 본사주지는 총독이, 말사주지는 지방장관이 임명하도록 했다. 이렇다보니 주지 소임자는 총독만 의식하게 됐고, 대중공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정치예속화의 불행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불교와 정치권력의 유착은 계속됐다. 총독에서 대통령으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1954년 5월 대통령 이승만의 유시로 촉발된 불교정화운동은 ‘전통불교 회복’ ‘왜색불교 척결’이라는 성과를 이뤘지만 불교가 정권에 예속되는 부작용도 낳았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비구승단이 기득권층이었던 취처승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의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광복 이후 한국 종교와 정치간의 관계’(노길명, 종교연구 27호)에 따르면 해방 당시 비구승은 200~300명에 불과한 반면 취처승은 7000여명에 달했다. 이렇다보니 비구 측은 힘이 부칠 때마다 경무대를 찾아 이승만에게 보다 강력한 지원을 요청했다. 불교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기독교 정권인 이승만 정부가 불교계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는 호재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위헌의 부담을 안으면서도 8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발표해 비구 측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공권력의 확고한 지원으로 승기를 잡은 비구 측은 반대로 이 대통령의 정권유지에 적극 나섰다. 1956년 비구승들은 다시 경무대를 찾아 이승만의 재출마를 호소했고, 3·15부정선거 때는 조계종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심지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했던 C스님은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4·19혁명 직후 검찰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불교와 정치권력의 유착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도 줄지 않았다. 5·16 직후부터 일방적으로 비구 측을 지원했던 박 정권은 1962년 사찰령을 폐지했다.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해 문공부의 허가를 통해서만 불교재산을 매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불교재산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취처승들의 재산권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재산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확대는 국가권력에 대한 불교계의 종속을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불교계는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보다는 철저한 지지 세력으로 고착화됐다. 대통령선거 때면 불교계는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정권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북괴만행규탄대회’ ‘국태민안 구국기도법회’ ‘불교도호국법회’ 등을 잇따라 개최해 군사정권 체제를 철저히 옹호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호국불교의 재검토’(김순석, 대각사상 17집)에 따르면 유명 포교사들은 전국을 돌며 안보강연회를 열고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조계종 총무원도 기관지 ‘대한불교’를 통해 ‘완수하자 유신과업’ 등의 유신구호를 싣고, 사설기사 등을 통해 유신헌법을 홍보함으로써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이 심화될수록 불교계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의현 스님조차도 총무원장 취임 초기에는 정치권력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불교의 자주화를 부르짖기도 했다. 1986년 불교신문(11월19일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종교인들이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을 하면 나라의 안녕에 도움이 안 된다”며 “정치인도 사대주의 근성에 젖어 종교인들의 힘을 빌려 정치를 하려는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소신’은 얼마 가지 못했다. 힘 있는 문중출신도 아니고, 정치적인 지지 세력도 공고하지 못했던 의현 스님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과의 친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 보도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1986~1993년 재임기간 동안 총 17회에 걸쳐 청와대나 호텔 등에서 대통령과 여권 대표 등을 만나 친정부적 발언을 쏟아냈다. 특히 의현 스님은 사회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절정에 달한 1987년 모든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에 대해 ‘고뇌에 찬 충정의 구국의지’라고 추켜세웠다.(월주 스님, 동아일보 2011년 12월14일자) 같은 해 5월2일 신라호텔에서 ‘나라와 국가원수를 위한 기원법회’를 열었고, 6월26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전두환을 만나 “난국 수습을 위한 영도력을 발휘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현 스님의 친정부 행보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더욱 노골화됐다. 민정당 대선 후보로 노태우가 확정되자 7월21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교인 모임’을 열어 ‘불자후보론’을 내세웠다. 또 9월7일 서울 올림피아호텔에서 노태우와 만나 “6·29민주선언 이후 대다수 국민이 깊은 신뢰와 폭넓은 지지를 보이고 있다”며 “불교도들이 중심이 돼 나라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해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하며 선거지원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대선 열기가 절정에 달하자 그는 전국 사찰에 공문을 발송해 ‘12월1~15일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국가안정을 위한 기원법회를 열 것’을 지시했다. 국민화합과 국가 안정을 기원한다는 취지였지만 법회 때마다 여권관계자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노태우 후보 선거용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그럼에도 의현 스님은 법회 때마다 ‘불자후보론’을 내세우며 불자들에게 노 후보를 적극 지원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불교계의 노골적인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불교계에 대한 지원으로 화답했다. 숙원이었던 불교방송 개국을 승인했고, 각종 현안 해결을 약속했다. 훗날 상무대 사건으로 비화된 대구 동화사 대불 불사시주금도 이 과정에서 불거졌다. 1992년 대선에서도 의현 스님의 ‘정치권 줄대기’는 이어졌다.

의현 스님은 처음 정주영 후보를 밀다가 다시 김영삼 후보 쪽으로 돌아섰다. 법보신문 보도(1992년 12월7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11월30일 3당 후보가 모두 참석한 동화사 대불 점안식에서 “팔공산에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 생겼다”며 “민자당 김영삼 총재가 어떤 감화를 받으셨는지 처음으로 합장을 하셨다”고 말했다. 이는 개신교 장로인 김영삼 후보에 대한 불자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돼 당시 언론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장이 선거 때마다 스스로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자 종단 안팎에서 거센 비판이 일었다. 여기에 1994년 1월 상무대 비리 연루 사건이 불거지면서 ‘불교자주화’를 기치로 내건 개혁세력에 의해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종단개혁은 의현 스님 1인을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체질화된 불교의 정치예속화에서 벗어나 불교 자주화의 실현이 목표였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 퇴진 이후 새롭게 출범한 종단 새 집행부도 정부 권력과 분명한 선긋기를 이뤄내지 못했다. 개혁세력에서조차 자조적인 반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 불교자주화 실현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문화재관람료 등 상당부분 정부 예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종단 재정구조로 인해 여전히 ‘정치권 눈치보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물론 정치인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돕는 것은 종교인의 의무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선을 넘어 ‘정치적 거래’로 이어진다면 불교자주화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1호 / 2014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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