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종단개혁의 배경 - ③ 불투명한 재정

시줏돈 흐름 모르는 폐쇄적 구조가 비리 양산

▲ 의현 스님이 연루된 상무대 비리 사건은 투명하지 못한 사찰 재정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사진은 상무대 사건에 대한 교계 진상조사 촉구 활동을 보도한 1994년 3월28일자 법보신문.

“그동안 총무원장 1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삼보정재가 운영돼 왔다. 종단이 불안정할 때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종단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각 사찰의 주관적인 조건과 판단에 따라 정재를 처분해 왔다. 이런 악습을 바로잡고 삼보정재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법제로서 그 전기를 마련하였다.”(조계종 개혁회의, ‘종단개혁불사 백서’)

1994년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개혁세력들이 우선적으로 추진한 과제는 사찰재정 공개였다. 정치예속화와 함께 불투명한 재정 관리는 종단이 풀어야 할 오랜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종단개혁 이전까지 사찰 재정은 주지를 비롯해 몇몇 소임자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사찰에 얼마의 돈이 들어와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폐쇄적인 구조는 늘 비리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의현 스님을 궁지로 몰아넣은 상무대 비리사건도 투명하지 못한 사찰 재정구조가 원인이 됐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 이후 과도집행부인 조계종 개혁회의가 ‘사찰재정 공개운영’을 개혁종단 종헌에 명시하고 총무원 감사국 설치와 사찰운영위원회를 제도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투명한 사찰재정 문제는 1911년 6월 일제의 사찰령 공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까지 사찰재정은 철저히 산중공의 방식으로 운영됐다. ‘조계종의 종무권한 이동에 관한 연구’(조기룡, 정토학연구 4집)에 따르면 사찰령 시행 이전까지 사전(寺田)의 처분은 사찰 건물이 화재를 입었을 때와 산중 승려의 합의에 따른 것 이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사찰령을 공포하면서 사찰주지에게 일체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대중이 관리하던 사찰재산을 주지 1인이 독단적으로 운영하면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생겨났다. 일제의 한일강제병합 이후 급격히 늘어난 취처승들의 사찰 주지 취임도 재정 투명화의 걸림돌이 됐다. 삼보정재가 주지의 호주머니에 들어가거나 자신의 기득권 연장을 위한 로비자금으로 이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2~27년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보도에 따르면 봉은사를 비롯해 마곡사, 전등사, 직지사, 위봉사, 유점사, 월정사, 보현사, 패엽사, 석왕사, 동화사, 은해사, 해인사, 통도사, 귀주사 등 31본산 대부분이 주지들의 재산전횡으로 몸살을 앓았다. 불교계 내부에서 자정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이 즈음이다.

‘백용성 스님과 일제하의 사찰재산·사찰령’(김광식, 대각사상 제4집)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에 자극받은 청년승려들을 중심으로 불교개혁의 강한 움직임이 전개됐다. 불교청년운동의 핵심 별동대로 불렸던 조선불교유신회가 ‘사유재산 정리’를 강령으로 제정한 것도 당시 주지들의 재산전횡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중반부터 전국의 사찰에서는 주지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확산됐다.

그러나 주지들의 전횡 문제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1920년대 후반부터 사찰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무가 불교계의 목줄을 죄어왔다. 상당수 주지들이 사찰에 들어오는 현금을 손대는 수준을 넘어 토지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려 사실상 부도 위기까지 몰린 것이다. 당시 총독부가 전국 사찰의 부채규모를 파악한 결과에 따르면 무려 60만원에 달했다. 대부분 주지 개인의 사리사욕이 원인이 됐다.

벽옹 스님은 “조선불교의 총 채무액이 60만원을 넘게 발생하는 동안 사원을 중수하였는가, 교육·포교·자선을 남만큼 했는가. 무엇을 하였기에 본산이나 말사가 모조리 채무자가 되었느냐. 이것은 소위 주지된 사람의 사욕과 이권에서 모든 폐해가 발생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불교 33호, 1927년 3월)

해방 이후에도 사찰 주지들의 재산 전횡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사찰의 돈과 관련된 이권문제가 종단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많은 재원이 나오는 사찰을 차지하는 것이 곧 종단 내 막강한 영향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는 갈등과 반목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조계종 내부에서 발생한 종권다툼의 상당수가 이권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권과 결탁한 의현스님
선거 때 10억 후원금 제공
주지임명 대가로 뇌물 받아

재정비리는 사찰령서 비롯
주지 독단으로 재산 운영
상당수 사찰 채무로 ‘허덕’

개혁 첫 과제는 공개 재정
사찰운영위·감사제도 도입
제도 만들었지만 유명무실
재정투명화 여전히 개혁과제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김경호, 불교평론 2호)에 따르면 1962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퇴진할 때까지 조계종은 끊임없는 종권다툼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이권문제가 원인이었다. 1963년 흥천사 점유권을 두고 발생한 비구와 취처승간의 갈등을 비롯해 1968년 봉은사 임야 불법매각 사건, 불국사 공금 유용사건, 1969년 보현사 주지 쟁탈사건, 1970년 증심사 분규, 1971년 관악산 염불암 불법 매각 사건 등 이권을 둔 크고 작은 분쟁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1971년 동화사의 한 스님이 종단 부패에 항의해 독사가 담긴 소포를 총무원에 발송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6년 총무원장에 취임한 의현 스님은 종단 혼란을 틈타 장기집권의 수순을 밟았다. 총무원장 중심제로 제도를 바꾸고, 밖으로는 정치권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의현 스님은 정치권으로부터 종권을 보장받는 대신 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월간 ‘말’(‘서의현의 정치권 커넥션’, 1994년 5월호)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여야 의원 40~50명에게 최하 1000만원에서 3000만원까지 지원해 총 10억원에 가까운 돈을 투자했다. 그는 정치자금을 제공할 때도 반드시 수표를 주고 일련번호를 복사해 두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당시 불자 국회의원 모임인 정각회 회원들이 의현 스님을 두고 “호락호락 하지 않다” “준만큼 가져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막대한 정치자금은 자신에게 부여된 각종 인사권을 담보로 거둬들였다. 의현 스님은 주지 발령과 종회의원 간선직을 대가로 한 번에 수백 만 원을 받았다. 1994년 4월4일 동화사 재정국장을 역임했던 선봉 스님의 양심선언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1986년 총무원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주지 임명, 종회의원 간선, 불사법회, 생일 등에 맞춰 연간 3~4차례 전국의 주지들로부터 각각 200~300만원씩 상납 받았다. 돈은 개별적으로 현금으로 받아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 불응할 경우 주지에서 해임시키기 위해 임명과 동시에 사표를 미리 받아 두기도 했다. 의현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 동화사와 은해사, 선본사, 보문사 등 재원이 많은 사찰의 돈까지 쥐락펴락했다. 1994년 종단개혁세력들이 의현 스님을 몰아내자마자 이들 사찰에 대해 사고 사찰로 지정하고 직영 관리한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의현 스님의 전횡이 커질수록 종단 내부의 반발은 커져갔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 등 사회민주화 주도 세력들의 종단 참여와 개혁 요구 확산은 의현 스님의 종단 내 입지를 좁혔다. 그러자 의현 스님은 1993년 7월1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찰재산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 25개 교구본사를 비롯해 1800여개의 모든 사찰의 공공재산을 등록받아 실사를 거쳐 대내외에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단 기관지 불교신문은 “사찰재산 공개는 교세신장과 개혁행보를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1993년 7월21일자)

그러나 사찰재산공개 조치는 오히려 종단 내부의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실천승가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재산공개 선언은 정부의 왜곡된 개혁명분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더불어 총무원장의 개인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반박했다.(법보신문, 1994년 7월26일자)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이미 사찰의 재산등록이 명시돼 있음에도 느닷없이 사찰재산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수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찰 예결산보고를 의무화하고 총무원의 행정감사권 등을 통해 사찰재정투명화를 이루는 것이 개혁의 선결과제라는 지적이었다.

의현 스님의 사찰재산 공개 방침은 중앙종회에서도 제동이 걸렸다. 중앙종회 109차 임시회(1993년 7월28~29일) 회의록에 따르면 종회의원들은 의현 스님의 재산공개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정대 스님은 “(사찰재산은) 어떻게 보면 선사 때부터 죽기 살기로 지켜온 것인데 지금 국민들에게 환경오염 안 된 놀이터라도 만들어 준 공로도 없이 스님들이 막대한 유휴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사회여론화 될 때 이걸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1월 정대철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상무대 비리 의혹 사건은 막강했던 의현 스님으로서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이후 개혁세력들은 사찰재정 투명화에 개혁의 초점을 맞췄다. 주지와 신도들이 참여하는 사찰운영위원회를 의무화했으며, 총무원에 감사국을 설치했다. 중앙종회에도 감사권를 부여해 사찰 재정현황에 대한 정기적인 감사를 진행했다. 여기에 조계사·선본사·보문사 등을 직영사찰로 지정했다. 봉은사·도선사·낙산사·보리암·내장사·석굴암 등은 특별분담금 사찰로 지정해 종단 재정의 안정을 기했다. 이로 인해 1994년 이전까지 20여억원대에 불과하던 총무원 예산이 1995년 75억원, 1996년 89억원, 1997년 110억원으로 급증했다.

영담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을 거치면서 중앙종무기관의 예산규모는 이전의 예산규모에 비해 급상승 한다”며 “이는 단순히 재정규모의 양적인 팽창이 아닌 종단 운영의 패러다임이 질적으로 전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조계종 종무행정체제와 예결산 관리에 관한 고찰’, 동국대대학원연구논집 vol.32)

물론 19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사찰재정의 투명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한 것은 큰 성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제도를 뒷받침할 인적 쇄신이 동반되지 못한 탓에 재정투명화는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사찰운영위원회는 유명무실하고, 여전히 몇몇 사찰 주지 스님들의 개인재산 문제는 사회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재정투명화는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