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경윤 ‘탄금도’
6. 이경윤 ‘탄금도’
  • 조정육
  • 승인 2014.02.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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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면 끊기고 느슨하면 탁하니 수행 또한 거문고와 마찬가지라”

“조율을 알맞게 해야 음을 낼 수 있는 거문고처럼 수행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지나치게 몸을 핍박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수행자는 극단에 떨어지지 말고 중도를 취해야 한다.” -잡아함 9권, 254 이십억이경

깨달음 포기한 이십억이에게
중도 의미 깨우치는 부처님
거문고 타는 탄금도 속 선비
번잡함 잊고 수수한 멋 즐겨

▲ 이경윤, ‘탄금도’, 비단에 먹, 31.1×24.8cm, 고려대학교 박물관.

헬스클럽에 다닌 지 두 해가 지났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기 운동 밖에 할 줄 몰랐던 내가 작정하고 진짜 운동을 시작한 건 큰 수술 후 건강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계기는 건강이었지만 특별히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다. 살을 몇 킬로그램 빼야 된다거나 몸짱을 만들어야 하는 압박감도 없다. 그마저도 안다니면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대문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등록했다. 부담이 없으니 동네 마실 다니듯 슬렁슬렁 다닌다. 감당하지 못할 목표를 설정해놓고 슬프게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다. 태어나서 처음 다니는 헬스클럽인데 중간에 그만 두지 않고 2년을 버틴 비결이 자신을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데 있는 것 같다.

두 해를 다니다보니 평범한 동네 헬스클럽인데도 어떤 리듬을 읽을 수 있다. 새 해가 되면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 해도 그렇다. 새 해의 결심 중에 운동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심을 한 것은 좋은데 내년 이맘때까지 계속 나올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다. 결심이 삼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큰마음 먹고 세운 계획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에는 의지박약을 탓할 수 있다. 문제는 전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온몸을 다 바쳐 전투적으로 일에 매진했는데도 별 소득이 없을 때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십억이의 경우가 딱 좋은 예다.  

비구 이십억이는 발에서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고행했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세속에서 유명한 가문의 아들이고, 재산도 넉넉히 갖추고 있으니 집으로 다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복 짓는 일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그는 출가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십억이의 마음을 알고 말씀하셨다.

“이십억이야. 그대는 출가하기 전에 거문고를 대단히 잘 탔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네 그렇습니다. 부처님.”
“이십억이야. 거문고 줄을 팽팽히 조이면 소리가 잘 나더냐?”
“아닙니다.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아닙니다.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이십억이야. 조율을 알맞게 해야 음을 낼 수 있는 거문고처럼 수행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지나치게 몸을 핍박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수행자는 극단에 떨어지지 말고 중도를 취해야 한다.” 

보름달이 떴다. 한 선비가 언덕에 앉아 거문고를 탄다. 선비 머리 위로는 시커먼 절벽이 대각선으로 솟아 있다. 무너질 듯 배치된 절벽이 쏟아질 듯 불안하다. 바위 표면에 칠해진 흰색과 검은색의 먹의 농담 차이로 인해 바위의 날카로운 질감이 더욱 실감난다. 멋있는 절벽을 그려 넣어 풍광 좋은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데 무게중심이 너무 심하게 오른쪽으로 기운다. 균형이 필요하다. 차 끓이는 동자의 등 뒤로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은 바위를 그려 넣은 이유다. 두 개의 암벽이 마련한 공간 속에 선비가 무심하게 앉아 있다. 달빛에 취해 거문고를 타는 선비의 눈에는 만상이 고요하다. 이경윤(李慶胤:1545-1611)은 ‘탄금도(彈琴圖)’에서 초탈한 선비의 풍류를 절파화풍(浙派畵風)으로 구현했다. 절파화풍은 명(明)나라 초기에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대진(戴進)이 당시까지 내려오던 여러 화풍을 융합해서 창안한 궁정화풍이다. 화면을 대각선이나 수직으로 나누어 비대칭의 균형을 보이는 구도가 특징이다.

선비의 고아한 아취를 담은 ‘탄금도(彈琴圖)’는 전체가 10폭으로 구성된 화첩 속에 들어 있다. 10폭은 낚시, 음주, 탄금, 바둑, 탐매, 초옥, 관폭, 관안(觀雁), 취적, 탁족 등으로 초옥을 제외하고는 모두 선비의 은일과 풍류가 주제다. 그림 속 주인공은 역사 속에서 이름이 알려진 문인이거나 은자들이다. 소부(巢父), 도잠(陶潛), 왕희지(王羲之), 죽림칠현(竹林七賢), 이백(李白), 소식(蘇軾) 등이 유명하다. 때로 이들의 이름에 의지해 강호(江湖)에서 노닐고자 하는 선비자신의 이상을 표현할 때도 많다. 선비가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는 ‘탄금’은 당나라 때의 시인 왕유(王維:701-762)의 시 ‘죽리관에서(竹里館)’가 절창이다. ‘홀로 대숲 속에 앉아 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 부니’로 시작되는 왕유의 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죽리탄금도(竹裡彈琴圖)’라는 선면화(扇面畵)로 멋들어지게 형상화했다. ‘탄금’은 또한 지음(知音)으로 알려진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가 알려져 있다.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는 그 소리가 ‘태산 같다’고 감탄했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는 ‘강하(江河)와 같다’고 칭찬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열자’의 ‘탕문편’에 실려 있는 얘기다.

‘탄금’은 잘 살고 귀하게 되는 것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 아니다. 홀로 즐기는(獨樂) 자족에서 얻어진다. ‘독락’은 선비가 산길을 걷다 도토리를 발견했을 때의 소박함만큼이나 자잘하다. ‘거친 밥을 먹고 차가운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그것을 베개로 삼아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다’고 한 공자의 가르침처럼 수수하다. 수수하고 자족하는 즐거움인 만큼 남에게 뺏길 염려가 없다. 중국 청대의 여류 시인 시정의(柴靜儀)는 아들에게 준 교훈시에서 예로부터 어진 선비(哲士)는 ‘글 읽고 거문고 타며 스스로 즐겨야 한다(讀書彈琴聊自娛)’고 당부했다. ‘독락’이 ‘철사’의 기본일 때 인생의 부침을 견뎌낼 수 있음이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에서 ‘겨를이 있는 날이면 탄금과 독서로 즐겼고, 다만 스스로 차(茶)가 끓고 향기가 맑은 것을 기뻐하였으며, 높은 벼슬 보기를 뜬구름같이 여겼으니, 또한 어찌 밤이 다하여 새벽종이 울리는 것을 근심하랴’라고 노래했다. ‘탄금’은 선비가 홀로 고요하게 앉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임과 동시에 마음을 닦는 수양법이다. 거문고를 탈 때 굳이 ‘고요하게 앉거나(靜坐)’ ‘홀로 앉는(獨坐)’ 조건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경윤은 자가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낙촌(駱村)·학록(鶴麓)이다. 성종의 아들인 이관(李慣)의 종증손으로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져 이 작호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의 아우 죽림수(竹林守) 이영윤(李英胤)과 세 아들도 모두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 특히 서자인 허주(虛舟) 이징(李澄)은 허균(許筠)이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고 추켜세울 정도로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명화는 ‘종영(宗英:임금의 친척)’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뛰어난 종실화가들이 많은데 이경윤과 이영윤 외에도 강아지를 잘 그린 이암(李巖), 대나무에 뛰어난 이정(李霆) 등이 모두 종실화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이경윤의 그림을 ‘품격이 고상하고 깔끔하다’고 평했다.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에서 이경윤의 그림을 ‘고담(枯淡)한 중에도 정취가 있고 고고(高古)한 중에도 고운 자태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탄금도’에서는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속 선비가 여유롭게 거문고를 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거문고를 잘 타야 된다거나 명곡을 연주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없다. 오로지 탈 뿐이다. 편안하게 탈 뿐이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조이고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지금은 이윽히 거문고를 탄다. 오늘밤 선비의 가슴을 적신 달빛은 그가 다시 세상에 나가 포악한 감정이 일어날 때 윤슬이 되어 적셔줄 것이다.

공자(孔子)도 부처님의 거문고 가르침과 비슷한 얘기를 하셨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세밑에 지내는 제사를 보고 있었다. 제사라지만 축제 분위기가 더 강했다. 공자가 자공에게 “보고 있으니 즐거우냐?”라고 물었다. 자공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이 즐거워하는데, 저는 그것이 왜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가 자공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백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 즐기는 것을 너는 이해하지 못하느냐? 당기기만 하고 느슨히 풀지 않는 것은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도 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느슨히 하기만 하고 팽팽하게 당기지 않는 것도 문왕과 무왕이 모두 하지 않은 것이다. 한 번 당기면 한 번 느슨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왕과 무왕이 천하를 다스린 도리일 것이다.” ‘공자가어’의 ‘관향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는 자하(子夏)가 거부(莒父)의 읍재가 되어 떠날 때도 ‘빨리 하려 들면 도달하지 못한다’고 가르치셨다. 수행이든 삶이든 조이고 푸는 것을 잘해야 한다. 너무 조이지도 말고 풀지도 말고 알맞게.

새 해가 되고 한 달이 지났다. 헬스클럽에는 벌써부터 안 보이는 얼굴들이 생겼다. 그러나 포기 좀 하면 어떤가. 다음에 또 하면 되지. 한번 결심하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끝까지 가는 완벽주의자는 멋있다. 단 며칠 만에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을 못 이겨 결심을 깨뜨리는 사람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된다. 그렇게 저렇게 부족한 자신을 용서하고 또 일어선 사람은 남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다. 넘어져본 사람은 몰인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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