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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강화도 고려산 적석사

기자명 김택근

구국 원력 서린 대장경판 품었던 연꽃잎 닮은 도량

▲ 고구려 장수왕4년 천축국에서 온 스님이 다섯 개의 연꽃잎을 던져 그 가운데 붉은 연잎이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적석사. 1600년 역사를 이어오며 부침도 많이 겪었지만 날마다 서해의 지는 해에 삿됨과 속됨을 버리는 적석사는 언제나 청정한 도량이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섬 전체가 유적이다. 어디를 가도 이야기가 묻혀있다. 역사 속의 강화도는 유배지이거나 쫓기는 무리의 은거지였다. 나라가 융성할 때는 숨어 있다가 누란의 위기를 맞으면 솟아올랐다. 강화도로 건너온 사람들은 외롭고 아팠다. 그래서 산마다에 많은 사찰이 세워졌고, 절마다에는 그들의 비원이 서려있다. 강화도엔 국운 따라 부침을 거듭했던 천년 고찰이 밀집해 있다. 내년이면 창건 1600년을 맞는 적석사(주지 선암스님)를 찾아갔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절로 가는 외길이 나타났다. 산등성이마다 잔설이 희다. 산길은 몇 번을 굽이치며 산 위로 가파르게 뻗어있다. 길 문득 끊긴 곳에 적석사는 예쁘게 앉아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년 동안 적석사의 흥망을 지켜보고 있다. 하나는 임신한 아낙을, 또 한 그루는 남정네를 닮아서 부부목(夫婦木)이라 이름 붙였다. 부부목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세속적이긴 해도 인상적이다.

▲ 적석사 마당의 느티나무 ‘부부목’. 암느티나무는 아이를 밴 모습이다.

‘그들은 함께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한 곳을 바라보는 자다. 그대 곁에 나여서 한없이 미안하고, 내 곁에 당신이어서 한없이 고마워하며…….’

마당 끝에 서서 담벼락 너머 아래를 굽어보니 절경이다. 마을, 호수, 바다, 산봉우리, 길, 논밭을 한 눈으로 잡아당길 수 있었다. 적석사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특히 아름다워 강화 8경중 으뜸으로 꼽는다고 한다.

창건설화는 적석사만의 것이 아니다. 인근에 새워졌던 고려산 다섯 절이 모두 같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까지 연이어 한강 일대를 차지했다. 장수왕 4년(416년) 천축국(인도)에서 온 승려가 강화도로 건너와 절터를 찾았다. 어느 날 염불을 외다 잠이 들자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산 정상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그 말대로 산 정상에 오르니 산 위에 연못이 있었고, 그 속에는 다섯 빛깔의 연꽃이 피어있었다. 천축국 고승은 각기 다른 다섯 빛깔의 연꽃잎을 날려 보냈다. 그리고 연꽃잎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그렇게 꽃잎 색깔 따라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 황련사, 흑련사가 탄생했다. 이 다섯 절이 있어 산 이름을 오련산이라 불렀다.

붉은 연꽃잎이 떨어진 적련사(赤蓮寺)는 이후에 적석사로 바뀌었다. 오련산에 불이 자주 나서 불을 연상시키는 적(赤)자를 지우고 적석사(積石寺)로 바꿔 불렀다. 또 오련산이 고려산으로 바뀐 것은 고려 고종 19년(1232)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이다. 몽골은 무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고려에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왔다. 고려는 강화도에 고려의 모든 것을 옮겨왔다. 궁궐도 개경식대로 짓고, 궁궐 뒷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다.

몽골병력이 들어올 수 없는 강화도는 겉으로는 평온했다. 하지만 몽골군이 침입할 때마다 고려 국토는 짓밟혔다. 무고한 백성들만 죽어나갔다. 그러면서도 무신정권은 쫓겨 간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팔관회를 열었다. 팔만대장경을 주조하여 불력으로 적들을 물리치려 했다. 백성을 팽개치고 섬에 도망 나온 권력이 저지른 한심한 작태였다. 어찌 불력이 그때 그 나라 고려에 내릴 것인가.

결국 몽골 용골대에 항복하고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천도했다. 몽골은 강화 조건으로 강화도에 남아있는 고려의 모든 것을 없애라고 했다. 39년간의 저항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산성과 궁궐을 부수며 흔적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산 이름 ‘고려’만은 어쩔 수 없었다.

조선 숙종40년(1714)에 세워진 적석사사적비를 보면 몽골 침입 때 적석사는 임금의 거처였다고 한다. 강화도의 임금은 곤룡포만 걸쳤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섬 밖에는 적들의 창검이 번득였고, 섬 안은 무신들이 칼날이 날카로웠다. 임금은 적석사 앞바다에 떨어지는 해를 보며 눈물지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충렬왕 8년(1282) 왕과 공주가 적석사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개경으로 옮겨간 12년 후 왕이 왜 적석사를 찾았을까. 아마도 강화도에서 선대왕들의 흔적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사적비와 구한말에 제작된 ‘전등본말사지’ 및 ‘강도지’를 보면 장경도감이 설치 된 선원사에서 판각된 장경판을 적석사에 옮겨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적석사 소유의 전답이 강화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사세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도 당대의 명필을 동원하여 관에서 사적비를 세웠다.

적석사는 조선왕조 말기에 사세가 위축되었다. 1911년경 당시 육군참령이었던 강화 진위대장 이동휘가 미국선교사인 벙커, 목사인 박용일과 담합하여 육영학교(보창학교 전신)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적석사 재산을 몰수해갔다. 보창학교는 보광, 보성과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로 일컬어진다. 이동휘는 일본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젊은이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석사의 재산이 민족 자강을 위해 쓰였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사찰과 승려들이 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당시 불교가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스스로 법당을 훼철하여 팔아먹는 승려까지 생겨났으니 못나고 볼품이 없었다. 그렇게 적석사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장수왕 4년 천축서 온 스님이
연잎 날려 떨어진 다섯 곳에
사찰 창건해 산 이름 ‘오련’
화재 잦아 ‘적석사’로 개명
몽골 침략  강화 천도 시기엔
왕이 찾아 마음 달랜 의지처

1997년 선암 스님 주지 부임
폐사지 다름 없던 사찰 복원
하룻밤 700mm 수해 후에도
진입로·축대 새로 쌓고 복원
‘적석사사적비’ 지방문화재로
낙조대 일몰 강화 8경 중 으뜸

1997년 10월 선암 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고려산은 고왔다. 그러나 막상 적석사에 들어서자 그 초라한 모습에 기가 막혔다. 비승비속 대처승이 머물다 떠난 경내는 폐사지와 다름없었다. 땅은 질퍽거렸고 짐승 뼈가 굴러다녔다.

‘얼마나 복이 없으면 이런 도량에 주지로 왔단 말인가. 참으로 나의 전생이 초라하구나.’

법당 문을 여니 쥐가 부처님 몸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갔다. 부처님은 어떻게 그을렸는지 몰라도 온통 검었다. 항아리에 담겨있던 쌀도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부임 후 처음 한 일이 쥐구멍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내에 쌓인 쓰레기를 치웠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단 하나 위안거리는 적석사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의 빼어남이었다.

‘천 년 묵은 쓰레기’를 치우고 이듬해 4월 취임 법회를 열었다. 비가 사납게 오는 봄날임에도 300여명이 참석했다. 50명이 넘는 스님들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왔다. 그런데 모두 절보다는 절 아래 펼쳐진 풍광을 칭송했다. 그날 경내의 우물이 터졌다. 옛 문헌은 ‘적석사 경내에는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차고 달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적석사 우물 색깔이 변하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난다고도 했다. 이렇듯 상서로운 우물물이 다시 나왔으니 부처의 가피 아닌가. 절식구들은 우물을 감로정(甘露井)이라 이름 붙였다. 감로정은 2002년 6월29일 물색깔이 변했다고 한다. 그날 서해에서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 나라에 변고가 생기기 전이면 물색이 변한다는 경내의 우물 ‘감로정’.

1998년 여름 대홍수가 사찰을 덮쳤다. 그 옛날에는 산불이 전각을 태웠지만 이번에는 물폭탄이었다. 창건 이후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적석사가 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확히 8월5일 하룻밤에 700mm가 쏟아졌다. 고려산 곳곳에 산사태가 났고, 빗물과 함께 토사가 적석사를 덮쳤다. 대웅전 절반이 쓸려갔고, 향로전과 요사채는 매몰되어 보이지 않았다. 진입로 또한 유실되어 버렸다. 인명 피해가 없는 것이 기이할 정도였다.

‘적석사는 없어져야 하는 절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인가.’

선암 스님은 폐허가 되어버린 적석사 경내에서 산 아래를 굽어봤다. 문득 1600년 사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다시 불법을 일으키라는 계시 같았다. 신도들도 끊긴 길을 더듬거리며 올라와 천막을 쳤다. 그날 철야기도는 어느 때보다 간절해졌다.

‘적석사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 일을 내가 해야 할 것이다. 옛것은 모두 씻겨 내려갔으니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다.’

먼저 진입로를 닦았다. 축대를 새로 쌓았다. 가건물을 지어 부처를 모셨다. 그리고 그 가건물을 다시 부수고 전각을 짓는 불사가 이어졌다. 대웅전, 범종루, 향로전, 수선당, 부용당, 삼성각, 불유각 등을 세웠다. 한 해도 쉬지 않고 13년 동안 불사를 계속했다. 2002년에는 적석사사적비가 지방유형문화재 38호로 지정 등록되었으며 그해 관음굴을 신축, 사십이수관세음보살상을 봉안했다.

▲ 동해의 정동진과 마주보고 있는 정서진에 조성된 낙조대의 관세음보살상.

선암 스님은 낙조대에 올라 주변을 살필 때마다 왜 적석사가 명당인지 알 수 있었다. 낙조대는 정동진과 일직선에 위치한 정서진이다. 또 낙조대를 여덟 개 산이 둘러싸고 있다. 마니, 진강, 혈구, 고려, 봉천, 별입, 화개, 혜명산이 바로 그것이다. 연화 8엽에 둘러싸였으니 부처님을 모셔야 했다. 낙조대에 야외법당을 조성하고 해수관음보살상을 모셨다. 해수관음보살상은 날마다 지는 해를 지켜보고 계신다.

지는 해가 품은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날마다 적석사는 노을을 부르고, 그 노을은 적석사를 끌고 간다. 삿됨과 속됨을 버리는 적석사의 노을 시간.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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