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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작자미상, ‘내외선온도-사궤장 연회도첩’

기자명 조정육

원한이 불길처럼 타오르기 전에 자애로움의 비를 뿌려라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때 원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은 자애에 의해서만 사라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

왕이 대신에게 베푸는 잔치서
처용무 추는 다섯 무용수들
자애로 원수를 변화시킨 처용
용서에 대한 영원한 진리 남겨

▲ 작자미상, ‘내외선온도’, 1668년, 비단에 색, 55.5×74cm, 경기도박물관, 보물 제930호.

가장 힘들 때가 언제일까. 화날 때다. 화는 내 욕심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피해를 입었을 때도 화가 난다. 평소에 나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을 때는 더욱 화가 난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까지 더해 참을 수가 없다. 미움이 생기고 분노가 일어나면 그 불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마음을 태우고 몸을 태우고 주변을 전부 태운 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까지 분노의 불길은 맹렬하다. 끝장을 보는 것이 분노다. 복수심으로 가득 찬 분노는 원한의 상대가 처절하게 무너져야 막을 내린다. 동서고금을 통해 앞집과 옆집과 윗집과 아랫집에서 여전히 복수극이 난무하는 이유다.

어느 대갓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풍악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얼굴에 탈을 쓴 무용수들이 등장해 화려한 춤사위를 드러낸다. 웃음소리와 대화소리가 가득했던 연회장에 악기소리와 춤동작만이 살아 있다. 오늘의 경사를 하늘도 축복한 듯 상서로운 구름이 연회장 둘레를 휘감았다. 신선이 사는 선경(仙境)인가. 앞산과 뒷산에 칠한 청록진채(靑綠眞彩)가 평범한 연회장을 신령스럽고 유서 깊은 장소로 바꿔놓았다. 예사 잔치가 아닌 듯하다.     

1668년(현종9) 11월, 현종(顯宗)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이경석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64세에 기로소(耆老所:나이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9년 후인 73세에 궤장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는 원로대신에게 의자(几)와 지팡이(杖) 그리고 가마 등을 내려주던 풍습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벼슬에 올라도 70세까지 장수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해 원로대신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려는 뜻에서 임금이 물품을 내린 것이다. 현종은 의자 1점과 지팡이 4점을 내리고 이를 기념해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에 담겨 있다. ‘사궤장연회도첩’은 사궤장교서(敎書)와 좌목(座目:목록), 참석자들의 시, 친지들이 보낸 축시(祝詩) 등을 적고 행사진행과정을 3장면으로 그렸다. 그림은 왕이 보낸 교서와 궤장을 든 일행을 이경석의 집에서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 주서(注書)가 왕의 교서를 낭독하고 궤장을 전달하는 모습을 그린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도승지가 어사주(御賜酒)를 올리고 연회가 베풀어지는 장면을 그린 ‘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내외선온도’에는 오늘 행사의 압권이 담겨 있다. 딱딱한 공식 일정으로 구성된 1부 순서가 끝나고 음악과 춤이 베풀어지는 2부 순서에 해당되는 연회 장면이다. 연회장면이지만 이미 끝난 1부 행사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차일이다. 흰색 천에 쪽빛 가선을 덧대어 박은 차일은 행사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품이다. 차일은 햇볕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도 쓰였지만 신분과 계급에 따라 그 명칭과 규모가 다르다. 차일 밑에는 왕에게 하사받은 궤장과 교서함이 올려 진 탁자 그리고 왕이 내린 술동이(宣醞)를 올린 상이 놓여 있다.

궤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이식 의자다. 언제든지 휴대하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의자다. 어딜 가든 쉬이 피로감을 느끼는 노인의 사정을 감안한 의자다. 의도는 그러하나 왕이 하사한 의자에 직접 앉은 신하는 없었을 것이다. 가문의 보배로 간직했으리라. 300년이 훨씬 지난 의자가 지금까지도 흠집 하나 없이 온전히 보존된 것만 봐도 의자를 제작한 장인의 뛰어난 솜씨와 더불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장은 모두 4점을 하사받았다. 그림 속에 보이는 지팡이는 머리 부분에 비둘기 머리를 조각한 조두형(鳥頭形)으로 바닥에 닿는 아랫부분은 삽 모양으로 돼 있다. 비둘기는 무엇을 먹어도 토하지 않고 잘 소화시키는 새다. 지팡이에 비둘기를 조각한 이유는 노인도 비둘기처럼 토하지 않고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라는 의미에서다. 검은색 궤장은 멀리서 봐도 형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고 뚜렷하다. 우리나라 기록화가 얼마나 사실적이고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붉은색 탁자 위에 놓인 교서함은 오늘 왕림하지 못한 왕을 대신한다. 붉은색 상 위에 놓인 세 동이의 백자 술동이도 마찬가지다. 왕이 연회에 술을 내린 것은 단순히 잔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만은 아니다. 술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복록’으로 제사와 모든 예의 회합에 꼭 필요한 음식이다. 신하는 왕이 내려준 술을 마시면서 주군과 신하 사이의 질서와 우호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처럼 술을 핑계로 나이와 상관없이 막말을 해대는 ‘야자타임’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예의 실천이었다. 술잔을 주고받을 때는 무릎을 꿇고 예를 행하며 양손을 모아 공수(拱手)자세를 취하는 것이 주도(酒道)였다. 한 번 마셨다하면 인사불성이 되어 길바닥에 드러누워야 술 좀 마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도가 아니다. 궤장과 교서와 선온 뒤로는 옥색(玉色)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옥색병풍은 명주나 한지에 쪽빛으로 푸르스름하게 염색한 병풍으로 경사스러운 날에 사용했다. 병풍에는 현재 아무런 그림이나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잔치에 참석한 하객들이 저마다 글과 그림으로 축수서명을 하게 될 것이다.

악공 옆에는 붉은색 탁자 위에 백자로 된 그릇이 놓여 있다. 그릇 중 큰 그릇 두 개에는 복숭아꽃으로 보이는 붉은 색 꽃이 꽂혀 있다. 연회자리를 장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꽂은 ‘파티플라워’로 준화(樽花)라고 한다. 연회가 복숭아꽃이 피는 계절과는 무관한 11월에 있었던 만큼 생화가 아니라 조화로 추측된다. ‘스타일리쉬 파티 플래닝’에 빼놓을 수 없는 ‘플라워’가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 등에서는 준화 외에도 각각의 음식상 위에 예쁜 꽃 장식을 했다. 내외 귀빈의 머리에도 꽃을 꽂았고 악사와 무동과 일하는 여인들도 꽃을 꽂았다. 

오늘 참석한 각 대신들은 방석에 앉아 붉은색으로 주칠(朱漆)한 각상을 받았다. 방석은 노란 바탕에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가장자리(緣)를 둘렀다. 주인과 손님의 방석을 서로 맞붙여 깔지 않고 단독으로 깔아 놓았다. 방석에 앉은 사람의 덕(德)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바닥에는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에는 푸른 선을 두르는데 연회장 밖에 펼쳐 놓은 차일 속의 돗자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노란 돗자리 앞쪽 끝단에 푸른 선이 둘러져 있다. 이곳은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손님들이 앉아서 대기하던 장소다. 왕의 교서를 낭독하고 궤장을 전달하는 ‘선독교서도’를 보면 손님들이 모두 바깥 차일 아래 앉아 있다. 그들 모두 지금은 연회장으로 들어와 방석 위에 앉아 있으므로 바깥 쪽 차일 아래는 텅 비어 있다. 우리나라 기록화가 얼마나 정확하고 치밀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카메라로 현장을 일일이 찍어 참고한 것도 아닌데 화가의 눈총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기록화의 우수성이 아니다. 춤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 축하 공연은 처용무다. 얼굴에 처용탈을 쓴 다섯 명의 무용수들이 지금 한창 신이 나서 오방처용무를 추고 있다. 밴드와 무용수들은 모두 궁중에서 보냈으므로 실력은 최고일 것이다. 처용무는 궁중에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나쁜 귀신을 몰아내고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추는 춤인데 오늘같이 경사스런 날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인자한 처용탈을 쓴 오방처용이 동(靑) 서(白) 남(赤) 북(黑)과 중앙(黃)의 오방위를 상징하는 오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춘다. 처용의 얼굴은 팥죽색을 띄고 머리에는 복숭아와 모란꽃으로 장식했다. 팥과 복숭아는 귀신을 쫓아내고, 모란꽃은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림 속에서 춤은 절정에 도달한 듯 오방작화무에 진입했다. 중앙에 선 황색 처용이 청색처용, 적색처용, 흰색처용, 흑색처용과 어우러져 한삼을 좌우 어깨에 메었다가 뿌리는 동작을 하는 중이다.

처용무(處容舞)는 통일신라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때 살았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전염병을 옮기는 신)을 물리치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처용가를 기억할 것이다.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의 것인가/ 본디 내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이 밤늦게 귀가했는데 방 안 풍경이 야릇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남자가 누워 있다. 처용은 불륜의 현장을 덮쳐 남녀를 도륙 하는 대신 마당으로 내려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전혀 뜻밖의 행동이다. 놀란 것은 역신이다. 본계집과 불륜남을 향한 분노와 배신감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처용을 보고 역신은 감동했다. 곧바로 처용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서 역신은 앞으로 처용이 있는 곳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사라진다. 새해나 질병이 돌 때면 대문 앞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인 풍속이 처용설화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처용이 무골충(無骨蟲)이라서 역신을 용서한 게 아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때 원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용서했다. 그의 자애심은 역신의 반성을 불러왔고 원한을 그치게 했으며 예술 속에서 영생을 얻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 마음을 너그럽게 적셔준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었다고 해서 맞바람을 피었다면 어림없는 결과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칼부림을 했다면 한 시대의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듬쑥한 마음씀씀이가 원수까지도 변화시켰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처용의 일이 나의 일이 된다면 용서가 가능할까. 배우자의 외도 뿐 아니라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아도 지켜야 한다. 자애만이 원한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3호 / 2014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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