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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광해, 왕이 된 남자’ - 대승불교 다룬 사극

기자명 정장진

영화관 암흑 속에서 왕관보다 빛나는 ‘인간’의 빛

▲ 광대였던 주인공은 ‘가짜 왕’에서 민초들을 품는 ‘진짜 왕’으로 거듭난다. 왕좌에 앉아 그에게 왕 노릇을 가르쳤던 ‘킹메이커’ 도승지도 점차 ‘가짜 왕’을 군주로 받아들인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왠지 현재 관객 1100만을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변호인’을 떠올리게 한다. 넘기 힘든 1000만 관객 동원기록을 세운 대박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정치적 의미 역시 어딘지 유사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데, 대체 사람들은 오늘이 아니라 멀고도 먼 450년 전 이야기를 다룬 이 사극의 그 무엇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선조에서 광해군과 인조로 이어지는 조선조 비극의 시대를 다룬 영화이지만 관객들은 450년 전의 옛날이야기 속에서 오늘을 본 것이다. 오늘만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만 같은 한국의 역사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대동법을 놓고 가짜 왕과 논쟁을 벌이던 중 도승지의 입에서 나온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정치일 뿐입니다”라는 말 그대로 정치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광해’는 이렇게 해서 사극이지만 E. H. 카 (Edward Hallett Carr)가 말한 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정의에 가장 충실한 사극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불교식으로 풀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적지 않은 메시지들이 들어있기도 하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지난한 세월 흔적이 전혀 나타나진 않지만, 왕과 신하된 자들의 자격과 조건을 묻는 이 사극에서 수보리의 불교적 관점은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게 한다.

분신과 본신, 두 명의 왕
민초들과 같은 마음 품는
진짜로 생각되는 가짜 왕

왕 버선발에 무릎 꿇은 권력
‘킹메이커’ 도승지도 인정해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사극도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영화가 ‘광해’이기도 한 셈인데, 하지만 ‘광해’가 흘리게 한 눈물은 뒤주에 갇혀 부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다룬 영화처럼 비정한 역사 때문에 흘린 눈물도 아니고 최루 영화의 달콤한 눈물은 더더욱 아니다. ‘광해’가 흘리게 한 눈물은 대승불교의 정점에 있는 애국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비장함의 눈물이다. 그래서 이 눈물은 조금 위험하기도 하다. 애국은 눈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눈물 때문에 영화와 현실, 역사와 오늘을 혼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에서 흘린 눈물? 그렇다. 하지만 이 눈물은, ‘애국’이라고 할 때 사랑해야 할 나라가 어떤 나라이어야 하는지를 되묻게 하는 눈물이어서 값지기만 하다.

영화 ‘광해’는 왕을 다룬 영화다. 아주 특이한 형식으로. 이 특이한 형식에 주목해 보자. 일개 저잣거리의 광대가 음모와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왕 노릇을 하면서 이 가짜 왕이 서서히 진짜 왕이 되어간다. 그리고 모두 이를 받아들인다. 많은 이들은 이 가짜 왕을 줄거리가 일러주는 그대로 가짜 왕으로만 알고 영화를 봤다. 하지만 영화를 조금 아는 이들은 이 가짜 왕이 진짜 왕의 분신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실 모든 군주는 두 사람이다. 왕이 있고 왕 이전의 인간이 있기 때문인데, 이 두 존재를 조화, 통합시키지 못하면 난이 일어나고 만다. 이 진리는 비단 왕만이 아니라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왕은 폭군이 되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신하 역시 간신배나 역적이 되기 쉽다. 그 역도 마찬가지여서 왕이기를 포기한 채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왕은 국정 난맥상을 만들어 내고 혁명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금속공예에 몰두해 쇳조각을 붙이고 두들기면서 왕 노릇하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루이 16세가 맞은 프랑스 대혁명이 그렇게 일어났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역시 그런 왕이었다.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이 군주는 성 전체를 온통 바그너의 성배 전설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로 꾸며놓고 미친 짓을 하다가 미쳐 죽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예를 들 수 있는가.

▲ ‘가짜 왕’의 마음에 감복한 시녀 사월이는 왕 대신 독약을 먹고 죽는다.

가짜 왕은 수라상을 차리는 나이 어린 시녀 사월이의 사연을 안타까워하고 잔반도 많이 남겨주어 배불리 먹게 하며 나중에는 돈도 쥐어주고 어미도 찾아주겠다고 약조한다. 가짜 왕은 또 중전을 만나 시를 읊고 앞니 빠진 광대놀음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중전을 만나기 위해 홀로 있으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자 신발 한 짝을 하늘로 벗어던지고 내달린다.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는데,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위하는 도부장이 살해되는 장면에서 도부장은 가짜 왕의 버선발을 다시 보고 어루만지면서 숨을 거둔다.

왕은 왜 두 번씩이나 신발을 벗어 던졌을까? 이 멍청한 질문에 답을 하자면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답을 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는 하나의 장치인 셈인데, 왕의 두 버선발 사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첫 버선발에서 도부장은 왕의 진위 여부를 의심한다. 하지만 두 번째 버선발에서 도부장은 가짜 왕을 진짜 왕으로 받아들인다. 대역죄를 지은 셈인데, 영화에서는 이 대역죄가 전혀 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변한 것은 도부장만이 아니다. 광대에게 대역을 맡겨 가짜 왕으로 만들어 놓은 도승지도 변한다. “사월이라는 아이의 복수를 하기 원한다면, 백성의 고혈을 빠는 저들을 용서치 못하겠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 드리리다.” 쉽게 말하면 뒤집어 업자는 말이다. 도승지는 보름간 가짜 왕 역할을 했던 광대가 배를 타고 떠나는 나루터에 나와 고개를 숙여 절을 한다. 그도 가짜 왕을 진짜 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전의 은장도에서 칼날을 제거하기도 한 가짜 왕은 중전의 오라비를 풀어주기도 하고 또 대동법을 관철시키기도 한다. 입궐한 신하들과 유생들이 궁전 앞뜰에 엎드려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며 “저희를 밟고 가소서” 하자 가짜 왕은 정말로 신하들의 등을 밟고 내달린다. 속이 다 후련해지는 장면이다.

“사대의 예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 백성들을 사지로 내몬다 말이오.” 이 장면도 감동이지만, 그러나 진정 감동스러운 장면은 따로 있다. “나는 왕이 되고 싶소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왕이 된다면, 나는 왕을 하지 않겠소. 내 꿈은 내가 꾸겠소”라고 가짜 왕이 일갈하는 장면이다.

은 20냥에 팔려온 가짜 왕은 광대이기에 왕 역할을 썩 잘해 낸다. 그러는 사이 도승지가 왕의 용상에 앉고 가짜 왕은 신하인 도승지 자리로 내려앉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이 반복되는 몇 장면을 관객들은 대단치 않게 여기고 흘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영화에서 신하인 도승지가 용상에 앉는 장면은 예상외로 심각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장면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며, 설사 영화 속의 영화인 가짜 왕 노름 속에서도 도승지가 앉을 수는 없는 자리이다. 굳이 용상이 아니라 옆 자리 아무데나 앉아 가짜 왕에게 왕 노릇 하는 방법을 일러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도승지는 가짜 왕과 용상을 여러 번 바꾸어 앉으며 코믹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게다가 두루마리 서책으로 가짜 왕의 머리를 내려치기도 한다. 감독이나 작가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 의도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도승지는 영화 속의 영화인 가짜 왕 노름의 연출자이다. 그는 영화 속의 영화인 왕 노름에서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감독인 것이다. 그는 킹메이커인 것이다. 그에게 킹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영화에서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홍길동전’의 작가로서,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고 서자를 비롯한 불만계층을 모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모의하기도 했던 허균의 생각을 일정부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가짜 왕이 진짜 왕이 되었다. 기생 연회에서 만담이나 지껄이고 허리를 꼬고 엉덩이나 흔들던 천하고 천한 신분의 광대가 이제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사월이, 내시, 도부장, 도승지 모두의 진정으로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도승지도 고개를 숙여 절을 했고 그 전에 도부장은 죽음으로 의금부 군사들을 막아냈다. 사월이는 왕 대신 독약을 먹고 토혈하며 죽어간다.

모두들 가짜를 진짜로 인정한 것이다. 신분의 격차는 사라지고 환하게 빛나는 대승불교의 밝은 빛 속에서 진짜 왕인 인간의 얼굴을 본 것이다. 직접, 보통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오늘날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광해군 당시 사람들은 가짜 광해, 보름간 왕이 된 남자에게서 이 밝고 환한 인간의 빛을 본 것이다. 이 빛은 대승불교만이 낼 수 있는 빛이며, 대승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빛이기도 하다.

이 빛을 통해 우리는 국가와 통치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동시에 대승의 함의를 되새기게 된다. 불교가 글자 한 획, 문구 하나에 집중하면서 경전해석의 고고한 미로 속을 헤맬수록 민중들은 비루하고 무지한 백성에 지나지 않아 보일 것이다. 피안은 그들만의 지극한 정신적 세계를 통해서만 도달 가능한 고답이 되어갈 것이다. 마니교를 비롯한 카타리파 등 서양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그랬다. 영지주의, 신지학 등도 그 아류들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경도되고 있는 사이언톨로지 역시 그런 아류다.

오늘날 종교는 불교든 기독교든, 민중들을 제대로 이끌고 있지 못하다. 조계사와 명동성당은 이제 거의 최후의 보루다. 오히려 민중들은 영화에 열광한다. 현실 속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또 ‘변호사’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니, 그들을 대변해 줄 ‘변호인’을 찾아 영화관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아니면 잠깐 ‘왕이 되어 본 사나이’ 속의 참 인간을 만나러 가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인들의 책임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돈은 벌어라. 그러나 예인으로서의 기개와 국민을 버리면 안 된다. 국민을 변호해야 하는 것이다.

‘광해’와 ‘변호인’을 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본 그 깊은 연유를 영화인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생들은 ‘인간’을, 훤히 빛나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빛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그리고 영화관 못지않게 어두운 현실 속에서.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33호 / 2014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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