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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정수영, ‘총석정’

기자명 조정육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행 되어 스며드니 행복에 집착치 말라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네 가지를 면할 수 없다. 첫째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둘째,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가난하고 천해질 수 있으며 셋째, 어떤 것이든 모이면 흩어지기 마련이고 넷째, 건강한 육신을 가진 사람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다.” -출요경

일반적인 총석정도와 달리
가난한 초옥 삽입한 정수영
멀리서는 극락처럼 보여도
내밀한 곳엔 불행이 존재


▲ 정수영, ‘총석정’, 종이에 연한 색, 37.2×62cm. 국립중앙박물관.

보로부두르사원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있는 보로부두르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미얀마의 바간과 함께 세계 3대 불교사원이라 불린다. 보로부두르를 끝으로 세 개의 사원을 전부 다녀왔다. 동양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풀어야 할 오랜 숙제를 마친 것 같다. 앙코르와트가 웅장하고 바간이 광대하다면 보로부두르는 단아하다. 사원을 이룬 돌조각이 백만 개가 넘는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100m가 넘는 기단은 왕관처럼 장식된 다양한 조각이 씌워져 있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결합된 불가사의한 사원이다. 사원 위에 올라 열대 우림을 내려다봤다. 우련히 펼쳐진 숲 사이로 붉은색 벽돌집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마치 부겐베리아꽃이 피어있는 것 같다. 어떤 근심 걱정도 내려앉을 수 없는 곳. 족자카르타는 극락이자 낙원이다.
 
총석정(叢石亭)은 관동팔경(關東八景)에 속한 명승지다. 관동팔경은 현재의 영동지역 즉 대관령 동쪽에 위치한 8곳의 명승지를 일컫는다. 평해의 월송정, 울진의 망양정, 삼척의 죽서루, 강릉의 경포대, 양양의 낙산사, 간성의 청간정, 고성의 삼일포, 통천의 총석정 등이 관동팔경이다. 여기에 고성의 해산정, 흡곡의 시중대 등을 넣어 관동십경(關東十景)이라 칭하기도 한다. 관동지역은 금강산 여행을 다녀 온 사람이 마지막으로 거치게 되는 코스다. 관동팔경은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 멋지게 노래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시화(詩畵)로 꾸며졌다. 관동팔경을 그린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도 여러 점 남아 있다. 관동팔경도처럼 여행을 하면서 직접 둘러 본 경치를 그린 그림을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라 부른다. 현재 우리가 여행 가서 스마트폰이나 디카로 사진을 찍는 전통이 기행사경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총석정은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장소였다.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집(農巖集)’에는 금강산 구경을 떠난 그가 집으로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간성 군수가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팔경을 두루 구경하지는 못한다 해도, 총석정, 삼일포 같은 곳은 단 며칠의 구경거리에 불과하므로’ 꼭 들러볼 것을 권유한다. 총석정은 바다 위에 솟은 절벽과 바위들이 총총히 쌓여진 것처럼 보여 총석(叢石)이라 부르는데 신선이 즐길만한 선경(仙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를 보면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한가운데 떨어져 있다. 돌기둥은 모두 6각으로 마치 옥을 깎아 놓은 것과 같이 모나고 곧아, 먹줄로 재어 깎은 것 같다”라고 하면서 “모두 4개의 정자가 바닷가의 총석을 바라다보고 있으므로 총석정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지명의 유래를 밝혀놓았다. 조선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총석정도를 남겼다. 여러 점의 총석정도를 남긴 정선(鄭敾)과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해 정수영(鄭遂榮), 이인문(李寅文), 이재관(李在寬), 김하종(金夏鍾), 이의성(李義聲), 김규진(金圭鎭) 등이 모두 붓끝으로 총석정을 조각했다.
 
그 중에서 정수영의 ‘총석정도’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조금 다른 특색이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총석정이 푸르스름한 바다를 배경으로 대각선으로 펼쳐졌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육지에서 바다를 향해 내뻗은 총석정이 쪽빛 바다에 발을 담근 듯 시원하다. 참신한 색깔과 기교를 자랑하지 않은 묘사가 특징이다. 무엇보다 총석정을 바라보는 위치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며 구도를 잡았다. 육각으로 된 바위들이 성냥다발처럼 서 있는 쪽에서 절벽 위의 정자를 바라보는 구도가 최고의 ‘포토존’이다. 정선과 김홍도의 ‘총석정도’가 대표적이다. 이곳에 서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기암괴석과 절벽뿐이다. 잡다한 세속은 완전히 사라진다. 오직 신선에게만 입장이 허락될 것 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조물주의 물건 만드는 솜씨가 지극히 기이하고 교묘하다’(이중환, ‘택리지’)는 찬탄과 ‘귀신도끼로 다듬은 것’(정철, ‘관동별곡’)이라는 칭찬을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게 된다.
 
그런데 정수영은 방향을 틀었다. 굳이 총석정의 뒷부분까지 걸어내려와 굴껍질처럼 붙어 있는 가난한 초옥을 그려 넣었다. 이것이 진짜 총석정의 모습이다. 정수영이 대대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한 실학자 집안에서 자란 출신성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총석정도’는 ‘해산첩(海山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해산첩’은 정수영이 1797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나서 2년이 지난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완성한 화첩이다. 실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기행(紀行)과 사경으로 시서화를 즐겼다. 그는 ‘해산첩’외에도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그린 ‘한임강명승유람도권(漢臨江名勝遊覽圖卷)’을 남겼다. 출사(出仕) 대신 출사(出寫)를 선택한 결과로 남은 작품들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과부가 유복자인 외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며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이 죽었다. 그녀는 슬픔과 설움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과부는 성 밖 기원정사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물었다.
 
“부처님. 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제 아들이 죽었는데,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다 듣고 말씀하셨다.
 
“그대는 마을로 가서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집에서 불씨를 구해 오라. 그 불씨를 구해 오면 그대의 아들을 살려 주겠다.”
 
여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한걸음에 마을로 달려갔다. 그러나 온 마을을 다니면서 불씨를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었다. 이 집에 가면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고, 저 집에 가면 ‘할머니가 죽었다’고 하는 등 어느 집이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이 없었다. 여인은 할 수 없이 부처님 처소로 되돌아와 말했다.
 
“부처님, 어느 집이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씨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과부에게 하신 설법이 오늘의 경전 내용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에 관한 설법이다. 과부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신의 고통이 자신만의 특별한 고통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인은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는 구나.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옆집도 앞집도 뒷집도 모두 힘들구나. 여인이 생각한 것은 그런 동질감이었다. 언제나 행복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고통으로 신음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여인은 조금 위로 받는 것 같았다. 그들 또한 힘들다는 표현만 하지 않을 뿐 고통의 무게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삶의 고통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다. 
 
보로부두르 사원을 내려와 부겐베리아꽃같은 벽돌집을 지날 때였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나무의 일부처럼 앉아 있던 노점상들이 관광객을 보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조잡한 물건을 들이대며 연신 뭐라고 외쳤다. 하나라도 팔아야 하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었고 이목구비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난과 피곤함으로 찌든 얼굴이었다. 높은 사원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족자카르타의 세부 모습이었다. 멀리서 보면 극락처럼 보이는 곳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결코 행복한 곳이 아니다. 처절한 삶의 고민이 들어있고 절박한 몸부림이 담겨있다. 다만 멀리서 보기 때문에 행복해보일 뿐이다. 다른 집에는 아들의 죽음도 없고 남편의 죽음도 없는 것처럼 생각한 과부의 오해처럼. 정수영이 그린 ‘총석정도’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와 같을 것이다. 알고 보면 모두 저마다의 고된 삶을 겨우겨우 끌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뭔가 부족하다. 남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 해서 나의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나의 고통은 남의 고통과 상관없이 독자적이이다. 쓰라리고 강력하다. 큰 수술 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의 고통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고통의 습성이다. 불씨를 구하러 다닌 과부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얻은 평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상대적인 안도감은 더 큰 불행을 만났을 때 깨어지기 마련이다. 절대적이지 않다. 돈 없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다.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돈 많은 사람이 영원히 부를 누릴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다.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건강한 사람이 영원히 건강하리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은 사람은 사랑을 얻은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다.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랑받는 사람이 영원히 사랑받으리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도 가난할 때가 있고, 건강한 사람도 병들 때가 있고, 사랑받는 사람도 버림받을 때가 있다. 어떤 것이든 모이면 흩어지는 것이 진리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번 얻은 평온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고통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나타나며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수행이다. 그것이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이다. 부처님이 화려한 삶을 가차 없이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택한 이유도 바로 이 제행무상이었다. 고통에서의 해방은 보로부두르사원도 총석정도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다른 사람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제행무상의 진리를 가르쳐준 보로부두르사원은 아름답다. 노점상도 아름답고 야자수나무도 아름답다. 내 마음에 상처를 두고 떠난 사람도 지금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모두 모두 아름답다.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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