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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단개혁의 배경 - ⑤ 재가자 소외

‘출가 권위주의’에 맞서 재가자 개혁의지 표출

▲ 1994년 조계종 개혁은 사부대중이 함께 이룩한 첫 개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4월11일 조계사 경내에 진입한 경찰들의 철수를 요구하며 재가불자들이 촛불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사부대중이 모두 평등한 교단을 건설하고 생활 속의 신불교를 정립하기 위해 맡은바 소임을 다할 것이다.” (한국재가불자연합, 창립선언문)

1994년 7월23일 조계종 개혁의 중심에 섰던 재가자들이 ‘한국재가불자연합(재가연합)’을 발족했다. 종단개혁의 여망을 모으고 실천의지를 결집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조직체가 필요했다. 전국 40여개 재가단체 3000여명이 동참한 재가연합은 ‘종단운영의 사부대중 공동참여’를 기치로 내걸었다.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출재가의 역할을 나눠 사찰의 재정과 행정은 재가자에게 맡기고, 스님은 수행과 법문 등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마련을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오히려 개혁회의 스님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스님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무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출재가 모두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개혁하는 것은 공통된 과제였지만, 재가자에게 종단운영의 한 축을 내주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사부대중의 공동운영’이라는 재가자들의 개혁 요구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출재가 다르다’ 차별의식
재가자 종단참여의 걸림돌
신도에게 의무만 강요하고
종단구성원으로 인정 안해

정화과정서 양원제 시행해
재가 종회참여 약속했지만
기득권 반발로 ‘유야무야’

70년대 재가불교운동 정점
사회민주화·통일운동 견인
종단개혁에 적극 나섰지만
‘재가 종단참여’ 끝내 무산

현대 조계종사에서 재가자는 늘 종단운영의 중심에서 배제돼 왔다. 신도로서 의무만 있을 뿐 종단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출재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기득권층 스님들의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박광서 서강대 교수는 “많은 스님들이 출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재가와 신분상의 차이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차이는 범접할 수 없는 성역으로까지 여긴다”고 지적했다.(한국재가불교운동의 연구, 한국종교연구 5집) 이렇다보니 상당수 스님들이 ‘내가 출가 승려이니 재가자의 예경을 받아야한다’는 상을 내세우는데 익숙해져 있고, 재가자들은 스님들의 종속적인 관계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재가자들의 종단참여요구가 번번이 무산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재가자의 종단참여 요구는 1950~60년대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처음 시작됐다. 정화운동은 ‘전통불교 회복’이라는 긍정적인 성과를 올렸지만 종단 내부에서 숱한 문제점을 낳았다. 이로 인해 재가자들 사이에서는 스님 중심의 종단운영에 대한 강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정화운동을 통해 종단 재건과 불교 발전을 기대했던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재가자들의 현실자각이 커져갔다. 1963년 11월 조계종 전국신도회가 사부대중의 종단운영과 재가자들의 종회의원 참여를 골자로 하는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을 발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전국신도회의 조계종단 혁신재건안 연구’(김광식, 불교평론 4호)에 따르면 전국신도회는 혁신재건안을 통해 △정화운동의 비판적 계승 △수행승단 건설 △명실상부한 사부중의 종단 성립 △승려 및 신도 재교육 △종회의 신도참여 등을 요구했다. 재가자 종회의원 의석 배분은 이미 정화과정에서 비구승단이 약속한 사항이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은 정화운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승만 정권에 기대 정화운동을 진행했던 비구측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비구측이 ‘중앙종회 상하원제 도입’을 들고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중앙종회를 상원과 하원으로 나눠 비구승이 상원을 맡고, 취처승과 재가자들이 하원을 맡도록 하는 방식이다. 취처승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재가자를 끌어안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논의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군사정권의 강압에 따라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했지만 비구·취처승들의 갈등과 대립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비구승들이 주도하는 종단운영에 반발해 취처승들이 이탈하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그러자 전국신도회는 1963년 11월 전국 주요도시 대표자회의를 열어 ‘종단혁신재건안’을 발표하고 중앙종회에 재가자의 종회 참여 등을 골자로 하는 종헌 개정을 요구했다. 비구 중심에서 벗어나 사부대중의 총의로 운영되는 합리적인 종단으로의 개편과 재가자의 종단 참여가 골자였다. 그러나 종단혁신재건안은 이미 종단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 비구들의 반발로 끝내 수용되지 못했다.

‘재가불교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재가불교운동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 들어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독자적 포교신행운동’이 시작됐다. 재가자가 중심이 된 자생적 불교운동이었다. 대한불교청년회(대불청, 1960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1963년) 등 전국적 연합단체가 출범했고, 이한상의 주도로 1964년 삼보학회가 설립돼 왕성한 신행활동을 이어갔다.

1970~80년대는 재가운동의 전성기였다. 이는 한국불교에 대한 위기론에서 비롯됐다. ‘한국재가불교운동의 실태와 과제’(김재영, 동아시아불교문화 4집)에 따르면 조계종 출범 이후 종권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승단의 비도덕적 폭력성은 교단 전체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치명적 요인이 됐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계의 양적 팽창과 사회적 영향력 확대는 불교계에 강한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위기의식은 자구노력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생겨난 대불련과 대불청, 청소년교화연합회(청교련) 등이 전국적 조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재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1970~80년대 대불련의 조직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서울대를 비롯해 동국대·고려대·한양대·중앙대·숙명여대·성신여대·동덕여대 등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수천 명의 청년 대학생들이 대불련 깃발 아래 운집했다. 이들은 ‘한국불교 1600년 대회’와 농활 등을 통해 새로운 불교수행 열풍을 이끌었고, 한국불교승단에 엘리트 출가자들을 배출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나서 반독재민주투쟁의 전위세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 시기 재가자 중심의 수행결사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원각회·달마회·삼보법회·관음회·구도회·금강경독송회·수선회·대원회 등 전국에서 수많은 재가수행단체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새로운 수행풍토를 조성했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승가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화와 다양화를 이뤄냈다. 지식인들의 불교참여도 늘어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재가불교운동의 성장은 곧 불교계의 사회참여를 넓히는 토대가 됐다. 이런 가운데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법난’은 불교사회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국가기관이 보여준 폭력성은 교단이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1976년 ‘민중불교운동론’을 토대로 불교계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출재가 젊은 엘리트들은 19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했다. 이들의 노력은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창립 등 진보적 스님들의 사회 참여도 이끌어 냈다. 1988년 12월 출재가 연합단체인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통불협)’가 발족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통불협은 다시 1993년 전국불교운동연합으로 전환돼 사회민주화와 통일운동을 견인했다.

재가자들이 종단 내부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1987년 군부독재권력을 무너뜨린 ‘6·10민주항쟁’의 경험은 교단개혁의 자신감을 갖게 했다. 이런 가운데 의현 총무원장 체제에서 드러난 권력유착과 종권 독점 등은 종단개혁에 동기를 불어넣었다. 출재가가 함께 시작한 1994년 종단개혁은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다.

의현 스님의 3선 강행을 계기로 ‘범승가종단개혁회(범종추)’가 종단개혁에 돌입하자 대불련과 동국대 불교학생회 등 젊은 재가단체들도 속속 농성에 참여했다. 뒤를 이어 우리는선우 등 기성 재가단체들도 스님들의 단식대열에 합류했고, 대학교수 등 지식인 재가불자들도 개혁에 동참해 의현 스님의 퇴진을 촉구했다. 결국 철옹성 같은 의현 총무원장 체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조계종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부대중이 함께 이룩한 개혁이었다.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박승길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1994년 종단개혁은 ‘선사 중심의 근본주의적 불교로의 복귀운동’이었던 정화운동과 달리 재가신도 단체의 다양한 참여가 이뤄짐으로써 한국정통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불교대중화의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와 정화운동’, 교단정화운동과 조계종의 오늘)

종단개혁이 마무리되자 재가자들은 종단운영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조계종사에서 되풀이된 종단파행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사부대중의 참여로 이뤄지는 합리적 종단운영이 시급한 과제라고 여겼다. 개혁회의도 ‘사찰운영위원회’를 두도록 종법에 명문화하고 출재가가 공동으로 사찰을 운영해 나갈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찰운영위원회는 명목뿐이었고 재가자들의 종단참여는 더욱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군림하려고만 하는 스님들의 ‘권위주의’가 만연되면서 재가자는 스님들의 보조자로 내몰렸다.

김재영 청보리회 법사는 “스스로 지도자이기를 거부하면서 교단의 관료화와 권위주의를 한사코 거부했던 부처님의 위대한 평등정신을 한국불교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사부대중의 평등한 교단건설’이 여전히 종단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회한이 담긴 비판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5호 / 2014년 3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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