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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윤두서, ‘경답목우도’

기자명 조정육

농부는 입으로 쟁기질하지 않고 수행자는 말로 행하지 않는다

“비록 많은 경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서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나니 수행자로서 아무런 이익이 없다.”  -법구경

농촌풍경 그린 ‘경답목우도’
농부·목동 대조로 흥미 유발
심지 않으면 싹트지 않듯이
실천 없는 배움은 무용지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 마음 알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어쩌다 한 번 볼 때는 넉넉해보이던 사람이 만날수록 까다롭고 불편한 경우가 있다. 처음 볼 때는 까칠하고 무뚝뚝한 사람이 보면 볼수록 정감 있고 매력적일 때도 있다. 한 번 봐서는 모른다. 오래 묵혀야 제 맛인 된장처럼 사람의 만남도 길게 사귀어봐야 안다.  짧은 시간동안 사람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함께 생활해 보는 것이다. 단 며칠만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밥 먹고, 잠자고 부대끼다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성정을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다. 이번 보로부두르 여행은 함께 간 일행 덕분에 행복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개그우먼처럼 분위기를 띄워 준 제자가 있어 연일 화기애애했다. ‘너이버’로 불리는 그녀는 어떤 화제가 나와도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펼칠 수 있을 만큼 상식이 풍부했다. 궁금증이 있으면 굳이 눈 아프게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는 대신 ‘인간 너이버’에게 물어보면 훨씬 더 빠른 답이 나왔다. ‘빅 데이터’에 입담까지 걸쭉하니 뙤약볕 아래를 걷다가도 그녀와 대화를 시작하면 피곤이 절로 사라졌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알토란같은 제자였다.

▲ 윤두서, ‘경답목우도’, 조선 후기, 비단에 먹, 25×21cm, 녹우당.

삼월 삼짇날이 엊그제. 산동네에 봄이 만개했다. 본격적으로 한 해 농사를 시작한 농부가 비탈진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다. 쟁기질을 하기 전에 퇴비를 뿌려 놨으니 땅을 갈아엎고 나면 거름이 골고루 섞여 흙이 부드러워 질 것이다. 땅이 기름질수록 곡물이 잘 자란다. 때를 맞춰 파종을 해야 하는 농부의 마음이 바쁘다. 이랴, 이랴 소를 재촉하는 소리. 딸랑딸랑 느리게 걸어가는 소의 워낭소리. 청명절의 산자락은 싱싱한 생명력만큼이나 부산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동은 두 마리 소를 풀어 놓고 언덕에 누워 나른한 봄날을 즐기는 참이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나 맨땅에 그냥 눕기에는 아직 썬득한 날씨. 목동은 모자를 벗고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짚방석을 깔고 그 위에 누우니 이보다 더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다. 쟁기질하는 농부의 처지와 자신이 비교되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자신은 그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소가 풀을 다 뜯어 먹을 때까지 쉬기만 하면 된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고 느긋하게 여유를 까닥거린다. 좋은 계절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봄철이면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을  과장 없이 차분하게 <경답목우도(耕畓牧牛圖)>에 담았다. 익숙해서 반가운 그림이다. 밭가는 농부를 먼 산을 병풍 삼아 그림 중앙에 배치했는데 앞쪽 언덕에 심어준 두 그루 나무가 마치 뒤에서 일하는 농부 위에 그늘을 드리우듯 뻗어 있다. 서로 다른 공간을 절묘하게 활용한 구도다. 나무 앞쪽에는 완만한 언덕을 대각선으로 배치하고 소를 방목하고 누운 목동을 그려 넣었다. 후배 화가 김두량(金斗樑:1696-1763)은 <경답목우도>를 보고 힌트를 얻어 <목동오수(牧童午睡)>를 그렸다. 목동 부분만 클로즈업해 그린 것이 특징이다. 윤두서의 <경답목우도>는 사람살이를 이해할 수 있는 점에서는 풍속화로 분류된다. 사람보다는 산과 나무 등의 배경이 강조된 점에서는 산수화에 포함시킬 수 있다. 풍속화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낸 김두량, 김홍도, 신윤복의 작품에 비하면 분류상 애매한 점이 없지 않으나 이런 선배가 있었기에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화려하게 꽃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후대들은 선배 윤두서에게 빚진 바가 크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자신이 보고 느낀 현장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윤두서, '경답목우도'의 목동 부분 세부(좌) 김두량, '목동오수'(우), 종이에 연한 색, 31×56, 평양 조선미술관.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이다. 그는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 때문에 벼슬을 포기했다. 서인(西人)이 집권하는 상황에서 근기남인(近畿南人)에 속한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46세가 되는 1713년에 가계의 본거지인 전남 해남에 내려가 학문과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해남에서 <나물 캐는 여인><짚신삼기> 등 주변에서 본 농민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를 여러 점 남겼다. 이 그림도 그 중의 하나다. 농부가 밭 갈고 목동이 소꼴을 먹이는 <경답목우도>는 낙향 이후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그의 아들 윤덕희(尹德熙:1685-1766)와 손자 윤용(尹愹:1708-1740)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 그들은 깊게 감동받아 출가해 비구가 되었다. 비구가 된 두 사람은 각각 자기들의 스승을 모시고 율장에 정해진 바대로 5년간 기초과정을 보냈다. 그 후 둘 중 젊은 친구는 경전에 관심이 많아 경율론을 공부해 그 분야에 통달한 강사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5백 명의 제자 비구를 가르치는 위치에 올랐으며, 열여덟 가지나 되는 책임을 맡아 여러 가지  사무를 집행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 편 나이가 많은 친구는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수행에 뜻을 두었다. 그는 부처님께 수행법을 자세히 여쭈어 배운 대로 잘 실천했다. 그 결과 오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에게 배움을 요청한 비구들도 잘 지도하고 이끌어 곧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세월이 흘러 두 친구는 오랜만에 기원정사에서 만났다. 경을 배운 젊은 친구는 나이가 많은 친구가 아라한이 된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다만 자기의 학문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다. 젊은 친구는 자기의 학문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는 경율론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친구 비구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이때 부처님께서 모든 정황을 천안(天眼)으로 살펴보시고 젊은 비구가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시었다. 부처님이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곧 경에 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런데 경에 자신 있었던 젊은 비구는 대답을 잘하지 못하고 아라한을 성취한 나이든 비구만이 정확하게 답변했다. 젊은 비구는 문자상으로만 경의 의미를 알았을 뿐 수행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진실을 드러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이 된 비구를 칭찬해 주시었다. 젊은 강사 비구는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기와 같은 우수한 제자에 대해서는 칭찬이 없으시고 노둔한 친구 비구만을 칭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공부하되 수행이 없는 사람은 마치 남의 소를 보살펴주고 삯을 받는 목동과 같으며, 직접 수행을 하는 사람은 목장의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시었다. 자기가 목장의 주인이 되어야만 소가 생산해내는 우유와 치즈 등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경을 가르치는 강사는 자칫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것에 빠져서 진실한 내적 경지를 등한시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비록 문자상의 의미는 잘 모른다 할지라도 실제 수행을 통해 그것을 깨달은 수행자는 참다운 본질적인 문제인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편이 올바른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수행자라야 올바른 수행의 힘으로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잘 제거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성취한다. 그는 평화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윤회의 거센 파도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기쁨과 자유로움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게 된다. 설법을 마치신 부처님은 두 편의 게송을 읊으셨는데 첫 번째 게송이 오늘 읽은 경전 내용이다.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동으로 실천하는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지 가르쳐주는 게송이다.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씨앗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은 지난해에 갈무리해 둔 종자다. 종자는 튼튼하고 잘 생긴 씨앗을 골라야한다. 병들거나 속이 빈 쭉정이가 들어 있으면 낭패다. 좋은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좋은 종자를 고르는 것과 같다. 씨앗을 준비했으면 땅을 파고 심어야 한다. 심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종자라 해도 결코 싹트지 않는다. 배운 대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는 행위다.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배운 바를 어떻게 실천하느냐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배웠어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농부는 입으로 쟁기질을 하지 않는다. 몸으로 한다. 목동이 소꼴을 먹이는 행위도 입으로 하지 않는다. 몸으로 한다. 자신이 배운 공부를 남에게 과시하는 행위는 입으로 쟁기질을 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도 입으로 소꼴을 먹이는 것과 같다. 입으로 쟁기질을 할 수 없고 소꼴을 먹일 수 없듯 자기가 배운 공부와 종교도 입으로 실천할 수 없다. 몸으로 해야 한다. 말은 청산유수로 번지르르한데 감기고뿔도 남을 안줄 정도로 강밭은 사람이 있다. 공자님 말씀을 빌리면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능한 사람은 ‘인(仁)’이 드물다. 어진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더 감동적이다. 쟁기질도 수행도 마찬가지다. 

보로부두르 여행을 함께 한 제자는 멋있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모른다. 그녀의 형편이 넉넉한 지 궁핍한 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배운 공부를 삶 속에서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배운 공부나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건강한 씨앗이 자라고 있었음을. 

부처님이 읊으신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제거하며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이생과 내생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 사람을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5호 / 2014년 3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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