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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홍성 용봉산 용봉사

기자명 김택근

내포신도시 굽어보는 용봉산 기운 모아 포교 중심 발원

▲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형상인 용봉산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봉사. 내포신도시 시대를 앞두고 지역 포교 전진 기지를 발원한 용봉사 경내에는 활기가 감돌고 있다.

절을 찾아가는 날, 세상은 먼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미세먼지가 태양마저 가렸다. 먼지 묻은 햇살은 이내 묽어져 흐물거렸다. 먼지는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것들에게 스며들었다. 하늘도 들도 길도 희미했다. 우리 마음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먼지에 잔뜩 때가 끼어있을 것이다. 마음의 먼지만 닦으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이 구원되었음을 알 터이지만 먼지를 둘러쓰고 무엇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다. 날마다 미세망상의 습격을 받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저 흐린 세상도 결국 인간의 마음이 혼탁하기 때문이다. 저 먼지들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이웃을 고려하지 않는 삶에서 발생했다. 결국 이기심이 뿜어내는 독(毒)일 것이다.

충남 홍성 용봉산 용봉사(주지 일석스님)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절 입구에 이르니 왼편에 용봉사마애불(충남유형문화재 제118호)이 서 있다. 신라 소성왕 1년(799)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계란형 얼굴에 미소가 희미하다. 미소도 세월에 조금씩 닳아졌을 것이다. 부처님은 표정도 차림도 소박하다. 귀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다. 부디 중생의 소리를 많이 들어달라는 민초들의 기도 아니겠는가.

백제말 창건 추정… 기록 없어
언덕 위 본래 터는 빼어난 명당
1906년 권문세가 평양 조씨가
사찰 몰아내고 묘자리로 사용
사찰은 계곡서 명맥만 유지해
유교·천주교 ·무교 성행하며
불교 쇠락하고 파불도 횡횡

전쟁 잦았던 만큼 사찰도 많아
확인된 용봉산 절터 만도 27곳
국보로 지정된 탱화·마애불도

2020년 내포신도시 완공 맞춰
포교 전진기지로 발돋움 준비

 
용봉사는 사찰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창건설화나 중창 기록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용봉사는 원래 현재의 위치가 아닌 언덕 위에 있었다. 그곳은 빼어난 명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양 조씨의 무덤이 있다. 그러니까 한 집안의 유택이 민초들의 도량을 밀어내 버린 것이다. 세도가의 위세에 눌려 용봉사는 계곡 쪽으로 쫓겨났다. 신도들과 주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계곡 아래로 절을 옮겨야 했다.

▲ 옛 절터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성물들이 경내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 만큼 옛 위용과 사세는 유지할 수 없었다. 겨우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셔오고 석조도 부도도 옮겨왔을 것이다. 1906년 전후의 일이었다. 용봉사에 있는 성물들 중에 제 자리에 있었던 것은 없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그래서 경내는 흡사 박물관 같다. 물을 받았던 거대한 석조, 맷돌, 돌확 등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석조 안의 물을 마시던, 확돌에 곡식을 찧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옛날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이제 그저 큰 입만 벌리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산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이 서 있던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을 묻었다. 또 무학대사가 정진했던 서산 간월암도 만공스님이 다시 일으키기 전까지는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이 지역 고찰들이 세도가의 무덤으로 변해버린 것은 불교가 다른 지역보다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쫓겨 왔을 때는 계곡 위에 지은 절이 얼마나 초라했을 것인가. 지금의 대웅전과 적묵당, 용화보전 등의 조촐한 전각들은 그나마 20~30년 전에 지었다.

용봉사를 품고 있는 용봉산(381m)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형상이라서 그리 불린다. 가야산(678m), 덕숭산(495m) 등과 함께 덕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능선을 따라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 골산(骨山)이며 산세가 범상치 않다. 용봉산의 대표 사찰인 용봉사에는 두 개의 나라 보물이 있다. 하나는 지장전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탱화(보물 제1262호)이고 다른 하나는 용봉사 뒤편에 있는 마애관세음보살상(보물 제355호)이다.

▲ 용봉산 정상 부근에서 내포신도시를 굽어보며 서 있는 마애관세음보살상.

용문사 영산회괘불탱화는 조선 숙종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임금의 아들이 일찍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숙종 16년(1690) 승려화가 진각이 그렸고, 영조 1년(1725)에 그림을 고쳐 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숙종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당시에 죽은 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숙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은 연령군 뿐이었다. 연령군 이훤은 효자였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어머니 명빈 박씨가 죽어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늘 그리워했다. 아버지 숙종이 병에 걸리자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대기했으며, 때때로 아버지의 오줌을 맛보았다고 한다. 연령군은 형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믿고 따랐다. 연잉군도 동생을 각별히 챙겼다하니 형제애가 돈독했던 것 같다.

그러던 연령군이 숙종보다 먼저 죽었다. 나이 21세이며 자식도 없었다. 자신도 병에 걸려 요양하고 있던 왕은 하염없이 울었다. 한없이 착했던 아들이 먼저 죽었으니 자신의 부덕을 나무랐다. 몇 번씩 장례를 후히 치르라 일렀다. 연령군은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는 평소의 원대로 명빈 박씨 묘소가 있던 금천현 번당리(현재 서울 동작구 대방동) 남향에 묻혔다. 그리고 이듬해 숙종이 죽었다.

이렇게 볼 때 숙종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괘불탱화 제작을 명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연대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용봉사 괘불탱화는 어떻게 제작되어 용봉사에 걸리게 된 것일까. 숙종 16년에 그려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 때, 그것도 영조가 등극하자마자 ‘고쳐 그린 것’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연령군을 각별하게 챙겼던 영조였기에 기왕에 영험하게 잘 그려진 괘불탱화를 보고 이를 동생의 명복을 비는 의식에 걸도록 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그런 괘불을 용봉사에서 소장하고 있음은 연령군의 묘가 용봉사와 그리 멀지 않은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보물은 묵혀두는 것만으로는 보물이 아닐 것이다. 보물로 지정했으면 그 속에 스며 있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도 발굴해서 보존해야 할 것이다. 지난 해 5월 문화재 전문가들이 지장전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탱화를 상태를 점검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를 처음 본 주지 일석 스님은 두 번 놀랐다. 엄청난 규모와 비범한 그림솜씨에 놀랐고, 형편없는 보관 상태에 더 크게 놀랐다. 10년 전에 보수를 한 바 있다는데도 곰팡이가 슬어 곳곳이 훼손되어 있었다. 일석 스님은 그림 속의 부처님들께 너무도 죄송했다.

또 하나의 보물 마애여래입상은 용봉사 옆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이내 나타난다. 공식 명칭은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이다. 사찰명 용봉사가 아닌 지명 신경리가 들어가 있다. 그것이 ‘쫓겨난 절’ 용봉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마애여래입상은 자애롭다. 실제 불상은 앞으로 기울여져 있지만 그 앞에 서서 편히 부처님과 눈을 맞출 수 있다. 왜 기울여 조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왼팔을 가슴 위로 올려 저 산 아래, 우리 인간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이신다. 시무외인(施無畏人).

‘두려워 말라. 우환과 고난은 이미 지나갔다.’

고려 초 누가 이 산에 올라 정을 들었을까. 유달리 전란에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은 전쟁의 두려움을 없애고 영원한 안식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 용봉산 정상에 오른 주지 일석 스님. 언덕 위 옛 절터 복원을 구상 중이다.

일석 스님과 함께 용봉산을 올랐다. 산 정상의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내포신도시가 보인다. 내포지역은 홍성과 예산, 그리고 서산과 태안 일대를 지칭한다. 내포(內浦)란 바다가 육지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역을 말한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는 내포지역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후삼국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전쟁터였던 내포, 그 안의 사람들은 언젠가 부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 믿었다. 그 희망이 모여 곧 내포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 즉 용봉·가야·덕숭산을 불국토로 만들었을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이 확인한 용봉산의 절터는 무려 27곳이다. 홍성에서 자란 일석 스님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싸래기 냇가가 있어요. 용봉산 절집에서 쌀을 씻으면 그 쌀뜨물이 마을 앞까지 흘러들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그래요. 그러니 용봉산에 얼마나 많은 절들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용문산 아래 마을에 마애불과 석불들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에 마을 이곳저곳에서 무수히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모두 사라졌어요.”

내포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교가 성했고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도가 많았다. 또 유달리 무속이 기승을 부렸다. 이곳 불교의 기운은 어느 때보다, 어느 곳보다 쇠락했다. 용봉산에도 절마다 석불, 석탑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 내려갔거나 파손 되었을 것이다. 도난당한 불상과 석탑들은 도처에 흩어져 화단을 장식하거나 머리가 잘려나간 채 담벼락 밑에 처박혔다. 사람의 절이 멈춘 절은 이내 야생초와 나무들이 차지했을 것이고.

용봉산 정상에서 굽어보면 내포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충청남도 도청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이 발아래 있다. 모두 눈을 들어 용봉산을 쳐다보고 있다. 이제 용봉산은 내포신도시의 진산이다.

병풍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산등성이가 갑자기 내려앉는 곳에 마애관세음보살상이 서 있고, 당시 한번 내려앉는 곳에 평양 조씨 무덤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용봉사가 있다. 스님 말에 따르면 두 곳 모두 기(氣)가 뭉친 천하의 명당이다. 마애불상을 경내로 끌어들이고, 다시 언덕 위 옛 절터로 옮겨가면 용봉사에는 용과 봉황의 기운이 깃들 것이다.

용봉산 아래에 내포신도시가 펼쳐진 새로운 시대에 용봉사는 새날을 그리고 있다. 2020년에 인구 10만의 도시가 형성될 때 쯤 ‘쌀뜨물이 마을까지 내려가는’ 기도도량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일석 스님은 내포신도시 포교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몇 번씩 말했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35호 / 2014년 3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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