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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거량 담긴 편지 한 통

화두도 난이도가 있냐고 묻는 건 우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선가에서도 유독 ‘어렵다’ 평하는 관문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 하나가 ‘도솔삼관(兜率三關)’이고, 또 하나 꼽는다면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일 것이다. 그런데 40여년 전, 선가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이 두 화두를 전국 제방선원에게 던진 주인공이 있다. 설봉 스님이다.

1890년 함북 부령에서 태어난 설봉학몽(雪峰鶴夢) 스님은 1910년 조선총독부에 취직했지만, 얼마 후 항일운동에 관련되어 검거되었다. 1915년 25세 때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로 출가한 후 만공, 용성 스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후 20여 년간 오대산,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등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부산 범어사와 대각사, 선암사에 머물던 스님은 1969년 선암사에서 세수 80, 법랍 55세로 원적에 들었다.

1959년 동안거 당시 범어사에 주석하며 선문염송을 강의하던 설봉 스님은 제방선원 대표자 앞으로 편지를 보내 두 선문에 대한 일전어(一轉語)를 내려달라 청했다. ‘한 말씀 해 달라’는 간청인 듯하지만 ‘각자의 살림살이를 내 보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사미승으로 설봉 스님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부산 법륜사 조실 해월 선래 스님에 따르면 범어사는 크게 술렁였다고 한다. 누가 답을 해올 것인가? 어떤 선답이 담겨 있을까?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계가 현전에 펼쳐 질 것만 같은, 선의 일미를 재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동산, 향곡, 효봉, 월하, 월산, 일타, 청담 스님 등 20여명의 선객이 나름대로의 ‘답’을 보내왔다. 방선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 ‘어느 스님이 보냈는데 뭐라 했더라’하며 감탄했을 범어사 대중이 그려진다. 한 선사의 편지 한 통이 창출해 낸 그 때의 일대사 기연을 묶은 책이 ‘설봉학몽 대선사 선문염송 법문집’이다. 당시의 선문염송 강의 자료와 함께 ‘법거량’ 자료 일체를 올곧이 소장하고 있던 스님이 해월 스님이다. 설봉 스님의 제자 지원 스님은 그 자료를 엮어 2002년 법공양 한정판으로 출판했던 것이다. 동산, 효봉 스님의 선답이 일품이다.

도솔삼관을 들어 설봉 스님이 묻는다. ‘발초삼현은 다만 견성하기 위함이니, 상인(上人)의 성품이 어디에 있는고? 첫 물음에 대한 동산 스님의 선답이다. “낮잠이 깊이 들어 바야흐로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다.” ‘자성을 알면 바야흐로 생사를 벗어남이니, 눈의 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나는고?’에 대한 두 번째 물음에 동산 스님은 “금강뇌후철(金剛腦後鐵)을 타파하니 한 편은 산이 되고 한 편은 물이 된다”했고, ‘생사를 벗어나면 바로 가는 곳을 아는 것이니, 사대가 흩어지면 어느 곳을 향해 가는고?’에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삼밭에 누워 있다”했다. 생사관은 이미 초월한 듯, 한 터럭도 그물에 걸리지 않을 듯한 대 자유적 자재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덕산탁발화에 대한 효봉 스님의 선답 또한 두고두고 음미해 봄직하다. ‘암두 입에서 나와 덕산의 귀에 들어갈 때 일찍이 부처님이 들었겠는냐, 하늘이 들었겠느냐? 누가 밀계를 이르겠는가? 밀계 운운 하는 것은 귀를 막고 요령을 훔침이라.’ 암두밀계(巖頭密啓)에도 속지 말고 자신 앞에 놓인 은산철벽을 부숴 보라는 다그침으로도 들린다.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선객들의 선답 모두가 촌철살인은 아니다. 하지만 각자 위치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설봉학몽’에 맞서려는 선기만큼은 충분히 읽힌다. 그 때의 선기어린 대기대용의 순간을 이 시대에 또 다시 기다려 보는 건 욕심일까? 선사들의 심오한 법거량을 듣거나 읽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환희심! 자연스럽게 선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선(禪)의 힘이다. 사자후와도 같은 한국 선사들의 선문답이 계속 이어지기를 동안거 해제를 맞아 희망해 본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36호 / 2014년 3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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