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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심(祖心)스님의 그리움

기자명 성재헌

조심, 스승에 대한 그리움에서 진리 찾다

▲ 일러스트=이승윤

은혜(恩惠)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그리움을 낳는다. 은혜가 깊을수록 그리움의 그늘도 짙기 마련이다. ‘그’ 또는 ‘그것’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지 못할 일들이 수두룩하니, 곰곰이 살펴보면 감사함과 그리움의 대상도 따라서 수두룩하다.

그리움의 대상은 지금 무엇을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욕정(欲情)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오감(五感)의 충족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따라서 아름다운 그 모습, 정겨운 그 목소리, 향기로운 그 냄새, 달콤한 그 맛, 부드러운 그 느낌의 ‘누구’ 또는 ‘무엇’에 감사하고, 항상 곁에서 떠나지 않길 바라고, 손에 잡히지 않으면 그리워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은혜와 사랑과 그리움은 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다”고 노래한 만해(卍海)스님의 고백처럼, 깨달음과 열반은 강렬한 체험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감각의 주체를 ‘나’라 여기며 소중히 보듬던 어리석음을 어찌 깨칠 수 있었을까? 그분이 아니었으면, 닿을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끝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실상을 어찌 간파할 수 있었을까? 그분이 아니었으면, 까닭 없이 치솟던 고뇌와 번민의 불꽃이 사그라진 열반의 평온을 어찌 맛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고 한 시구처럼, 열반의 길을 깨우쳐준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이팔청춘의 연정(戀情) 못지 않다.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선사의 첫 제삿날 그의 제자 회당조심(晦堂祖心, 1025~1100)은 이런 게송을 지었다.

지난해 3월 17일
밤새 봄바람이 방장실을 흔들더니
뿔 셋 달린 기린이 바다로 들어가고
휑한 하늘에 조각달만 물결에 부서졌지요.
진실은 거짓을 덮어두지 않고
굽은 것은 곧은 것을 품지 못하는 법
나리는 새하얀 눈발에 부르는 노래
이젠 누가 있어 장단을 맞출까요
그 곡조를 아시는 만고에 드문 분
오늘이 바로 그분이 가신 날.

초나라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양춘곡(陽春曲)과 백설곡(白雪曲)은 얼마나 고상한지 온 나라를 통틀어도 이 노래에 화답할 자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들어본 이도 드물고, 이해하는 이도 드물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더더욱 드물다는 의미이니, 백설곡은 불전의 ‘희유(稀有)’라는 표현과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건 실로 희유한 일이다. 보통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은 여간 거슬리는 말이 아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증득하는 건 고사하고 가만히 들어주기도 성가신 노래이다. 오죽하면 붓다마저도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신 후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줄까 말까를 고민했겠는가. 그런 붓다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장단까지 맞춘다는 건 실로 세상에 드문 일이다.

붓다의 노래를 습득하는 길은 조심선사에게도 지난함의 연속이었다. 용산사(龍山寺) 혜전(惠全) 스님에게 출가한 그는 운봉 문열(雲峯文悅)선사를 찾아가 3년을 머물렀다. 하지만 문열선사는 도무지 가르치는 법이 없고, 물어도 친절하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이를 힘들어한 조심이 결국 하직인사를 드리자 문열선사가 당부하였다.

“꼭 가야겠거든 황벽산 혜남 스님을 찾아가 의지하거라.”

혜남선사를 뵌 조심은 첫눈에 그가 확철대오하신 분이라 확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입실(入室)이 허락되지 않았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난해한 물음에 궁리하고 또 궁리해 답을 해도 혜남 스님은 “그게 아니야” 하며 일축할 뿐이었다. 4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미혹의 안개가 걷히질 않자 조심은 혜남 스님께 이별을 고하고 다시 운봉산으로 갔다. 하지만 문열 스님은 이미 열반하신 뒤였다. 자신의 아둔함을 책망하며 세월을 보내던 조심이 어느 날 우연히 ‘전등록’을 펼쳤다가 다복(多福)선사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무엇이 다복의 한 무더기 대밭입니까?”
“한 줄기 두 줄기는 기우뚱하지.”
“모르겠습니다.”
“세 줄기 네 줄기는 구부정하지.”

그 순간, 도모지 말이 없던 문열 스님과 “아니야” 소리만 하던 혜남 스님의 뜻을 단박에 깨달았다. 조심은 곧장 황벽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인사드리려 방석을 펴는 순간, 혜남 스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가 드디어 내 방에 들어왔군.”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안고 조심이 말씀드렸다.

“대사(大事)가 본래 이와 같은데, 화상께서는 뭐 하러 사람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고, 법문을 하시고, 온갖 궁리로 찾아 헤매게 하셨습니까?”

혜남 스님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궁리해 더 이상 마음 쓸 곳이 없는 곳에 도달해야 스스로 보고 스스로 수긍하게 되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자네를 파묻어버린 게 되겠지.”

이처럼 지난한 붓다의 곡조를 가르쳐주고 한 자리에서 부르던 스승 혜남이 떠나셨으니, 지음(知音)을 잃은 가객 조심(祖心)의 노래가 어찌 쓸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화답하는 이 없다고 노래를 멈춰야 할까? 만해 스님도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뜨리는 짓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어부었다”고 하였다. 그리움에 그친다면 그건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짓일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지음을 찾는 조심의 노래가 다시 이어진다.

옛사람 떠나신 날이 바로 오늘
여전이 그날이건만 그 사람 오질 않네
오늘도 오시지 않고 작년에도 간 적 없으니
흰 구름 흐르는 물이여, 속절없이 유유하구나
누가 저울을 공평하다 하는가
곧음 속에도 굽은 것이 있지
누가 만물의 이치를 고르다 하는가
삼씨를 뿌렸다가 좁쌀을 얻기도 하지
가엽구나, 끝없이 내달리는 세상 사람들아
육육은 원래 삼십육이니라.

문득 서편제의 송화가 떠오른다. 송화는 왜 자신의 두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들어주는 이 없는 노래를 끝내 놓지 못했을까? 아마도 몸소 그 가락의 흥겨움을 한껏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0.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37호 / 2014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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