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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최북, ‘늦가을’

기자명 조정육

지금 포기하지 않는다면 곧 세상이 보이리라

“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더러움을 닦는다.” - 증일아함경 

형과 달리 아둔했던 주리반특
부처님 지도로 아라한과 성취
주저앉았다면 기쁨 없었을 것

최북 ‘늦가을’ 속 빗자루질처럼
내면의 먼지 쓸어내려 노력해야

▲ 최북, ‘늦가을’,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48.4×31.2cm, 국립중앙박물관.

공부하는 사람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 자괴감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가 더 뚜렷해지는데서 오는 무력감이다. 취미삼아 하는 공부는 즐겁다. 그런데 전공으로 선택하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재미로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스럽다. 파고 들어갈수록 오리무중인 거대한 학문의 세계에서 학생은 길을 잃기 일쑤다.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다.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허탈감이 밀려온다. 주저앉고 싶다. 공부는 아무나 하나.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다. 공부하는 사람치고 중도에 포기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들은 하나같이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나만 반치기처럼 모자라 보인다. 이런 생각이 심해지면 내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 같이 둔한 사람이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부처님의 제자 중에 반특이라는 형제가 있었다. 형 반특은 총명하고 지혜로워 출가한 뒤, 금방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동생 주리반특은 형과는 달리 어리석고 아둔했다. 당시 출가 수행승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짧은 시의 형태인 게송으로 암기하고 있었다. 형은 동생에게 하나의 게송이라도 외우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이윽고 안거(安居) 날이 되었다. 안거 때는 제자들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되풀이해서 외우거나, 암기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문구를 가르쳐 받았다. 형은 동생이 안거 날까지 게송 하나도 외우지를 못하자 화가 나서 말했다.

“너는 너무 어리석어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주리반특은 형에게 꾸지람을 듣고 대문 밖으로 나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지나가다 이 일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비구야, 걱정하지 마라. 나는 최상의 정각을 이루었다. 너의 형 반특으로 인해 네가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시자 아난에게 일러 주리반특을 특별 지도케 하셨다. 아난은 곧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부처님께서 직접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주리반특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더러움을 닦는다”라는 문구를 외우도록 하셨다. 그런데도 주리반특이 외우지 못했다. 부처님께서는 직접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두 구절을 외우게 하셨다. 주리반특은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 마당을 쓸면서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왜 이런 방법으로 나를 가르치는 걸까? 나는 지금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지금 내 몸에도 티끌과 때가 있다. 나 스스로를 비유해 보자. 무엇을 없애야 하고, 무엇이 때인가? 결박이 때이고, 지혜가 때를 없애 준다. 나는 지금 지혜의 빗자루로 이 결박을 쓸어버리리라.’

주리반특은 빗자루질을 하며 오온(五蘊:인간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이 이루어지는 것과 소멸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것은 색이요, 이것은 색의 발생 원인이며, 이것은 색의 소멸이다.’ 뒤이어 수·상·행·식이 이루어지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했다. 오랜 수행 끝에 주리반특은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미련하고 둔한 주리반특이 총명하고 영리한 형처럼 아라한이 된 것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암기하는 능력 없이 오직 빗자루질하는 단순노동만으로 목적지에 도달했다. 단지 빠르고 느린 차이만 있었을 뿐 두 사람이 도달한 경지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주리반특이 자포자기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영원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심한 무력감이 찾아들어도 포기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이룰 수 있을까 맥이 빠져도 주저앉지 말고 계속 가야 한다. 공자도 비슷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생각해보았지만, 유익함이 없었으며, 배우는 것이 더 나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필자도 주리반특 못지않은 결점이 있었다. 조울증이다. 구상의 ‘우음(偶吟)’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갇혀 있다.//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매여 있다.//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묶여 있다.’ 필자가 꼭 그랬다. 금방 즐거웠다가도 금방 우울해졌다. 이유 없이 가슴이 벌떡거리면서 두려움이 몰려오는가 하면 세상이 모두 내 것인 듯 의기양양해졌다.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여기에 폐쇄공포증까지 있어 좁은 공간에 있으면 불안했다.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만 의사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병원에 가서 상담하는 것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혼자 이겨내보기로 했다. 일종의 자가치료였다. 관련서적을 찾아 읽었다. 마음공부하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강의를 듣고 실천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자에게는 최고의 명약이었다. 치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했다. 두 가지 병이 아직 다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거의 극복됐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가 짧은 필자가 굳이 이런 연재를 감행한 의도가 여기에 있다. ‘우음’의 다음 구절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굴레에서 벗어났을 때/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아직도 필자와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벗에게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맑게 갠 가을이다. 단정하게 ‘ㄱ’자로 된 초옥 앞에서 남정네가 마당을 쓸고 있다. 마당에 딱히 쓰레기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돌이나 흙이 널려 있어 지저분한 것도 아닌데 남정네는 허리를 구부리고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화가가 빗자루로 땅바닥에 붓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정갈해 보인다. 이미 청소가 끝난 걸까. 남정네가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빗자루질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위아래를 연한 청색으로 물들였다. 땅바닥에 촘촘하게 점으로 찍은 풀들이 아직 푸르스름하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인 듯하다. 집 곁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를 표현한 붓질이 담백하면서도 깔끔하다. 오동나무처럼 보이는 나무 꼭대기로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에 높은 산이 솟아 있다. 산은 등성이만 보일 뿐 산자락은 구름 속에 잠겼다. 높은 산이다. 산자락을 휘감은 구름과 안개가 남정네가 사는 집 주위를 감싸고 돌아 넓고 시원한 공간을 만들었다. 우람한 산과 적막한 구름 속으로 오직 빗자루질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이 그린 ‘늦가을’은 ‘사시팔경도첩(四時八景圖帖)’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사계절의 모습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사시팔경도첩’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그려진 화제(畵題)다. 네 계절이니 네 장면을 그리면 되지 하필이면 여덟 장면인가. 조선시대 화가들은 계절을 그리면서 ‘초봄’ ‘늦봄’, ‘초여름’ ‘늦여름’ 하는 식으로 각 계절을 둘로 구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계절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봄이다. 봄은 봄이로되 계절의 문을 여는 초봄과 생명력으로 뒤범벅이 된 늦봄은 같지 않다. 여름이다. 여름은 여름이로되 서서히 달궈지는 초여름과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늦여름은 다르다. 초가을과 늦가을, 초겨울과 늦겨울도 마찬가지다. ‘사시팔경도첩’은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살면서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꼈던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문화다. 똑같은 장소도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듯 최북이 그린 ‘사시팔경도첩’도 그렇다. ‘사시팔경도첩’에는 선비가 나귀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 소나무 아래 앉아 담소를 나누며 폭포를 구경하는 모습, 우비를 걸친 어부가 낚싯대를 매고 귀가하는 모습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 중에서 마당 쓰는 모습은 ‘늦가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늦가을은 한 해의 군더더기가 낙엽처럼 쌓이는 계절이다. ‘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더러움을 닦는다’라는 문구를 되뇌며 내면속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기 좋은 계절이다.

오늘 경전의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첫 번째는 아무리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제마저 포기할 정도로 미련한 주리반특이 마침내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본인의 노력에 있었다. 두 번째는 스승의 역할이다. 주리반특같은 어림쟁이가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맞는 적절한 교육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처님은 설법할 때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설법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맞추어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셨다.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한다. 병에 따라 처방해 주는 약이 다르듯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교법을 말해주는 가르침이다. 훌륭한 스승은 어리숙한 제자를 다듬고 빚어 훌륭한 그릇이 되게 한다. 환한 대낮인 줄도 모르고 골방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제자를  밖으로 나오게 한다. 아니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넓은 초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모르긴해도 주리반특은 형 반특이보다 훨씬 너그럽고 온화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머리 좋은 사람들한테 느껴지는 까탈스러움이나 거만함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긴 세월동안 답답한 세월을 견디며 둥글둥글해졌는데. 형보다 훨씬 넉넉하고 여유로웠을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덕을 쌓기 위함이다. 공자의 말씀처럼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주리반특은 그의 모자람으로 인해 형보다 훨씬 이웃이 많았을 것이다.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필자까지도 그의 친구가 된 것을 보면. 나이 들어 공부하는 그대여. 힘을 내시라. 새롭게 시작하는 그대여. 용기를 가지시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리반특처럼.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7호 / 2014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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