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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조 스님의 눈물

기자명 성재헌

뭇매 맞고도 제 탓 돌리는 제자 인욕에 눈물

▲ 일러스트=이승윤

송나라 때 도령(道寧)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흡주(州) 출신으로 성이 주(注)씨였다. 처음 그는 도에 독실한 뜻을 두었으나 출가는 하지 않고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깊은 산, 외진 동네를 전전하며 홀로 수행하던 그는 우연히 장산천(蔣山泉)선사를 찾아뵙게 되었다. 천 선사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출가를 권하였다.

“평생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출가하게나. 그 길이 편하고 쉬운 길이야. 재가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도령은 천 선사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에 감사드리며 정중히 말씀드렸다.

“스님, 저는 출가가 목적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찾았다면 불법에 뜻을 두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도령은 천 선사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절집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물지게 나무지게를 지고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도령은 천 선사의 당부에 따라 행각을 나섰다. 담주(潭州) 운개산(雲蓋山) 해회사(海會寺)에서 뵌 법연(法演)선사는 특히나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안목(眼目)은 열리지 않았다. 도령은 기연(機緣)을 찾아 다시 숭과산(崇果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늦은 출가 탓에 가는 곳마다 궂은일은 항상 그의 차지였다. 도령에게 주어진 소임은 아침저녁 대중들이 씻을 물을 준비하는 욕두(浴頭)였다. 도령은 불평하지 않고 일과를 정확히 수행하면서 매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염송하는 것으로 과업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뜨거운 물을 준비하였다. 가마솥에 물을 부으면서 ‘금강경’ 염송이 시작되었다.

“다음과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언제가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쏘시개로 불을 붙이고, 매운 연기에 모눈을 뜨면서도 도령의 입에서는 ‘금강경’이 끊이지 않았다. 대중들이 차례차례 손발을 씻고나가고, 더러워진 욕실의 뒷정리를 하면서도 독송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바가지 물로 얼굴을 씻고, 손을 씻었다. 바야흐로 독송은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존재하는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라.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말씀과 문장을 듣고도 참된 믿음을 일으킬 중생이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발을 씻으려던 참이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말라. 여래가 입멸한 뒤 후오백세(後五百歲)에도 계를 지키며 복을 닦는 자가 있어 이 구절에서 능히 믿음을 일으키고 이 구절을 진실이라 여길 것이다.”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던 도령의 눈이 그 순간 활짝 열렸다. 도령은 곧장 짐을 챙겨 해회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법연 스님께 자신이 깨달은 바를 토로하였다. 희열에 들뜬 도령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법연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내 곁에 머물게.”

도령은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법연이 “개는 불성이 없다”는 조주 스님의 화두를 들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확철대오하였다. 법연 스님은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대중 앞에 도령을 세웠다.

“앞으로는 이 사람을 나처럼 대하라. 오늘부터 도령에게 당사(堂司) 소임을 맡긴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몇 십 년씩 참학하고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는 스승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한 자일뿐이었다.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는 늦깎이에다 굴러온 돌이고, 허드렛일이나 하던 자일뿐이었다. 시기와 질투를 삭이지 못한 자들이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스님, 좀 봅시다.”

이마가 널찍하고 눈썹이 치솟은 자가 한밤중에 난데없이 도령을 깨웠다. 도령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그를 따라 법당 뒤쪽 산길로 접어들자, 으슥한 계곡 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뼈다귀야!”
“속물도 안 빠진 놈이 어디서 어른노릇이야!”
“방장스님이 좀 귀여워하니까 아래위도 모르지!”

여기저기 주먹이 날라 왔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 정신을 차린 도령은 조용히 욕실로 가서 피 묻은 얼굴을 씻고 옷을 빨았다. 도령은 그 모습을 스승에게 보일 수 없어 그날 대중법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법회가 시작되자마자 법연 스님이 물었다.

“도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대중의 머뭇거림에 낌새를 차린 법연이 곧장 주장자를 던지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도령의 처소로 찾아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도령이 처참한 몰골로 누워있었다. 법연은 뒤따르던 대중을 내치고 방문을 닫았다.

“누구냐?”

도령은 꿇어앉아 공손히 말씀드렸다.

“죄송합니다, 스님. 어젯밤 뒷간에 가다가 그만 계곡으로 굴렀습니다.”

법연 스님의 음성이 방문을 뚫고 온 도량을 울렸다.

“도대체 어떤 막돼먹은 놈들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정말입니다, 스님. 제가 밤눈이 어두워 발을 헛디딘 것입니다.”

한참을 말없이 도령을 바라보던 법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넘어가면 저 놈들이 또 그럴 것이다. 말해봐라. 내 그놈들을 쫓아내마.”

도령은 손사래를 쳤다.

“정말입니다, 스님. 제가 잘못해서 넘어진 것이지,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퉁퉁 부어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는 입가로 피가 흘렀다. 법연 스님은 소매로 그 핏물을 닦아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의 인욕이 너만 못하구나.”

세월이 흐른 후 영도자는 개복사(開福寺)의 주지가 되었고, 그의 회하에는 항상 500명이 넘는 대중이 모였다고 한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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