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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파파로티-출가(出家)의 의미

기자명 정장진

위대한 스승, 겉모습 속 감춰진 재능을 일깨우다

▲ 조폭영화도 성악영화도 아니다. 파파로티는 조폭고교생과 음악선생님이 만나 현상 속 본질을 꺼내 세상을 감동시키는 인연담이다.

영화 ‘파파로티’, 참으로 오랜만에 흐뭇한 영화 한 편을 봤다. 파리에 있을 때 한 2년 남짓 아르바이트로 음악잡지 ‘객석’의 특파원 노릇을 하며 봤던 오페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는 조폭 일당의 꼬마 대장이 감히 성악가가 되려고 한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화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주먹 쓰는 조폭이 성악을 한다?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인데, 게다가 이 조폭은 아직 나이 20살도 채 안 먹은 고3 학생이다. 요즈음 고등학생들이 무서운 것은 세상이 다 알지만, 영화 속에서 이 고3 조폭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주먹질만 하는데 상당한 싸움 솜씨와 담력을 가진 덕에 장래 보스가 될 재목으로, 흔히 말하듯 ‘전도유망한’ 조폭이다. 전도유망? 그래봤자 물론 깡패에 지나지 않는다(어쩌면 이 글을 조폭들이 읽으면 필자인 나는 칼을 맞지는 않더라도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기다리던 주먹들에게 한 대 제대로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런 주먹이 있다면, 때릴 때 때리더라도 내 글을 다 읽고 나서 때리시길).

하지만 영화 ‘파파로티’를 조폭이 성악가가 되는 이야기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조폭 영화도, 성악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170만명의 관객들 상당수는 이 영화를 성악영화로 봤을 것이고 그래서 감동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또 그래서 입소문도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한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 그 못지않게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아리아 “그리고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 또 영화 후반부, 세종 콩쿠르 장면에서 조폭들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지각한 채 장호가 부른 “네순도르마(Nessundorma, 아무도 잠자지 않고)”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다. 거의 대중가요 수준으로 유명한 아리아들이지만, 영화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곡일 수도 있었다. 500만, 1000만 관객을 끌어들이기에는 어려웠다.

조폭 영화도, 성악 영화도 아니라면 ‘파파로티’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이미 답을 얻어 가졌을 것이다. 이 영화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룬 영화이며 나아가 혈연이 아닌 전혀 다른 연으로도 얼마든지 인간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혈연 이외의 다른 연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조금 확대 해석하면 이 영화는 불가에서 말하는 출가(出家)를 다룬 영화로 봐도 무방한 것이다.

조폭 고교생의 성악 도전기
참스승과 제자의 인연 다뤄

조폭세계서 제자 빼낸 스승
불성 깨우듯 능력 일깨워
청아한 목소리 세상을 울려

매력적인 배우 이제훈이 역을 맡은 고3 조폭이자 성악가를 꿈꾸는 장호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떠난다. 장호는 물론 성공해서 돌아온다. 유학을 떠나는 장면을 조금 유심히 보자. 등에 가방을 맨 장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스승인 상진(한석규 분)과 이별을 하고 항공권을 소지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선을 넘는다. 그 때 장호는 돌연 등에 맨 가방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더니 넙죽 엎드려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스승 상진에게 큰절을 올린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눈가에 엷은 이슬 같은 것이 맺히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이제 막 제대를 한 아들과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절은 아무에게나 하는 인사가 아니다. 아버지나 조상 혹은 스승에게나 하는 절이 큰절이다. 탑승 직전에 장호가 올린 큰절은 이제 장호와 상진이 사제지간이 아니라 부자지간임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일러주는 장면이다. 영화 제목은 ‘파바로티’가 아니라 ‘파파로티’다. 즉 이미 영화의 제목 속에 아버지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감독은 짓궂게도 이 장면에서도 장난기를 발동해 장호의 신발을 벗긴다. “비행기를 타면 말이야, 신발을 벗어야 돼.” 스승 상진이 공항에서 장호에게 해준 말이다. 국제선 비행기는 고사하고 경비행기조차 타본 적이 없는 시골 고3 조폭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는다…….

왜 이 장면이 필요했을까? 사제지간이 부자지간으로 격을 달리하는 것은 자칫 신파조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감독은 관객들의 얼굴에 잠시 미소를 짓게 함으로써 이 신파의 위험을 벗어나려고 한 것인데, 그러면서 동시에 사제지간이 부자지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넌지시 암시한 것이다. 코믹 터치로 살짝 숨김으로써 큰절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허허실실 전략을 쓴 셈이다.

상진은 장호의 재능을 알아봤다. 예인들에게만 있는 예리한 감각으로 어린 장호의 목소리를 알아본 것이다. 동시에 상진은 꿈에 부풀어 있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병으로 포기해야만 했던 성악가의 꿈을 떠올렸다. 예인들은 예리한 이들일수록 대부분 질투심도 강하다. 판소리만 한으로 하는 노래인 것은 아니다. 상진은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장호의 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 굳힌 상진은 장호를 거둬 꼬마 두목으로 삼은 진짜 조폭 대장을 찾아간다. “피아노 반주를 해야 하니 내 두 손모가지는 못 내놓겠소. 정 원한다면 내 두 발목을 자르시오. 그리고 그 대가로 장호를 놓아주시오.” 상진이 두목에게 건넨 말이다.

상진은 장호를 구하러 간 것일까? 아니면 장호가 갖고 있는 재능을 구하러 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호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어보려고 한 것일까? 두목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한다. 두목의 반응은 관람객들의 반응에 다름 아니다. “조폭 새끼가 노래를 한다고?”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장호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러던 중, 두목 바로 밑의 큰 형님뻘 되는 조폭 창수(조진웅 분)가 싸움에 휘말려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연락이 온다. 장호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차를 몰아 창수 형님을 구하러 달려간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가 펼쳐지는데, 장호는 칼 맞은 창수 형님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가는 도중 불을 붙여 담배 한 대를 건넸다. 그러나 창수 형님은 한 대를 피우지도 못한 채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죽기 전에 창수 형님이 농담을 하나 건넨다. “노래한다고 담배 끊었다더니…….”

형님은 장호를 거두어 조폭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면서 충고도 잊지 않았었다. “한 번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뺄 수가 없다.” 그러던 형님이었지만 장호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형님은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다 달려온 막내 동생 같은 장호를 만났을 때.

장호를 먼저 거둔 것은 조폭이었다. 장호는 조폭 지붕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출가였고, 성악가가 되기 위해 음악 스승을 만나 가족이 되고 스승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두 번째 출가보다 먼저 있었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조폭인가! 영화의 상징성을 떠나 이야기한다고 해도 조폭이라고 모두 비루한 인생을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에는 그럴듯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조폭보다 더 야비하고 비겁한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이 장면에서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은 장호의 심성, 즉 형님을 구하러 한달음에 달려온 그의 심성이다. 장호는 남자였던 것이다. 성악가이기 이전에, 조폭이기 이전에. 음악 선생 상진이 장호의 노래를 위해 죽은 각오를 했듯이 장호는 남자이기 위해, 아니 인간이기 위해 죽을 각오로 형님에게 달려간 것이다.

재능에 대한 경외는 그 재능을 갖고 있는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을 넘어선다. 이 때 재능은 빛이 되어 온누리를 비출 수 있다. 이 빛은 세속의 성공이 아니다. 하지만 이 빛보다 더 환한 빛이 있다. 죽어가는 조폭 형님에게 달려간 장호, 그 형님에게 담배를 붙여 물리는 장호, 발목을 내 줄 테니 제자를 돌려달라는 스승의 용기,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아들이 된 제자……

출가란 무엇인가? 집을 떠나는 것이다. 집은 무엇인가? 안락한 보금자리이겠지만 동시에 얼마든지 편협할 수 있는 협착한 공간이다. 피가 핑계일 수 있고 명분이 되어줄 수도 있다. 끼리끼리 봐주고 끌어주는 패거리 문화, 고용세습을 주장하는 노조는 협착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잘못된 집이다. 이 집을 떠나야 한다. 아니 부수어야 한다. 이 세상과 나의 관계는 오히려 내가 없는 세상과 나의 관계로 인해 의미가 주어진다.

그래서 출가하고 몸을 벗고 연을 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없는 세상에도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일 것이다.

출가는 몸과 집을 벗어나는 것이다. 상진은 장호를 아들로 받아들여 같이 밥 먹고 고스톱도 친다. 상진의 꼬마 친아들은 장호를 형이라고 부른다. 장호는 그래서 상진에게 큰절을 올린 것이다. 공항에서. 그는 큰절을 드림으로써 ‘큰절’로 들어간 것이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중생 만인이 모두 보살이다. 모든 인간은 성불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먼저 깨달음을 얻은 자는 아직 미망에 사로잡혀 사는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자신의 깨달음을 타인에게 열어놓는다.

조폭형님 창수와 두목은 조폭의 문하를 떠나려는 장호를 놓아주었다. 그 장호를 받은 상진은 서원과 회향을 통해 세상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애도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파바로티가 죽었을 때는 세상 전체가 그를 애도했다. 그 때 부른 노래가 네순도르마이다. 파바로티가 떠나고 없는 세상이지만 그의 노래는 그대로 남아 지금도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파바로티 못지않게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꼬마 조폭을 가수로 만들고 급기야 아들로 삼기까지 한 ‘파파로티’다. 스승이 몹시도 그리운 오늘이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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