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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보살관

멈춰 선 성불보다 실천하는 보살이 필요

▲ 그림=김승연 화백

보살은 부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이며 세상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는 구원자다. 누구든지 부처가 되기를 서원했다면 반드시 보살의 길을 밟아야 한다. 보살의 길은 바라밀의 실천에 있다. 바라밀은 ‘방편’과 ‘완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보살이 행해야 할 실천덕목이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자비·출리·결단·서원 등 열 가지를 비롯해 자신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갖가지 행위들이다. 부처님이 불과에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은 바라밀의 실천을 통한 보살도에 있다. 단순히 계행과 선정과 명상을 닦아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보살도를 닦았기 때문이다. 아라한과 부처가 번뇌를 멸진하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라한을 부처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보살도를 통한 공덕을 구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 부처가 되기 위해 결심한 시간만 9띤쩨이였다. 1띤쩨이는 10의 140제곱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그 뒤로 부처님이 부처가 되겠다고 남들에게 말로 한 시기가 7띤쩨이, 바라밀을 행하면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동한 시기가 4띤쩨이, 여기에다 우주의 성주괴공이 10만 번 되풀이 되는 과정을 더 보태어 바라밀을 닦은 끝에 마침내 부처로 세상에 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불교 보살은 인간 속성
대승의 보살은 부처와 동격

초기불교는 성불로 끝나지만
대승은 성불 이후 보살의 길

성불 목표로 보살행 권함은
모든 중생 성불 가능함 의미

초기불교에서 보살은 부처를 이루기 위해 바라밀을 실천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본생담’이나 ‘대방광장엄경’과 같은 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수행자 시절을 보살로 부른다. 초기경전에는 많은 보살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 시대에 한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살도 특별한 시대 특별한 장소에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출현한다는 미륵보살이 대표적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번뇌를 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대해서만 가르칠 뿐 보살이 되어 중생들을 구제하고 미래세에 부처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누구도 부처님 앞에서 자신도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상좌부 불교에서도 간혹 성불을 목적하는 수행자들이 있기는 하다. 어찌됐든 초기불교의 보살관은 보살에 대한 신심이나 존경심을 갖기 힘든 구조다. 부처님이 곧 보살도의 완성자이기 때문에 부처님 한분에 대한 존경심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보살은 부처를 이룸과 동시에 종식되는 과거형의 인물이다. 바라밀을 행하여 공덕이 충족해지면 부처를 이루게 되고 보살이 부처를 이루면 보살의 활동은 끝이 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보살은 그렇지 않다. 보살이 부처가 되었다 해도 보살행이 끝나지 않고 중생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미래에도 계속된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항상 활동하는 삼세형 인물인 것이다. 보살의 종류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지전보살(地前菩薩)이다. 수행을 하고는 있지만 어떠한 수행의 결실도 맺지 못한 보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수행단계로 열 가지를 둔다. 이를 보살십지라 하는데 지전보살은 첫 단계인 초지에도 오르지 못한 수행자이다. 둘째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다. 초지에서 십지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보살이다. 셋째는 권현보살(權現菩薩)이다. 대승보살의 극치로 십지를 통과해 수행을 완성한 부처가 부처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몸을 나타낸 보살이다. 관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이 이에 속한다. 앞의 지전보살과 지상보살들이 범부의 보살들이라면 권현보살은 성현의 보살들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보살로 호칭되지만 경지는 부처님과 동격이다. 권현보살은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 내재하는 갖가지 공덕과 위신력을 인격화 해 만들어진 방편적 존재들이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내재하는 지혜를 인격화한 것이며 관음보살은 자비를 인격화 한 것이다. 만약 부처의 깨달음 속에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공덕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보살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대승불교의 관점이다. 일부 상좌부 불교수행자들의 생각처럼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힌두의 신들이 아니다. 누구라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면 모두가 권현보살이다.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만 권현보살이 아니라 중생 모두가 권현보살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른 권현보살의 의미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공덕은 육신이 소멸한다고 해서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무위(無爲)이며 또한 불괴(不壞)이다. 그렇다면 보살과 바라밀, 그리고 보살들의 행위도 사라져서는 안 된다.

초기불교의 보살이 인간의 속성을 띤다면 대승불교의 보살은 부처의 속성을 띤다.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성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불에서 다시 보살로 회향한다는 점이다. 성불은 곧 보살의 적극적 활동인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석가모니 보살이라 호칭한다고 해서 하등 달라질 것이 없다. 대승불교의 보살관은 보살에 대한 서원과 신심을 발하도록 요구한다. 중생들에게 성불을 목표로 보살도를 닦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 특정한 인물만이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도에 귀의한 모든 중생들이 다 보살이 되기를 원한다. 부처님께 귀의하듯 시방의 모든 보살도를 걷는 이들에게 귀의할 것과 공양예배 할 것을 당부한다.

보살은 세상에 필요한 인물이다. 세상은 성불에 그친 사람보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원한다. 부처님의 전생인 선혜동자와 부처님의 권화보살인 문수동자 과연 다른 인물이었을까?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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