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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단개혁 조력자 - ① 일반 언론

‘한겨레’ ‘경향’ 앞장서 여론 주도…개혁세력 절대적 우군

▲ 한겨레신문을 중심으로 한 일반 언론들은 1994년 종단개혁의 최대 조력자였다. 그들이 양산한 수많은 기사들은 개혁세력 내부에서조차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붕괴시킨 토대가 됐다.

언론은 여론을 형성하고 이끈다. 언론이 무관의 제왕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보도는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중심축이 되기도 한다. 1994년 조계종 개혁의 최대 후원자도 언론이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 않았다. 의현 스님은 종단의 행정과 입법, 사법 등 모든 권한을 틀어쥐었다.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공권력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처음 종단개혁을 시작할 때 개혁세력 내부에서조차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회의적 반응이 나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론의 힘은 강했다.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붕괴시켰다. 언론에 보도된 의현 스님의 부도덕성은 대중을 분노케 했고 종단 원로와 학인 스님, 재가불자들이 개혁에 동참하게 한 도화선이 됐다.

종단개혁 이전까지 조계종을 향한 언론의 시선은 싸늘했다. 1970~80년대 조계종은 종권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 이권을 둘러싼 문중 갈등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대부분 언론들이 종단개혁을 종권다툼의 연장선으로 봤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한겨레)의 관점은 달랐다. 다수 언론들이 조계종을 외면했던 것과 달리 한겨레는 종단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봤다. 한겨레가 종단개혁세력들과 친분관계가 두터웠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1970~80년대 보수언론에서 해직된 언론인들과 사회민주화를 이끌었던 세력에 의해 1988년 창간됐다. 한겨레는 태생적으로 민주화운동에 함께 나섰던 진보 성향의 스님들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
일반언론 보도로 드러나자
사부대중 분노…개혁 나서

개혁기간 동안 한겨레신문
조계종 뉴스만 총 237꼭지
11일간 1면 톱기사로 다뤄
한국언론사서 드문 사례

‘종권다툼’ 치부하던 언론도
한겨레 ‘폭력배 동원’ 특종에
‘종단 개혁’으로 논조 변경
기사 내용·관점은 평가 필요

전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 사무처장 법안 스님은 “종단개혁에 참여했던 많은 스님들이 한겨레와 가까웠다. 그러나 친분을 떠나 한겨레 역시 종단 집행부의 부정과 구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법안 스님은 총무원 기획실장을 맡고 있던 2005년 7월18일 “종단개혁 때 진 빚을 갚으러 왔다”며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해 종단개혁에 앞장섰던 스님 15명이 모은 ‘발전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겨레는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을 부각시켜 의현 총무원장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총무원이 폭력배를 동원했다’는 특종보도로 개혁세력에게 힘을 실었다. 특히 종단개혁이 본격화 되던 1994년 3~4월 한겨레는 다른 신문에 비해 월등히 많은 기사를 보도했다. 종단개혁 과정을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본지가 1994년 3월1일~4월30일 한겨레를 비롯해 경향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의 지면을 분석한 결과 한겨레의 조계종 관련 기사는 다른 신문에 비해 2배가량 많았다. 기사와 사설, 만평, 칼럼 등을 종합하면 한겨레는 이 기간 총 237꼭지의 기사를 쏟아냈다. 같은 기간 경향이 154꼭지, 동아가 148꼭지였으며 조선은 107꼭지에 그쳤다. 기사의 비중에 있어서도 한겨레는 눈에 띄었다. 한겨레는 3월30일 ‘조계사 폭력배 난입 사건’을 계기로 4월1일부터 보름동안 총 11회에 걸쳐 ‘조계종 사태’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종교계 내부 사건이 종합일간지에 이토록 부각된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다.

한겨레는 1면 톱기사로 배치하지 않는 날에도 1면에 사진과 관련기사를 비중 있게 다뤘다. 사회면은 온통 조계종 사태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반면 이 기간 경향과 동아가 조계종 사태를 1면 톱기사에 배치한 것은 4회에 그쳤으며, 조선은 3회에 불과했다. 그나마 동아와 조선은 상무대 사건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이후에야 1면에 관련기사가 등장했다. 그들에게 종단개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언론은 조계사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와 내부비리에 무게를 두는 쪽이었다.

기사의 논조에 있어서도 한겨레는 ‘양비론’에 무게를 뒀던 다른 신문들과 달리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이는 종단개혁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한겨레가 종단을 바라본 시각이었다. 실천승가회가 제시한 종단개혁안이 종회에서 다뤄지지 않자 한겨레는 ‘조계종 개혁안 종회처리 또 미뤄’(1월23일자 9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총무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향후 실천승가회 등이 본격적으로 개혁에 나설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1994년 3월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이 논란이 되자 한겨레(1994년 3월22일자)는 ‘박정희 정권의 3선’을 빗대 의현 스님을 힐난했다. 여기에 상무대 의혹사건이 불거지자 한겨레는 의현 총무원장의 연루 의혹을 꾸준히 제기하면서 개혁 명분을 차곡차곡 쌓게 했다. 이같은 일련의 한겨레 기사들은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등 개혁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종단개혁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럼에도 의현 총무원장의 종단 내 입지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3월29일 의현 총무원장은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이날 의현 총무원장의 3선 강행을 막기 위해 범종추가 조계사에서 구종법회를 열자 이들을 강제해산하기 위해 총무원 집행부는 경찰과 함께 괴청년들을 동원했다. 조계사 경내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졌고, 다음 날 한겨레는 이를 주요 기사로 다뤘다. 스님들이 경찰에 질질 끌려 나가는 사진과 함께 1면, 사회면(19~20면)에 걸쳐 이 소식을 집중 보도했다. 특히 한겨레는 “이 사건은 상무대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을 둘러싼 종단 지지파와 개혁세력 간의 대립”이라며 “경찰이 투입된 것은 공권력이 서 원장을 간접 지원한 것으로 비난이 클 것”이라고 개혁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언론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경향은 이날 사회면(23면)을 할애해 ‘조계종에서 유혈 난투극이 발생했다’는 소식만 다뤘다. 제목에서 ‘개혁’이라는 용어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총무원장 3선을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의 유혈충돌”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다음날 사회면에서도 이번 사건이 ‘조계종의 내분’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심지어 경향은 조계사 현판을 ‘소림사’로 표현하고 ‘동방제일무협도량’이라는 제목을 단 만평을 1면에 배치했다. 스님들이 각목을 들고 조직폭력배처럼 서로 싸우는 그림을 통해 당시 상황을 종권다툼으로 인식하게 했다. 동아·조선도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한겨레의 날선 비판은 계속됐다. 3월30일 중앙종회가 의현 스님의 3선을 가결하자 “개혁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3월31일자)이라고 보도했고, 사설과 사회면을 통해 ‘범종추의 3선 무효 주장’을 부각시켰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했다’는 한겨레의 단독보도는 종단개혁의 큰 반전이었다. 한겨레 보도 이전까지 의현 스님은 ‘괴청년 동원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었다. 의현 스님은 3선 가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범종추 스님들이 총무원을 에워싸고 있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 폭력배를 동원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4월1일자 1면 톱기사로 “3월29일 조계사에 난입한 괴청년들은 총무원이 고용한 조직폭력배였다”고 대서특필했다. 조직폭력배가 묵었던 호텔 숙박비를 총무원 규정부 소속 무성 스님이 지불했으며 이들이 모의 훈련까지 진행했었다는 사실도 전했다. 폭력배가 호텔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서울 종로경찰서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도 보도하면서 총무원과 공권력의 유착관계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여론은 급반전됐다. 총무원 집행부의 부도덕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면서 사회곳곳에서 의현 스님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여기에 총무원과 공권력간의 유착 의혹은 최형우 내무부장관의 사퇴요구로 이어졌고, 청와대로 비난이 쏠리면서 정치권의 새로운 이슈가 됐다.

그동안 조계종의 종권다툼으로 바라보던 언론들도 종단개혁세력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향은 4월5일자 1면 보도에서 처음으로 ‘종단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서 총무원장의 퇴진 불가피”라는 제목으로 의현 스님을 비판하고 나섰다. 3면에서는 “종단개혁이 대세”라며 개혁의 중심에 섰던 범종추를 소개했다. 이후 경향은 한겨레와 함께 종단개혁 세력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이 시기 한겨레와 경향의 만평 대결은 세간의 화제였다. 한겨레 박재동 화백과 경향 김상택 화백의 신랄한 만평은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의현 스님의 정권유착을 풍자한 박재동 화백의 ‘법력’ 시리즈는 개혁여론 형성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박재동 화백은 4월10일 종단개혁 20주년 기념법회에서 영상메시지를 통해 “종단개혁이라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면서 신명나게 그림을 그렸다. 맑은 물결이 흘러나와 탁한 것을 이겨내고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굉장한 희망을 가졌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때때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의현 총무원장도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개혁세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4월13일 새벽, 그는 결국 총무원장직 사퇴를 선언하고 종단 권력의 핵심에서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한겨레를 중심으로 한 일반 언론들이 1994년 종단개혁의 최대 조력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이 쏟아낸 수많은 기사들의 관점과 내용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훗날 역사학자나 사회학자의 연구과제가 되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1호 / 2014년 4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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