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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종단개혁 조력자 - ② 교계언론

‘법보신문’ ‘주간불교’ ‘승가대신문’ 등 종단 개혁흐름 주도

▲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이 세간의 여론을 이끌었다면 법보신문과 주간불교신문, 승가대신문 등 종단 내부의 개혁 흐름을 주도했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이 세간의 여론을 이끌었다면 교계언론은 종단 내부의 개혁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법보신문과 주간불교신문(주간불교), 승가대신문 등은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과 종단의 구조적 모순을 집중부각하면서 개혁 여론을 이끌었다. 개혁세력들이 종단개혁에 본격 착수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언론이 종단개혁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종단의 모든 권한은 의현 스님에게 집중돼 있었다. 전국 주요 사찰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비판은 쉽지 않았다. 불교신문과 불교방송도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적극 옹호했다. 특히 불교신문은 종단개혁 당시 의현 총무원장의 최대 우군이었다. 종단 안팎에서 제기된 개혁요구를 외면한 채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적극 두둔했다. 물론 종단 기관지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신문의 ‘의현 스님 미화보도’는 개혁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가져왔고, 때론 개혁의지를 꺾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교신문의 의현 스님 미화보도는 3월29~30일 개혁세력의 구종법회와 중앙종회의 3선 확정 보도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날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들은 ‘총무원측이 동원한 공권력과 폭력배로 개혁세력들을 무참히 폭행당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불교신문은 철저히 총무원 편에 섰다. 불교신문은 4월6일자에서 ‘27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 선출’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날 중앙종회는 57명이 출석해 여법하게 진행됐으며, “종단개혁을 순리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현 스님의 당선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개혁세력들이 진행한 구종법회에 대해서는 ‘폭력사태’로만 언급했다.

불교신문은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3선 의미’라는 해설기사도 크게 다뤘다. 이를 통해 “의현 스님의 3선은 뛰어난 지도력과 추진력이 높이 평가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불교 CATV, 불교종합병원 건립 등 쉽지 않은 불사를 이뤄내기엔 의현 스님만한 총무원장이 없다”고도 칭송했다. 그러나 개혁세력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범종추, 총무원청사 폭력 난입’이라는 사회면(11면) 보도에서는 범종추를 가해자로, 총무원을 피해자 관점에서 보도했다. ‘현장 화보’에서도 범종추 스님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의현 스님이 당연직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불교방송 논조도 불교신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신문(1994년 4월5일자)에 따르면 불교방송은 3월29일 사태와 관련해 범종추 스님들을 ‘폭력승려’로 비난했고, 총무원 측을 옹호하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두 언론은 개혁세력들과 많은 불자들의 분노와 항의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불교신문은 4월6일자를 끝으로 2주간 발행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었다. 개혁회의 출범과 동시에 재발행된 불교신문은 “언론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채 편파보도로 일관한 점에 대해 참회한다”는 내용의 공개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종단기관지 한계 보인
불교신문 보도와 달리
법보신문 등 교계언론
개혁세력의 최대 우군

“법보신문 개혁에 올인”
사주 폐간명령 불응하며
‘편집국 뉴스’ 호외 제작
논조 대해선 비판도 많아

승가대신문·주간불교도
의현 총무원장 비판하며
종단개혁 선도적 역할

이 무렵 종단개혁세력을 대변한 것은 법보신문과 주간불교, 승가대신문이었다. 불국사에 의해 창간된 법보신문(2005년 독립)은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당시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가 발행한 ‘범종추 뉴스’ 편집장 법인 스님은 “법보신문은 종단개혁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범종추 뉴스’ 원고의 상당수를 법보신문 기자들이 작성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법보신문은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등 진보 단체의 활동에도 주목했다. 이를 통해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법보신문의 의현 스님에 대한 비판은 집요할 정도였다. 1994년 1월부터 법보신문은 ‘개혁’과 ‘종권교체’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신년 사설을 통해 ‘새로운 불교운동’을 강조한 뒤 매주 종단 개혁에 대한 기사들로 채웠다. 중앙종회가 실천승가회의 ‘제도개혁안 청원’을 또 연기하자 1월24일 3개 면을 할애해 총무원과 중앙종회를 비판했다. 실천승가회의 ‘조계종 집행부 퇴진 투쟁 선언’을 1면 주요기사로 다뤄 종권교체가 시대적 과제임을 부각시켰다.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석림동문회, 전승련 등 승가단체가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결성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식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법보신문은 한발 더 나아가 ‘종권교체 여론 곳곳서 표출’이라는 해설 기사를 통해 ‘의현 총무원장 퇴진 운동’이 곧 확산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 시기 법보신문의 보도 양과 논조는 다른 신문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법보신문이 종단개혁에 올인하다시피 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주간불교의 논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앙종회가 실천승가회의 청원을 거부하자 이를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이를 통해 “종회가 재야단체의 개혁열망을 또 외면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1994년 1월25일자) 의현 총무원장이 3선 추진을 앞두고 불교신문과 가진 신년회견에서 대해서도 비판적 논조를 유지했다.(3월8일자) 의현 스님이 ‘종단의 혼란 원인이 일부 본사 주지 스님들 때문’이라고 하자 “이들로부터 도덕적 우위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제기되고 있는 여러 의혹들을 먼저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정대철 민주당 의원이 제기한 상무대 비리의혹은 의현 스님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총무원에 비판적이던 법보신문은 이를 대서특필 했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재야단체들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뤘다. 의현 스님의 부도덕성이 부각될수록 여론도 종단개혁 쪽으로 기울어졌다. 실천승가회는 3월16일 전국의 스님과 재가자 6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조계종 개혁 절실하다’는 답변이 95%, ‘총무원장 3임 반대’가 86.6%였다”고 발표했다. 법보신문은 이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3선 연임을 준비하고 있던 의현 스님에게는 치명타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조는 법보신문에게도 시련을 안겼다. 당시 발행인 종원 스님(불국사 주지)은 1주일 뒤 돌연 법보신문 폐간을 선언했다. 당시 종원 스님과 의현 총무원장은 공생관계였다. 종원 스님은 불국사 최고 실력자였던 종상 스님을 밀어내고 불국사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종상 스님은 법보신문 창간을 주도한 인물이었으며 1991년 7대 종정 선출을 두고 의현 총무원장과 대립하기도 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종상 스님을 몰아낸 종원 스님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법보신문의 폐간은 예견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법보신문의 폐간 소식은 의현 총무원장에게 오히려 큰 부담이 됐다. 의현 스님을 비난하는 교계 여론이 확산됐다. 이런 여론에 힘을 얻은 법보신문은 자체적으로 ‘편집국 뉴스’를 호외로 발간했다. 사주의 폐간명령에 불응해 편집국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간한 것은 교계 언론사에서 유례가 없던 일이다.

최승천 전 법보신문 편집부장은 “폐간 명령으로 편집국 분위기는 침체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권준, 이상배, 이수찬 등 젊은 기자들이 의기투합을 했다. 종단개혁이 한창인데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배기자들도 뜻을 모았고 교계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편집국 뉴스를 만들게 됐다”고 술회했다.

이 무렵 중앙승가대 학보인 ‘승가대신문’은 종단개혁 상황을 전하는 교계 ‘연합통신’이었다. 서울 개운사에 위치했던 승가대신문 사무실은 ‘프레스 센터’로 활용됐다. 종단개혁에 무관심했던 일반여론들이 개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승가대신문 기자들이 만들어 낸 보도자료 덕분이었다. 3월29일 새벽 발생한 조계사 폭력사태에 총무원이 개입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은 것도 승가대신문 기자였다. 이날 새벽 총무원은 개혁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폭력배를 동원했다. 규정부 계장 고모씨는 직접 폭력배를 진두지휘했다. 이 장면이 당시 승가대신문 편집장 지환 스님의 카메라에 담겼다.

지환 스님은 “이날 새벽 폭력배가 들어올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조계사 해탈문 뒤에서 잠복했었다. 6시15분 쯤 총무원 청사에서 갑자기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기 시작하더니, 약속이나 한 듯 폭력배들이 들어와 스님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그 안에 고 계장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고 밝혔다.

스님은 촬영된 사진을 모든 언론사에 긴급 타전했다. 여론은 급반전됐다. 이때까지 ‘종권다툼’으로 봤던 대부분의 일반 언론들은 총무원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면서 의현 스님을 압박했다. 결국 종단의 최고 실력자였던 의현 스님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1994년 종단개혁은 교계언론들과 일반 언론들이 만들어 낸 성과물이었다. 특히 사주의 폐간 압박에도 ‘편집국 뉴스’ 발간한 법보신문은 종단개혁의 1등 공신 중 하나다. 그럼에도 법보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불국사의 최고 실력자로 꼽혔던 종상 스님이 의현 총무원장의 최대 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법보신문의 논조가 객관적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2호 / 2014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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