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고통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피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고통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피
  • 법보신문
  • 승인 2014.04.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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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 사장상(우수상)-조정육

10억 주고 산 부처님

우리는 모두 손에 귀한 보물을 들고 산다. 문제는 손에 든 보물이 보물인 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적어도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다. 어쩌면 지나치게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한 지 4년 만에 운 좋게 37평 아파트가 당첨 됐다. 주택청약예금에 가입해 1순위가 되자마자 응모한 아파트가 당첨 된 것이다. 중도금은 운영 중이던 카페에서 벌어서 충당했다. 평생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리 부부는 자립을 목적으로 충무로에 카페를 차렸는데 처음 원두커피가 보급되던 90년대 초반이라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됐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남들이 겪는 어려움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인생이 순탄하게 흘렀다.

평범하게 살던 내가 지옥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결혼 후 7년째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언니가 전화를 해서 여윳돈이 있으면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했다. 아파트 대출금도 다 상환했던 터라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솔깃해 그 동안 벌어놓은 돈과 카페 판 돈 전부를 언니한테 주고 남편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원입학 준비를 시작했다.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서였는지도 모른다. 언니가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의심 없이 아파트를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언니에게 돈을 보냈다. 너무 쉽게 얻은 집이라 그 집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 거기까지였더라면 이후의 삶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한 번 눈이 멀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 당시 나는 꼭 뭐에 씌운 사람 같았다. 나는 언니가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시아버지가 노후자금으로 모아둔 돈 1억을 투자했다. 다음에는 시아버지의 친구 분이 1억을 투자했고 다음에는 시고모가, 시외숙모가, 시동생이 줄줄이 엮였다. 심지어는 박사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러 다닌 학원의 동료까지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모두 언니한테 돈을 투자했다. 난 그들을 언니에게 소개만 해주고 빠졌다. 원래 셈을 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직접 돈을 보내고 이자를 주고받으며 가끔씩 내게 안부전화를 하며 서로가 만족해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그런 어느 날부터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나한테 오는 이자가 늦어지더니 나를 통해 언니한테 돈을 놀린 사람들의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언니한테 이자를 제대로 받을 때는 연락 한 번 안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부 내게 전화를 해서 이자를 달라고 독촉 했다. 그들이 내게 전화한 구실은 딱 한가지였다. 만약 언니가 돈을 못 갚으면 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한 말 때문이었다. 차용증을 써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나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그까짓 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되나 싶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전셋집을 월세로 돌리고 사람들에게 언니 대신 이자를 보냈다. 그 돈으로 부족하자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자를 보냈고 나중에는 10개 가까운 카드에서 돈을 빼서 돌려막기를 했다. 돈은 벌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3부를 주던 이자를 2부로 낮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져도 줄 수 없게 됐다. 이자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원금을 갚으라고 계속 독촉 전화를 했다. 집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나를 고소한 사람도 있었다. 사업을 전혀 몰랐던 나는 언니만 믿고 꾹 참았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무리하게 사채를 끌어다 부동산에 투자했던 언니는 결국 파산했고 빈털터리가 됐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언니가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는 이미 은행에서 더 이상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그나마 사채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은 상태였다. 당시 부동산투자로 대박을 꿈꾸던 사람들의 전형적인 투기 심리였다. 그 지경이 됐으면 혼자 망할 것이지 왜 동생까지 끌고 들어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언니의 행동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결국 알거지가 된 언니는 이혼을 했고 내림굿을 받아 신딸이 됐다. 이제 언니가 갚아야 할 빚이 전부 내 차지가 됐다. 거의 10억 가까운 돈이었다. 1997년 겨울, 내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1년 사이에 일어났다. 나는 그 1년 동안 가진 것을 다 잃었다. 모든 것이 꿈같고 남의 일 같았다. 내 집을 잃고 돈이 없어 허덕이는 것도 억울한데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돈이 전부 내 빚이 되어 있는 기막힌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는 언니가 원망스러웠다. 내 말 한마디에 확인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돈을 투자한 사람들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때부터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나는 감정기복이 심해졌다. 갑자기 기분이 날아갈 듯 행복한가 하면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어딘가 숨고 싶었다. 느닷없이 가슴이 벌떡거리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창 밖에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곧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집안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만 인생을 끝내고 싶었다. 죽고 나면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아이들만 남겨두고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정말 엉뚱한 생각이 스쳐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공부 때문에 생겼으니 공부나 실컷 하고 나서 죽자는 생각이었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돈이고 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물거품 같은 돈에 목매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바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한 번 공부에 필이 꽂히자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다.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고 고소를 당해 법원에 불려가면서도 시험 준비를 계속했다. 그렇게 1년을 준비한 끝에 둘 다 시험에 합격했다. 둘 다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우리는 캐피탈회사에서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마련했다. 빚은 갚지 않으면서 둘 다 학교를 다니는 우리를 보고 빚쟁이들이 사기꾼 취급을 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부처님과의 만남

박사과정에 들어간 후 여러 학교에 강의를 나갔다. 책도 여러 권 썼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남편도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나 빚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몸은 더 지치고 피곤했다. 또 다시 회의가 밀려왔다. 무책임한 언니와 미련한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현실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내가 쓰지도 않은 돈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다 아는 선생님의 소개로 강남에 있는 능원선원 불교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원래 무엇을 한 번 하면 끝장을 보는 타입이었다. 고통의 해답을 얻기 위해 시작한 공부인 만큼 독하게 몰입했다. 기도를 하면 가피를 입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영험담에도 귀가 솔깃했다. 경전을 읽고 사경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절과 염불을 했다. 어느 새 나의 아침은 천수경으로 시작해서 절과 참선으로 이어졌다. 가끔씩 인연 있는 절에 가서 철야정진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난 죄는 언니가 빚을 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개입돼 있었다. 언니를 통해 나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모든 결과가 나의 어리석음에서 온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원인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불교는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언니에 대한 미움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못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깨달음 뒤에도 수행을 계속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로소 불교공부가 내 삶의 중심이 됐다. 이제 어떤 곤란을 겪어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공부에 더욱 속도를 냈다. 공부방에 모셔놓은 부처님 앞에 앉아 한참동안 염불을 하고 있으면 사방에서 향내가 날 때도 있었다. 염불을 하면 시방세계에 계신 화엄성중이 엄호해주신다는 가르침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나의 공부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본 사람의 과거도 그림처럼 읽혀졌다. 때로는 꿈에 이름을 들었던 사람을 현실에서 직접 만날 때도 있었다. 부처님 시대에 여러 수행자들이 신통을 부렸다는 얘기가 거짓이 아니었다. 점점 수행에 재미가 생겼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도 부처님처럼 천안통, 숙명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당들이나 하는 짓인 줄 모르고 확철대오인 줄 알았다. 그러다 우룡 스님의 책을 읽고 그것이 절대로 수행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마구니라는 것을 알았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공부가 중요하지 귀신을 보고 신통을 부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경계해야 할 과정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공부했다.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던 호기심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어렵사리 돈을 모아 불교 성지를 돌아다녔다. 우리나라의 절과 탑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등의 불교유적지를 끊임없이 다니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특히 현장법사가 부처님 법을 구하기 위해 모래사막을 뚫고 인도로 향한 실크로드는 감동적이다 못해 전율이 왔다. 내가 언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반성이 됐다. 인도에 갔을 때는, 뜨거운 햇볕 속을 오로지 중생의 무명을 거둬주기 위해 맨발로 걸어오신 부처님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의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렇게 불교를 공부하면서 나는 조금씩 변화됐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 동안 나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갔다. 15년 동안 25권의 책을 썼다. 얼마나 타자를 많이 쳤던 지 인대가 늘어나서 아침이면 손가락이 굽어지지가 않는다. 비록 부처님은 내게 10억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10억보다 더 가치 있는 깨달음을 주셨다. 만약 내게 죽음 직전까지 내몰릴 만큼 힘든 일이 없었다면 부처님 법을 공부할 마음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을 10억 주고 샀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그렇게 비싼 돈을 지불하고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다.

뇌종양 수술과 보물의 발견

이제는 어떤 고난이 와도 모두 다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 큰 사건이 발생했다. 2012년 1월이었다. 언젠가부터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뇌종양이란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공부가 좀 된 것일까. 뇌종양이란 말을 듣고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담담했다. 내게 죽음은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생에 살든 저승에 살든 중요한 것은 탐진치를 벗어난 삶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부모님 먼저 땅에 묻히는 불효는 저지르지 않아도 됐다. 두 아들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책을 스승 삼아 살아가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뇌종양 선고를 받고 수술 날까지 딱 보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동안 나는 염불을 하면서 긴 여행을 준비했다. 염불은 나를 위해 미리 사십구재를 지내는 예수재(豫修齋)나 다름없었다.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수술 전날 밤까지 약속한 원고를 쓰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불했다. 염불하는 동안 향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방안에 향내가 진동했다. 15년 동안 부처님 법을 공부한 것이 위급한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일까. 7시간에 걸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나는 다시 이 세상에서 눈을 떴다. 수술 이후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매순간이 소중했다. 기도는 더욱 맑아졌고 눈빛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다음에 만약 또 다시 병이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기도로 극복하리라 다짐했다.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뇌종양 수술을 받은 지 1년 만에 담낭암이 발견됐다. 대학 병원에 가서 수술 날짜를 잡아 놓고 집에 돌아와 기도를 하자니 지난번에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불자인데 두 번씩이나 수술에 의존해야만 되겠는가. 대의왕이신 약사여래부처님께 부탁해보자. 그런 결심으로 수술 날짜 50여일을 앞두고 염불에 돌입했다. 앉으나 서나 염불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수술을 일주일 앞둔 날, 우연히 남편이 친구한테 내 얘기를 했는데 선배 중에 담낭암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있다고 했다. 다음 날로 그 선배가 근무하는 종합병원을 찾아가 재검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선배의사가 결론을 내렸다. 많은 의사들이 혼동을 하는데 이것은 암이 아니라 그 부위가 약간 부어 있어 암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명백한 대학병원 측의 오진이었다. 나는 지금도 1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궁금하다. 대학병원 측의 오진이었는지 아니면 약사여래부처님의 가피로 암덩어리가 사라진 것인 지. 분명한 사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선배를 만난 것이야말로 진짜 부처님의 가피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오늘 나는 쉰 세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복도 많이 누렸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부처님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 부처님의 도움으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기도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뜻대로 되면 가피를 받았다고 좋아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도에 영험이 없다고 서운해 한다. 그러나 진짜 가피는 자신이 구하는 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다. ‘백천만겁난조우’한 부처님 법을 만났는데 그보다 더 큰 가피가 어디 있으랴. 지금 혹시 누구라도 내가 겪었던 괴로움과 비슷한 경우가 있다면 용기를 내시기 바란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고통이야말로 깨달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가피이기 때문이다.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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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에게 2014-05-06 06:45:41
불보살님의가피를...옴마니반메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