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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난 아내는 부처님이 내게 보내주신 관세음보살

기자명 법보신문

총무원장상(대상)-조희성

울타리가 없는 집

아내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혼자 남게 된 내 걱정을 했다. 술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젊은 날 그리도 속을 썩였건만, 아내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내 저녁거리를 걱정했다. 냉동실에 동그랑땡을 얼려 놓았으니, 한 봉지씩 꺼내서 데워 먹으라고….아내는 매장대신 간절히 화장을 원했다. 나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아내의 시신이 한줌 재로 타오르는 동안, 나는 뼈저리게 삶의 무상함을 맛보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이었다. 아내는 유난히 신록을 좋아했다. 살아생전 많이 행복하진 못했지만, 떠나는 날 만큼은 아름다웠다. 나는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문갑 안에서 자주색 지갑 하나를 발견했다. 지갑 안에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아들의 대학원 졸업식 날, 첫 손녀가 태어났던 날, 딸네 가족과 하코네 화산 온천으로 여행 갔던 날…. 온천수에 익힌 검은 계란을 들고 아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는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아픔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순간을 붙들고 싶어 하고, 싫은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삶은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일찍이, 인천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였다.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예전에 아내가 했던 말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시간이 나면 경전 사경을 하고 싶다던 아내…. 직장생활 하는 며느리와 딸을 위해 손주들을 돌보아야 했던 아내에게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사치였다. 늘 웃는 낯으로 손주들을 돌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사경 수행으로 이름난 강북의 한 사찰을 찾아갔다.

한문 법화경과의 첫 만남이었다. 붉은 표지의 두꺼운 경전을 받아든 순간,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듯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30여년간 한문을 가르쳤던 나의 경력은 아마도 이 수행을 위한 기초 작업이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주지 스님께서 사경 수행과 기도법에 대해 자세하게 일러 주셨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행여 나는 보물이 없어질세라, 경전을 두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문구점에 들러 한문노트 서른 권과 붓펜을 사면서도 나의 설렘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설렘은 딱 거기까지였다. 수행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과 실제 수행을 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었다. 산과 들을 쏘돌아 다니기 좋아했던 몸뚱이를 책상 앞에 주저앉히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젊은 날, 술을 좋아했던 대가로 얻게 된 몸의 질병들도, 무섭게 들고 일어나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내가 떠난 후에, 일상의 살림살이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70 평생, 쌀 한바가지 씻어본 적이 없던 남자에게, 세 끼 식사 준비는 험난한 도전이었다. 며느리와 딸들이 자주 반찬을 만들어 왔지만, 언제까지 내 생활을 그들의 수고로움으로 지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70대 초반, 나는 홀로서기에 직면해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보건소에서 받게 된 건강검진 결과는 나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인지능력 검사 결과, 알콜성 치매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젊은날, 두주불사로 마셔대던 과보를 기어이 받게 된 것이다. 예고된 친구처럼 우울증이 찾아왔다. 자신의 먹을거리조차 만들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걷잡을 수 없는 우울증으로 나를 점령해왔다. 아내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나의 현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부처님께서, 삶의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늘 변한다고 진작 말씀해 주셨건만, 나는 새겨듣지 않았다.

진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내 멋대로 살아온 대가는 제법 혹독했다. 노폐물 치료를 받느라 퉁퉁 부어오른 두 발은 걸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고통을 겨우 누른 채, 저녁준비를 위해 쌀독에서 쌀을 한바가지 퍼 담았다. 순간, 쌀바가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주르르 쌀이 쏟아졌다. 발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쌀알들을 주었다. 거실 바닥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참회를 했다. 술 먹는 것을 그리도 싫어했건만, 번번이 술에 취해 들어와 속상하게 한 일이, 가슴 아팠다.

마음을 가다듬고 사경을 시작했지만, 온갖 번뇌 망상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외로움, 고통, 독거노인이라는 것이 남의 이야기 인줄만 알았다. 나는 도저히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찬장을 뒤져, 기어이 술병을 꺼내고야 말았다. 어리석게도 나를 달래줄 유일한 친구가 술인 것만 같았다. 한잔 두잔 마시던 술은 과음으로 이어졌고, 몸의 고통은 두 배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무력감 속에서 음주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숙취와 두통으로 늦잠을 자고, 머릿속이 뿌연 상태로 일어났다. 술병이 어지럽게 널려진 방을 치우다가, 문득 탁자위에 놓인 아내 사진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진속의 아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내는 측은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술을 끊지 못하는 남편이 얼마나 걱정되고 한심스러웠을까?

나는 아내 앞에 들켜버린 내 모습이 부끄러워, 무작정 집을 나와 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순환선인 지하철 2호선에 올라탔다. 아무 곳에서 내려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집으로 오는 지하철을 탔다. 터덜터덜 동네 길을 걸어가는데 한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리어카 한가득 폐지와 신문지를 싣고 가는 중이었다. 노인의 키를 훌쩍 뛰어넘은 폐지 뭉치가 엄청난 무게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횡단보도 까지가 너무 멀었던지,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무단 횡단을 했다. 아들 뻘 되는 중년의 택시 기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경적을 울려댔다. 노인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미안하다는 인사를 했다. 이빨이 다 빠진 입모양이 그의 고단한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춘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잊고 산 것은 다름 아닌 감사하는 마음이란 것을….

나는 그저 나의 슬픔에만 매몰돼서,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비록 아내는 내 곁을 떠났지만, 나는 은퇴 후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들은 나를 보살펴주기 위해 많은 배려를 하고 있지 않던가? 이제 난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법화경 사경 한 페이지를 완성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사진속의 아내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갔다.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이 조금은 괜찮아졌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마음단속을 하라고 그렇게 강조를 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광화문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가서 우리말 분류 사전과 한문 사전을 샀다.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래, 이제 나는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는 거다.

수행에 간절한 마음을 내고나니, 그 다음 행보는 조금 빨라졌다. 나는 우선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해 놓기로 했다. 저녁 7시에서 9시가 가장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 후, TV를 끄고 식탁 겸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사경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번뇌 망상은 죽 끓듯 했지만 예전보다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어떤 날은 하기가 싫어, 한 페이지 쓰고, 냉장고를 열어 사과 한쪽 먹고 다시 한 페이지 쓰고, 베란다에 나가 초승달 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조급해 하지 않고 1센티씩만이라도 전진하기로 했다.

100일 쯤 지나자, 의자에 앉는 일이 예전처럼 그리 괴롭지 않았다. 그래서 중생들에겐 백일 기도가 약인가 보다. 나는 저녁 사경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 나갔다. 조금씩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 역시 차분해졌다. 그렇게 하기를 3년여…. 알콜성 초기 치매 판단을 받았던 나는, 정상 판정을 받게 되었다. 건강검진 통지서를 들고, 아내 사진 앞으로 달려왔다. 아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나는 더욱 용기가 생겼다. 내친김에 수행시간을 더 늘리기로 했다. 아침 시간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을 늘리자, 내 몸은 또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갖가지 유혹들이 마음의 틈을 파고 들었다. 저녁 수행이면 충분한데 대체 왜 그러느냐? 허리가 아파 못 견디겠다, 아침엔 집중이 안 된다 등등…. 과연 몸뚱이란 놈은 틈만 보이면 편하게 쉴 궁리를 하는 애물단지였다. 나는 몸뚱이에 져 주는 척 하면서, 한 번씩 강펀치를 날렸다. 하기 싫다고 아우성치는 날은 일부러 사경 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 평생, 마음이 주인인 줄도 모르고 몸뚱이 심부름만 하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아내에게 자랑했다. “어때? 이만하면 당신 남편, 대단한 사람이지?” 아내는 활짝 웃어 주었다. 나는 그 미소가 좋았다.

5년쯤 지나자, 아침, 저녁 두 차례 사경은 자연스런 나의 일과가 되어 주었다. 나는 서서히 몰입과 집중의 희열을 맛보기 시작했다. 예전엔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성가시게 느껴졌는데, 이젠 별 상관이 없어졌다. 밖에서 죽을 끓이든, 밥을 끓이든 담담하게 대처할 힘이 생긴 것이다. 차츰, 어디선가 좋은 인연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옛날 제자들, 오래전 친구, 고향 후배 등등…. 그리고 나서 정말 좋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수행 생활을 열심히 하는 딸네 가족과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맞춰 함께 수행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부모, 자식이라는 틀 대신 도반이라는 생각을 갖고서 말이다. 수행하기 전, 향을 피우고 청수를 떠놓는 일은 나의 몫이다. 좌복을 깨끗이 털고 자리를 정돈하는 것은 딸의 몫이다. 함께 수행을 하다보면, 거실은 어느새 청정도량이 되어 상서로운 기운을 토해 놓는다. 딸네 가족과 함께 수행한지도 어느새 2년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물론 사소한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상대방이 내 뜻대로 따라주길 바라는 것이라는 걸…. 또 갈등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을 고치려 하지 말고 나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평화로 향하는 문이라는 걸…. 그런 마음으로 함께 생활하다보니 일상의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은 감사의 마음을 이웃에 회향하기로 했다. 거창한 회향보다는 작지만 진실한 마음을 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예전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는 우리 집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꼭 무엇인가를 먹여서 보내곤 했다. 하다못해 따듯한 숭늉이라도 마시게 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일단 우리는 가까운 이웃부터 대상으로 삼았다. 경비 아저씨와 청소부 아주머니, 그리고 우리 집을 찾는 택배 기사들….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은 오후 작업이 많은 편이라 간식이 반가울 터였다. 1주일에 두 차례, 비타민 음료와 단팥빵을 나눠 주었다. 청소부 아주머니들에게도, 백설기나 인절미 등을 전해 주었다. 택배 기사들에게는 여름엔 시원한 주스, 겨울엔 따듯한 두유를 전해 주었다. 작은 선물 이었음에도, 받는 이들이 너무나 기뻐하고 고마워해서 오히려 우리를 송구하게 만들었다.

차츰 우리는 나눔의 대상을 이웃 주민으로 까지 넓혀 나갔다. 혼자 사는 독거노인, 편부모 자녀,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어려운 노인 등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나의 제자들이 지역 특산물을 보내오면, 딸과 나는 그것을 여러 봉투로 나누어 이웃에게 선물한다. 제주도 한라봉, 강릉 한과, 천안 호두과자 등등…. 작은 먹거리 이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기뻐한다. 받는 것보다 베푸는 일이 세 배쯤 더 행복하다는 걸, 나는 아내가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웃들에게 작은 회향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이웃 사람들은 우리 집을 울타리가 없는 집이라 부른다. 서울이란 도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 사람들은 열쇠를 몇 겹으로 하고, 비밀번호를 바꾸고도 불안해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문단속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름이면 시원한 발 한 장 걸어놓고, 오는 손님을 맞는다. 찾아올 인연이면, 내가 꽁꽁 숨어도 찾아오고, 그렇지 않으면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단골 택배 기사들은 우리 집에 마음 편히 들어와 화장실도 사용하고, 시원한 물 한잔도 청하곤 한다. 바로 내가 꿈꾸던 삶이었다.

얼마 전부터 딸네 가족과 나는, 새로운 회향을 실천하고 있다. 수행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기초 수행법을 알려주고, 수행 책자를 나눠주는 일이다. 알음알음으로 인연이 닿는 이부터 시작해, 건너건너 인연이 이어지는 이들까지 우리 집을 방문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다시 한 번 변신 중이다, 울타리가 없는 집에서 울타리가 없는 도량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곁에 없지만 나의 말년은 아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회향 중이다.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언젠가 아내를 다시 만난다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당신은 부처님이 내게 보내준 관세음보살이었다고….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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