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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은 초라하고 허우적대던 내 인생 송두리째 뒤바꿔

기자명 법보신문

포교원장상(최우수상)-정은주

젊은 시절 나에게 불교는 역사 공부할 때나 배우는 내 삶과 무관한 박제된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일찍이 절에 다니셨기 때문에 특별히 불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릴 때는 심지어 엄마나 할머니들이 주로 복을 빌러 다니는 민간신앙 정도로 불교를 폄하해서 바라볼 만큼 무지몽매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어쩌다 절에 갈 일이 있을 때도 늘 관찰자의 시선으로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이건 이래서 안 좋고 저건 저래서 이상하다는 식으로 내 마음대로 평가하곤 했다.

붉고 푸른 단청도 어쩐지 원색의 촌스러움으로 보였고 신도들이 누런 황금 불상을 향해 굽실거리며 절을 하면 미신이나 우상숭배 같아 거부감마저 들곤 했다. 더욱이 하늘을 찌를 듯한 대형 교회나 거대한 사찰의 불상을 조성한다는 뉴스를 접하면 낮은 곳으로 임하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지 않는 종교를 비판하며 “종교는 마약이라더니 역시 어쩔 수 없어…”라고 비꼬곤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북한산 도선사 밑의 주택가에서 몇 년간 살면서 가끔 산책삼아 절을 찾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교는 저 멀리 산 속에 파묻힌 풍경에 머물러 있을 뿐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게 여러 번 도선사를 찾았지만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절 한번 할 생각을 내지 못했고, 지나가는 과객인 양 산 좋고 물 좋은 주변 풍광이나 즐기며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절집을 바라보곤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20~30대는 삶의 번뇌가 참으로 극심했던 시절이다. 20대에는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군사정권의 불의와 압박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고뇌가 매우 깊었던 시절이다.

불상에 절하는 할머니 보며
처음엔 우상숭배처럼 느껴져
법륜스님 책보며 새롭게 인식
신행활동으로 이어지진 못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지만
‘삶의 참 가지’ 두고 늘 고민
뒤늦게 화계사에서 참선하며
무한한 가능성 지닌 존재 자각

오랜 습관으로 수행 힘들었지만
내 참모습과 만날 수 있게 돼
나를 비울수록 인간관계 원만
자유인 될 때까지 수행할 것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늘 고민하면서 방황했고 우울하고 병든 나날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겉보기에는 아무 탈이 없는 원만한 가정을 꾸리면서도 삶에 대한 알 수 없는 회의와 막연한 불안이 늘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이며 언젠가 죽음에 이를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어디서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사람들이 열렬히 추구하는 어떤 것들도 종내 그 공허함과 불안감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러던 30대 중반 어느 날, 대학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남편이 우연히 법륜 스님이 이끄는 한 불교단체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에 대한 강연을 하고 온 적이 있었다. 당시 법륜 스님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복과 개인주의로 흐르는 불교를 사회적 실천불교로 이끌고자 열정적으로 노력하시는 분이었고 나의 종교 취향에도 잘 부합하는 수행자였다.

그 때 남편은 법륜 스님의 사인이 담긴 ‘알기 쉬운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선물로 받아왔다. 그 당시 불교를 적극 찾아 나서진 않았지만 삶이 신산할 때마다 불교에 대한 은근한 관심이 조금씩 자라고 있을 때라 호기심으로 책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아주 일목요연하고 명쾌하게 불교를 정리해 주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열리는 걸 느꼈다. 그동안 나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내 삶을 비켜가곤 했던 불교가 마침내 차원 높은 사상이자 매력적인 종교로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불연은 그 때도 시절이 무르익지 않았던가 보다. 신앙심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고 단지 불교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깊어졌을 뿐이었다. 단지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세계를 깊이 사유하는 종교구나’라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말았던 것 같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그러나 불교가 내 삶에 깊이 들어와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는 정신적 버팀목이자 삶의 지혜로운 인도자로서 자리 잡는 데까지 한참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나도 불법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는 말이 참으로 절실하게 입증되던 시절이었다. 그토록 번뇌의 벽에 갇혀 헤매면서도 불법에 얼른 귀의하지 못했고, 어딘가에 있을 진리를 찾아 계속 밖으로 눈을 돌렸다.

40대 들어 내 삶의 큰 고민 가운데 하나가 ‘좋은 부모되기’였다. 딸 둘을 키우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갈등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부모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나게 했다. 비교적 큰 탈 없이 바르게 자란 아이들이었지만 경쟁이 심하고 복잡한 한국의 교육 현실은 ‘올바른 교육이 무엇일까’를 늘 고민하게 했다.

게다가 양육과정에서 부딪힌 많은 갈등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 나의 아집이나 편견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이 들지만 당시엔 갈등 속에 헤맬 뿐 명쾌한 해결점을 못 찾았다. 결국 내가 겪는 일상의 여러 갈등들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며 어딘가에 있을 진리를 찾아 귀의하고픈 종교적인 열망이 점점 싹트게 되었다.

2003년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범어사의 일반인 수련회를 신청하게 되었다. ‘휴휴정사’라는 현판이 달린 아늑한 절 방에서 난생 처음 잠도 자보고 절밥도 먹고 스님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조금씩 불교는 내 삶의 일부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 때 지오 스님이라는 분이 법문을 하러 오셨는데 맑고 우렁찬 목소리에서 수행자의 위의가 느껴졌고 ‘수행을 하면 저렇게 활발당당한 모습이 되는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 때는 자기 성찰에도 미숙했기 때문에 무엇을 쉬라는 말인지 휴휴정사라는 현판의 의미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스님이 ‘마당을 천천히 걸으며 내딛는 발걸음 마다 자신을 잘 관찰해보라’고 했을 때 도대체 나의 무엇을 관찰하라는 말인지 초점을 잡지 못했다. 이렇게 풋내기 왕초보 불자로 나와 불교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범어사 수련회 이후 현각 스님의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우리 것의 참된 가치를 모르고 서양을 우월시하는 사대의식이 나에게도 내면화되어 있었던가 보다. 지금은 불교 서적을 많이 본 탓에 한국불교의 위대한 전통과 뛰어난 수행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불교를 제대로 모르던 그 시절에는 편견이 심했다. 하버드와 예일대 같은 미국의 유수한 명문대 출신 철학자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걸 보면 ‘한국불교에도 뭔가 있긴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양인의 시각을 좇아 한국불교를 거꾸로 접근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 책 덕분에 2004년, 숭산 스님이 입적하시던 해에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나와 불교의 만남도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됐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 보다 10년 전, 산책삼아 화계사에 처음 들린 적이 있었다. 절이 얼마나 편안하고 친근했던지 ‘아, 내가 죽으면 화계사 뒤 산자락에 뼈를 묻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땐 불교나 전생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그냥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화계사와 나는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2004년 화계사는 ‘세계는 하나의 꽃’이라는 멋진 슬로건을 걸고 한국불교를 세계화하는 데 크게 공헌하신 숭산 스님이 많은 훌륭한 외국인 제자들을 키워놓고 돌아가신 상태였다. 그래서 국제선원이 무척 활성화되어 있었고, 현각 스님의 책과 명성이 드높아지면서 불교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내외국인들이 온통 밀려들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화계사에 가면 영어와 불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고 화계사 영어반에 가입했고 외국인 스님들의 지도로 영어와 불교를 함께 공부하면서 불교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불문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의 신행생활은 남들처럼 기도에 열중한 것도 경전을 암송하거나 절 수행에 매진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방황했고 밑도 끝도 없는 갈등이 깊숙이 잠재해 있던 때라 복잡하고 어두운 마음은 쉽게 안식을 찾지 못했다. 절에 가면 속세보다는 편안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상태였다. 불교에 대한 지적 탐구심과 평안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열망이 뒤섞인 채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수행을 많이 한 듯 보이는 어떤 분이 나에게 “좀 내려 놓으라”고 조언을 했지만 정작 뭘 내려놓아야 하는지 그것을 아는 데도 한참 시간이 필요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철야참선을 하느라 잠을 잘 못 잤음에도 해사한 얼굴로 영어반에 온 어떤 보살님으로부터 참선 얘기를 듣게 되었다. 잠을 떨쳐 버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인생을 풀어보기 위해 깊은 밤에 명상에 잠긴다니 참선이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다. ‘아, 내가 그토록 찾던 게 바로 이게 아닐까….’ 다음 주말부터 당장 선방을 찾아갔다.

2004년 늦은 겨울, 난생 처음 선방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가족들에게 저녁밥을 챙겨주고 춥고 스산한 겨울밤에 혼자 집을 나서는 기분은 묘했다. 일주일의 피로가 밀려와 몸도 마음도 나른해지는 토요일 밤, 따뜻한 집에서 다들 편히 쉬고 싶어 하는 그 시간에 홀로 찬바람을 가르며 집을 나서는 심정은 출가자의 마음처럼 비장했다.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는 부푼 기대가 있었다. 선방 문을 열고 들어가 고요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 기대는 무너지지 않았고 바로 결행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참선 수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 몇 년 간 참선 수행의 오묘하고 깊은 맛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업력과 습관에 의해 오랜 세월 굳어져 왔기 때문에 몸은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마음은 갖가지 상념으로 들끓었다. 꾸준히 집중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도 저렇게 잘 해내는데 나라고 못하게느냐’는 분심이랄까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해 힘들어도 끝까지 버텼다. 졸음과 씨름하며 장시간 앉아있다 보면 온 몸이 힘들고 다리는 마비되어 방선 죽비 소리만 기다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내 안을 비추어 보는 회광반조의 힘도 점점 늘어났다. 이전에는 함부로 하던 생각과 말, 행동들이 마치 더러운 물이 여과기를 통과하며 깨끗하게 걸러 나오듯 촘촘한 관조의 그물망을 통해 정화됨을 느꼈다. 정진을 꾸준히 하다보면 실수나 후회할 일들이 줄어들었다. 조율하기 힘들던 단전 호흡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안정과 리듬을 찾게 되었다. 참선의 오묘한 맛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아직 내놓을 만한 정진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뭐라 큰소리칠 형편은 아니지만 참선의 효과는 스스로 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있다.

무엇보다 내 참 모습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했고 경이로웠다. 그동안 내가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참선을 통해 적나라하게 실상을 볼 수 있었다. 위선이나 편견, 욕심 같은 것들에 덧씌워져 허우적대던 내 모습을 거짓 없이 바라봄으로써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를 점점 비우고 맑히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원만하고 따뜻하게 변해가는 것도 느꼈다. 한번은 남편에게 “우리 아파트 같은 라인에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사람들은 이전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당신 마음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떤 일들이 뜻한 대로 점점 풀려간다는 사실이다. 소소한 일상의 작은 행운들이 따라올 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품고 있던 염원들까지 어떤 신령스런 힘에 의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감을 알게 되었다. 일상의 꾸준한 수행을 통해 내 삶을 내 뜻대로 만들고 움직여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주체성도 갖게 되었다.

물론 만사가 그렇게 긍정적인 쪽으로 흐른 것만은 아니다. ‘남들 안하는 그 고귀한 수행을 한다’는 아상에 사로잡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고 거만을 떤 적도 종종 있었고 참선이 쉽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심한 정신적인 고뇌를 앓기도 했다.

하지만 수행이란 본래 부처로서의 내 참된 면목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불교를 모르고 방황할 때는 그렇게 초라하고 무의미해 보이던 내 자신이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깊은 전율을 느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 그냥 빈 것이 아니라 빈 것에서 무한한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리석은 범부도 수행을 통해 훌륭한 성자로 변할 수 있다는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에 다시 한 번 귀의하면서 범부를 끝내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며 살고 있다. 이제 부처님은 누른 금빛 옷을 입고 법당에 모셔둔 불상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 안에서 밝고 신령한 모습으로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믿는다. 다겁 생에 지어온 무거운 업식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 날 때까지 나의 수행은 계속될 것이다.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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