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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1. 보살사상의 현대적 의미

기자명 법보신문

대보리에 대한 발심과 대자비에 대한 용기가 보살행 핵심

대승불교는 보살을 지향하며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더라도 고통의 바다를 떠도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존재가 보살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보살은 여신도를 지칭하는 말로 경칭 아닌 경칭으로 전락했다. 법문 속에 자주 등장하는 보살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용어로 사용되고는 한다. 법보신문은 불교의 이념과 실천사상이 응축된 보살이 한국불교가 지향해야할 좌표가 될 수 있음에 주목했다. 이에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보살의 현대적 의미, 수행론, 서원과 회향, 윤리적 이해, 현대적 실천방안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우리시대 정신적 위기 주범은
유물론적·물리주의적 세계관
불교 고유한 덕목 설 자리 잃어

보살사상이 위대한 유산 재인식
완전한 깨달음·중생구제 목표가
사회상황 극복하도록 기능해야

욕망시대에 맞서 보살정신 따를
용기와 발심 가진 불자들 출현이
불교가 현대사회를 치유할 힘

▲ 불교가 현대사회를 치유할 힘을 가질 수 있는가는 발심과 용기를 가진 불자의 출현여부에 달려있다. 사진은 전상훈作, ‘숨은 꽃’.

붓다는 깨달으신 후에 세상의 이익을 위해 설법해 달라는 범천의 권청을 자신의 깨달음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두 차례나 거절했다. 세 번째 권청에서 비로소 붓다는 “많은 중생들의 이익과 많은 중생들의 즐거움을 위해, 세간에 대한 연민과 이익을 위해, 신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의 이로움과 즐거움을 위해” 법을 설한다는 유명한 전법선언을 하면서 이후 45년에 걸친 기나긴 설법의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과 언설 사이의 오랜 긴장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동시에 설법이야말로 중생들에 대한 붓다의 커다란 대비심의 표현이었음을 보게 된다.

보살사상의 의의를 붓다의 정각 당시의 일화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로 대승불교가 이런 깨달음과 교법의 긴장관계를 처음부터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바로 대승의 이상적 인간상으로서의 보살은 붓다와 같이 ‘완전한 깨달음’과 ‘일체중생의 구제’라는 두 상반된 목표를 실현하려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이 붓다의 초기정신을 구현하고 있다는 주장이 역사적 맥락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정신사적 맥락에서는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보살사상이 단지 지나간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불자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한다면, 완전한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목표가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적, 정신적 상황을 극복하는데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먼저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대승에 따르면 언어와 개념과 결합되어 분별작용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통찰이다. 이런 언어와 사유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진 여러 ‘우상’들이 단지 개념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점에서 불교를 다른 인도학파와 명확히 구별시키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의 여러 ‘우상’들의 허구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필자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의 핵심이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유물론적, 물리주의적 세계관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모든 가치와 평가의 기준이 시장에 있다고 믿고 가르치는 시대 속에서 불교를 위시한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이 제시했던 가치들, 예를 들어 자신의 욕망의 억제와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연민심, 내적인 정신적 완성과 이를 위한 수행, 모든 생명체와 자연에 대한 평등감 등의 고귀한 덕목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생명체가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런 욕망의 추구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바로 욕망을 무제약적으로 확대하려는 시장의 이데올로기에 있다. 이런 시장의 가치전도는 전통적 삶의 기준이 근저에서부터 붕괴된 우리 사회에서 서구보다 더 비극적 형태로 나타나는 듯하며, 이런 경향에서 불교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상황은 최소한의 도덕적 인과법칙과 정신적 성숙의 당위성조차 사회에서 거의 고려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위기와도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보인다. 우리는 이런 태도의 배후에 근대과학의 계산주의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과학은 소위 가치중립성의 미명 아래 모든 인문적 가치의 피안에 있는 또 다른 우상으로 둔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그 근본전제가 양자역학에 의해 부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정신이나 의식 등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물리주의적 관점이나, 또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도킨스가 말하듯이 이 세계는 유전자라는 ‘생존기계’가 생존하기 위한 싸움터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적 협동이나 이타성 등의 그럴듯한 정신적 가치조차 결국 이런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가진 물리학과 생물학, 경제학이 한 목소리로 이기적 행위와 욕망의 추구가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 기인한 자연적인 태도라고 합주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붓다는 인지과정의 분석을 통해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인지하는 우리의 감각능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설한다. 이는 대상의 인식이란 그것을 인식하는 중생의 마음작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맹목적인 과학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관점을 계승하면서 대승은 언어와 개념, 기호에 따른 모든 인식은 결국 언어적 진리의 범주에 속할 뿐이라고 본다. 이에 따르면 과학주의자들이 말하는 ‘사실’이란 기호와 언어의 해석에 의거한 유용성의 범위 이상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정신적 요소를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해석을 보자.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서 붓다는 답변하기를 거부했지만, 이를 물질요소로 환원시키는 해석에 대해서는 허무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정신적 인과의 법칙의 부정으로 인도할 것이며, 따라서 윤리적 행위의 존재이유와 정신적 자유의 가능성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과 독립해 존재하는 어떤 외부대상도 인정하지 않는 대승에 있어서도 물리주의적 해석은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작용에 대한 올바른 통찰 위에서 비로소 현세적 쾌락주의의 형이상학적 근거가 부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생명의 본질이 이기적 욕망이라고 하는 주장을 보자. 이것은 유전자의 이기성에 대한 분자생물학의 담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성이 현상적 존재의 탐진치에 따른 생존방식이라는 것은 불교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유전자 차원의 소위 ‘이기성’을 개체 차원으로 확장하는 도킨슨의 해석이 가진 비약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불교도의 목표인 열반이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고,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행복한 상태로서의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며, 또한 열반을 증득했지만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윤회 속에서 고통을 감수하는 많은 선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들으면서, 생명의 본질은 결코 이기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다.

위대한 불교시인이며 철학자인 샨티데바는 자타의 평등성과 자타의 교환이라는 두 가지 윤리적 원칙을 보살행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자타의 평등성이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인도후기의 위대한 밀교행자였던 마이뜨리파가 법좌에 앉아 설법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이에 어떤 사람이 던진 돌에 늑골을 정곡으로 맞은 개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그 순간 법좌에서 설법을 하고 있던 마이뜨리파도 법좌 아래로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졌다. 그는 개가 돌에 맞는 순간 개와 자신을 철저히 동일시했기 때문에, 개가 맞은 곳과 같은 자신의 늑골에 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일체 중생에 대해 동체대비가 자타의 동일시라는 보살윤리의 근본요청에 의거하여 어떻게 일상사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불자가 먼저 확립해야 할 것은 대승의 정신적, 윤리적 가치가 과도한 욕망의 시대를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시키는 물리주의나 생명의 본질로서의 이기성이라는 해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며, 보살정신에 따라 살아가려는 용기일 것이다. 보살이란 바로 이런 ‘용기를 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런 용기는 삶의 모순적 상황과 분분한 이론의 그물망 속에서도 보살행의 목표와 과정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잃지 않게 한다. 이런 불굴의 용기에 새싹을 틔우는 것이 바로 발심이다. 발심 없이 대보리와 일체 중생에 대한 무차별의 대비심은 결코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안성두 교수
지금 한국불교의 참담하고 무기력한 상황을 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대승의 출발점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승속을 불문하고 화두를 들건, 경전을 공부하건, 세속적인 사무를 처리하건, 아니면 중생들 속에 앙가주망을 하건 대승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절실한 실존적 자각이 우리의 행위의 원천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추구는 삶 속에서 곧 추진력을 잃게 될 것이고, 쉽게 추락할 것이며, 추락한 후에는 다시 시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의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발심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현대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힘으로 변화되는가의 여부는 이러한 발심과 용기를 가진 불자가 얼마나 많이 출현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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