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2. 보살의 수행
[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2. 보살의 수행
  • 법보신문
  • 승인 2014.04.3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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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와 방편 무기로 조화롭게 수행해 중생구제 실천

우리모두가 3세의 세월을 타고
윤회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중

자리에 필요한 반야바라밀과
이타위한 다섯바라밀 동시수행

이타적 의도와 관상을 훈련해
사회적 실천으로 이타행 촉진

반야·방편이란 강력한 무기로
어떤중생도 버리지 않아야 보살    

▲ 보살은 자리이타를 위해 6바라밀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 사진은 구인사 벽화, ‘심우도 중 입전수수’.

비틀즈가 해체된 후 솔로로 전향한 존 레논. 그는 오노 요코의 영향이 짙게 배인 첫 솔로 앨범을 1971년에 발표한다. 감미로운 피아노 전주로 시작하는 앨범의 타이틀곡은 ‘이매진’. 하지만 정작 레논 자신은 감미로운 선율 때문에 자신이 정성들여 쓴 가사가 묻히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천국이 없는 걸 상상해 봐요’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곡의 백미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걸 상상해 봐요.’ 평화를 열반으로 바꾸면 이것은 그대로 대승보살의 서원으로 읽힌다.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가장 오래된 대승경전의 하나인 ‘팔천송반야경’ 제1장 ‘일체종지품’ 부분에서는, 보살은 모든 중생의 구제를 서원하지만 그 실천은 성불 이후로 미룬다. 자기 자신이 먼저 해탈하지 않고서는 남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님이 길을 인도할 수 없고, 진흙탕에 빠진 이가 남을 구할 수 없으며, 물에 빠진 이가 남을 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타는 자리의 완성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의도와 실천은 분리되고, 보살은 삼림에서 고행에 가까운 수행에 매진한다. 내면적인 의도나 서원과는 달리, 이 보살의 외면적 모습은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아라한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모습은 현대의 사회적 요구와는 일견 모순된다. 고통의 질곡에 신음하는 중생의 바람과는 늘 어긋난다. 이 점에서 초기 대승불교의 보살은 출가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런 보살상은 반야(자리)와 방편(이타)을 조화롭게 수행하려는 모습으로 바뀐다. 보살은 자신이 열반을 얻기 전이라도 중생의 구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팔천송반야경’ 제20장 ‘선교방편품’에 보이는 영웅의 비유는 이러한 보살상의 선구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학문과 덕성을 겸비하고 재력과 체력을 갖추어 어떤 일이든 성공적으로 완수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영웅에게 모든 가족을 이끌고 황량한 숲으로 들어갈 일이 생긴다. 그곳은 온 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로 스산하고 두려운 곳이다. 게다가 흉악한 도적들까지 접근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강력한 무기와 아군의 도움을 받아 적을 물리치고 무사히 가족을 인도한다.

보살도 마찬가지다. 그는 반야와 방편이라는 강력한 무기와 아군의 도움을 받아 어떤 중생도 버리지 않는다. 그는 홀로 열반에 들기를 추구하지 않고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는 열반에 집착하지 않지만 윤회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열반과 윤회에 집착하지 않는 보살의 열반을 후대 경론은 무주처열반이라 부른다. 이럴 때 비로소 보살은 ‘깨달음(보리)을 추구하는 중생(살타)’이 아닌 ‘깨달음(보리)과 중생(살타)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가 된다.

이를 위해 보살은 자리에 필요한 반야바라밀뿐 아니라 이타를 위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 이로써 가장 오래된 대승경전에서 반야바라밀만 존숭할 뿐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중시하지 않던 태도는 사라지고, 모든 바라밀은 동등하게 평가된다. 특히 이타행과 관련된 바라밀은 보시와 지계, 인욕바라밀이다.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구체적인 이타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불교적 가르침을 펼치는 설법 그 자체, 바로 법시다. 석가모니 붓다가 그러했듯, 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는 것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끈다. 이 점에서 설법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타행이다. 보살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끈다는 서원의 핵심적 내용도 바로 이 설법에 있었을 터다.

여기에 더해 ‘본생담’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기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보시가 있다. 나아가 보다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니카야’ 등에서는 부모를 돌보는 것, 공원이나 숲을 꾸미는 것, 다리를 세우는 것, 우물을 파서 식수를 제공하는 것, 집이 없는 자에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주는 것 등이 열거된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보시와 지계바라밀을 조화롭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보살의 모습을 ‘유가사지론 보살지’는 이렇게 전한다.

“보살은 본성상 보시를 좋아하여 보시할 물건이 있는 한 늘 다른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줍니다. 보시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의 공덕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시할 것을 권하고 그들이 보시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왕이나 도둑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없애주고 여러 가지 공포로부터 그들을 구호합니다. 묻든지 묻지 않든지 중생들을 위해 바른 법을 가르쳐줍니다.
보살은 본성상 몸과 말과 마음으로 온화한 행위를 합니다. 그는 중생을 두렵게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고, 만약 그랬다면 즉시 후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아주 사소한 죄도 매우 두려워합니다. 공양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항상 공손히 인사하고 예배하며, 일어서서 맞이하고 합장 합니다. 친절하고 세련되고 다른 사람의 기분에 따르며 미소를 머금고 여유 있는 얼굴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잘 협력하고 나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합니다. 진실한 말을 존중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이간질, 잡담 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승보살의 수행에서 이타행은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이라기보다 명상적 방식으로 발전한다.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은 그와 같은 이타행 수행의 정수를 보여 준다. 이것은 출가 전통을 잇고 의도와 실천을 분리한 대승불교 수행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다. 그 원리는 두 가지다. 논어의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거나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산상수훈과도 통하는 자타 동일성의 방법, 이른바 도덕적 황금률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즐거움과 자신의 고통을 교환하는 자타 교환법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먼저 자신과 타인이 공성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살은 자신의 즐거움과 바꾼 타인의 고통을 공성으로 무화시킨다. 대승불교의 가장 기본사상인 공사상이 이타적 행위와 훌륭히 결합해 있는 것이다. ‘입보리행론’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로 이를 노래한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는 제거하리라. 그것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를 도와야 하리라. 그들은 나와 같은 중생이기 때문에.

하지만 대승불교가 추구한 영웅적 보살의 이상은 역사적으로 실패하였다. 아니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에서는 그렇다. 자신의 아들딸과도 같은 어린 학생을 태운 배가 침몰해도,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루고 선장이 먼저 탈출하는 것을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목도하고 있다. 이 배를 현대 한국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아도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정규직 선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더 큰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다. 실상 우리 모두는 3세의 세월을 타고 윤회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이 윤회의 바다에서 우리를 구해줄 영웅과 같은 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영웅적 이미지의 보살이 사라진 곳에 눈에 띄는 것은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할 줄 아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진해서 애도하고 구호품을 보내거나 구조에 나서기도 한다. 진정한 보살의 모습은 그들에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 김성철 HK교수
이러한 상황에서 관상적 형태의 수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혼자서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자기 내면의 평화와 평정을 되찾거나 유지하는 것 이상의 어떤 실천적 유용성도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관상법도 실천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타행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적 훈련이 될 수도 있다. 스포츠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실전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한 훈련이 되는 것과 같다. 평소에 지속적으로 이타적 의도와 관상을 훈련하는 것은 사회적 실천으로서 이타행을 촉진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해 보자.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김성철 금강대 HK교수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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