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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3. 보살의 서원과 회향

기자명 법보신문

나와 타인 향한 선한 다짐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능력

보살, 대승불교가 제시한 인격
부처님 깨닫기 직전 삶이란 뜻

구제대상·방법따라 서원 다양
서원의 효과와 작용이 곧 원력
원력에 기댄 정토왕생은 모순
수행·공덕 회향함으로서 가능

▲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에 있는 베제클리크 석굴에 남아있는 연등불 수기 벽화.

보살은 대승불교가 제시한 하나의 인격이다. 대승불교이전 보살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영위한 삶을 가리킨다. 카필라바스투에서 나고 자란 고타마 싯타르타뿐만 아니라 전생의 수많은 삶이 모두 보살의 모습이었다. 전생담에 등장하는 숱한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면 붓다가 아니라 보살의 이야기인 셈이다.

자기 몸을 던져 굶주린 범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중생의 삶 속에서 보살이 행한 역할을 알려 주는 극한적인 예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다양한 윤리적 삶에서 특별한 힌트를 얻는다. 붓다가 6년여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한 게 아니라 그 이전 삶에서 이미 수행은 시작됐고, 그 수행은 내면 성찰이 아니라 다양한 중생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대승불교는 훌륭한 수행과 그 결과로서 깨달음이라는 단순한 구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제 수행자의 윤리적이고 이타적인 행위가 깨달음을 이루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공덕이라고 표현했다. 보살은 공덕의 축적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성취와 중생 구제라는 보살의 두 지향은 하나로 겹치게 된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중생과 사슬로 묶여 있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문병 온 문수사리가 어떻게 병이 들었냐고 묻자 자비심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아픔의 공유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유마거사 앞에 당도한 문수사리는 머쓱했을 것이다. 중생이 아픈데도 자신은 건강했으니 말이다. 건강한 게 죄는 아니지만 자식이 아프면 건강한 부모도 쓰라린 법이다. 멀쩡하면 사랑을 의심할만하다.

그런데 보살이 중생 구제를 감당한다는 사고에서 보살과 중생의 관계가 일방적임을 간파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선지자가 “내가 불쌍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종교적 염원으로 가득한 중생이라면 모를까 만약 오늘날 우리 삶으로 이런 구도를 끌어온다면 다소 당혹스러울 것이다.

물론 보살은 자기 행위의 과시나 성취욕을 위해서 중생 구제를 행하지는 않는다. 대승경론에서는 보살의 행위도 공(空) 개념에 입각해서 이해하려 애쓴다. 어떤 침전물도 남김없이 행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보살은 영웅이나 지도자 아니면 달라이라마 존자같은 모습으로 와야 하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살은 수적으로 너무 빈약할 것이다. 위대한 자로서 보살이 아니라 소중한 자로서 보살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소중함이란 행위의 소중함이다. 물론 돈을 내고 타는 택시지만 그분이 운전하다가 어떻게 되면 우리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하여 그분의 운전은 대가에 따른 행위라고 판단하기 이전에 벌써 소중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깨달음 성취와 중생 구제를 다짐하는 행위를 프라니다나(pran. idha-na)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서원(誓願) 혹은 원(願)이라고 번역했다. 불보살이 행하는 깨달음 성취와 중생 구제라는 공통된 서원을 총원이라고 하고,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의 서원처럼 특별한 상황의 개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별원이라고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여래는 사리불에게 “나는 본래 모든 중생이 나와 다름없는 동등한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고 서원했다”고 일러준다. 이는 일종의 역할 규정이기도 하다. 이 서원은 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전부터 작동한 것이기에 실제 보살은 이런 다짐을 통해서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밀고 간다. 그래서 서원은 보살의 행위를 이끄는 근본의 의미를 띠게 된다. 이렇게 본원(本願)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또한 서원이 갖는 효과나 작용력을 원력이라고 한다. 이 원력은 단순히 서원을 세웠다고 발생한다기보다는 보살이 오랫동안 수행하고 공덕을 쌓음으로서 자연스럽게 획득한 역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원력은 보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힘이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방향으로 사용되는 힘이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세운 서원은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원력의 방향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가 그 보살의 성격을 구분 짓기도 한다. 능력이나 수준 차이가 아니라 성격이나 역할 차이라고 해야 한다. 잘 알려진 지장보살의 서원과 약사여래의 서원은 그들이 구제하려는 중생과 구제의 방법에서 다르다. 지옥도에서 허우적대는 중생도 있고, 병고로 혼미한 중생도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서 법장비구는 자신의 48대원을 제시한다. 이 서원을 성취하여 그는 무량수불이 된다. 그는 앞서 만약 자신이 부처가 되면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겨 해탈하도록 할 것이라고 서원한다. 이 서원에 따라 발생한 원력을 실제 동원하는 이들은 중생이다. 중생은 보살의 원력에 기대어 깨달음에 이르거나 완전한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무량수경’에서는 “누구든지 무량수불의 명호를 듣고 기쁜 마음으로 신심을 내어 다만 한 생각(念)만이라도 지성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이는 곧바로 왕생하여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경지에 머물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때 중생은 무량수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왕생한다. 이는 전형적인 타력신앙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타력이라고 해서 불완전자가 절대자에 매달려 분수에 맞지 않는 불로소득을 취한다고 힐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타력에 기댄다. 그 타력은 누군가가 아침에 대문을 나서면 행한 작은 바람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야지’가 아니라 ‘열심히 그리고 안전하게 운전을 해야지’하는 이 바람이 서원이고 원력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저런 바람에 기대어 살고 있진 않나.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자의 서원이 아니라 소박한 자의 서원에 기댄다.

보살의 원력이나 공덕에 기대어 중생이 깨달음을 얻거나 정토왕생한다는 사고는 전통적인 업설에 따르면 일면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 말하는 업설은 한 중생이 어떤 행위를 하고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에 어떤 변형도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도 중생의 과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사리불의 죽음을 지켜보는 장면이나 석가족의 멸망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붓다도 업과 그 과보에 개입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업설에서 혁명적인 전환이 발생한다. 그것은 공덕의 공유 내지 공덕의 양도라고 할 수 있는 회향(parin.a-mana-)개념의 출현이다.

파리나마나에 해당하는 팔리어 ‘파리나마’는 초기불교문헌에서 ‘돌리다’ 혹은 ‘돌려 베풀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됐다. 신에게 직접 공양물을 올릴 수 없는 인간이 수행자에게 그것을 공양하여 그 행위를 신에게 돌리도록 하는 행위다. 매개자를 통해서 어떤 절대자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회향의 의미가 대승불교의 회향 의미와 다소 다르지만 이런 방식은 대승불교 지역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불상 조성 등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선하는 행위는 망자가 된 부모님에게 직접 도달하지 못하지만 불보살을 매개로 공덕을 돌릴 수 있다. 조상추선이나 사십구재 등 귀신이라는 현실에 부재하는 중생과 소통하고 그를 천도하는 방식도 기본적으로 회향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대승불교에서 회향이라는 말은 ‘공덕의 전이(merit transference)’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살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쌓은 공덕으로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을 다른 중생에게 돌려주는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이익을 받은 다른 중생은 실제 자신이 행한 것 이상의 훌륭한 과보를 받게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게 가능할까. 만약 이렇게 된다면 불교 본래의 인과보응의 업설은 훼손되지 않을까.

물론 일대일 대응방식의 업설은 훼손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행위의 공유나 과보의 공유라는 개념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인과보응의 주체를 모호하게 하여 윤리의식이나 윤리적 행위의 선명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위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이른바 업이라 불리는 삶의 연대와 삶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에서 회향은 사실 보살의 엄청난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이 지고지순한 행위를 통해서 보살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 사람의 특별한 존재가 무지한 혹은 고통 받는 대다수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식은 상상하기 힘들다.

▲ 김영진 교수
누구 한 사람 또는 위대한 영웅이 불쌍한 대다수를 구하거나 어린 양떼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인간 상호 간에 이런 회향이 발생해야 할 것이다. 시시때때로 역할은 바뀔 수 있다. 오늘 내가 보살이라면 내일은 불쌍한 중생일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은 누군가 보살이 되어 나에게 공덕을 회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보살이 그랬듯 우리도 삶을 공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듯하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에 있는 베제클리크 석굴에 남아있는 연등불 수기 벽화.

김영진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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