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4. 보살의 윤리학
[한국불교, 보살이 희망이다] 4. 보살의 윤리학
  • 법보신문
  • 승인 2014.04.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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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입·마음으로 즐거움과 고통 나누는 적극적 행위

자리이타 펼치는 게 대승보살
도덕적 이상이 구현된 인간상

사홍서원에 궁극적 목표 담겨
중생구제 성취할 때 정각이뤄

행위자가  선택한 작은 행동들
타인에게 긍정적 효과 미쳐야


▲ 자리이타행은 법회의 마지막 절차인 사홍서원, 즉 중생을 다 건지기 위해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워 불도를 이루는 데 있다. 이같은 자리이타행을 원력 삼은 대승보살은 중생구제의 길에 나선 위대한 윤리적 롤모델이다. 사진은 덕숭총림 수덕사가 4월6일 봉행한 보살계 수계법회.
일반불자들에게 보살(菩薩; Bodhisattva)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붓다의 진리를 구하고(自利)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利他)’는 도덕적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란 용어도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보살’이란 단어가 우리들의 일상적 용법에서처럼 단순히 재가여성 불자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본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니체가 간절히 초인 짜라투스트라를 찾았듯이 목 놓아 보살의 이름을 불러야 할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사고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말로만 보살을 되뇌었지 정작 보살과 같은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들이 아니겠는가. 우리사회에서 21세기적 의미의 보살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살과 관련된 논의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지면상 보살도의 대표적 특징인 자리이타행과 그것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해 보기로 하자.

도덕적 황금률의 형식을 빌자면 대승보살의 ‘자리이타행’은 나에게 즐거움은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움이요, 나에게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적극적인 도덕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행위자가 선택한 행위가 행위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기를 도모하는 공리주의적 접근방법과 형식상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종의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자리행과 이타행의 동시수행이 가능하게 되는 불교적 근거는 연기(緣起)와 공(空) 및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기적으로 얽혀 있고, 따라서 그 본질에 있어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른바 ‘자리이타행’의 실현도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다시 불교적 도덕품성인 ‘자비심’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보살의 자리이타행은 불교적 의미의 공성지혜와 덕성자비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결합된 말 그대로 도덕적 이상의 구현으로 평가되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돌이켜 보면 붓다는 우리 자신의 삶이 소중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삶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워 준 바 있다. 예컨대, 법구경에서 붓다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기에 누구든지 자기를 잘 보호해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존재도 소중한 줄 알고 잘 보호해 주어야 하나니, 다른 존재를 보호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생명까지 해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이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붓다는 먼저 진정한 자기 이익이 무엇인가를 잘 헤아려야 남의 이익도 제대로 참작할 줄 알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붓다의 이러한 인식체계는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승보살의 ‘자리이타행’도 개인의 자기이익이 고려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자신의 이익에 너무 무관심하거나 남의 이익을 지나치게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와 함께 남의 이로움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나 자신이 추구해야 될 당연한 이익을 소홀히 다루어서도 곤란하다. 모름지기 나 자신의 이로움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와 다른 사람의 참된 이익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나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야 남의 가치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나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자기인식이야말로 남을 배려하고 도울 수 있는 자비로운 마음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붓다에게 개인은 ‘이기심(self-interest)’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그리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 사회는 ‘상호간의 이기심(mutual self-interest)’를 대표하고 있는 제도적 개인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교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이기’와 ‘이타’의 구별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 행위’의 주체가 되는 ‘나’란 것은 본래 공성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콜린스(Steven Collins)의 말을 빌리자면 불교적인 행위는 “단순한 이기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를 부정하는 이타주의도 아니다. (중략) 불교는 인격적 정체성이라는 질적 개념의 일부로서, 필연적으로 이타주의의 차원을 포함하는 합리적인 행위 버전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적 의미의 이기주의자는 교학적 토대 위에서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정책을 고려할 수 없게 되며, 이는 내용상 이타주의적 행위와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형식상 그의 행위는 이기주의적으로 동기부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이타주의와 차이가 날 뿐이다. 페레트(Roy W. Perrett)는 이를 가리켜 ‘자기-관계적 이타주의(self-referential altruism)’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이익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 ‘자기이익’을 먼저 고려할 수 있는 개념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먼저 ‘자기에게 이익’이 됨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의 선후관계는 시간상의 앞뒤가 아니라 단지 설명을 위한 논리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리행’과 ‘이타행’은 같은 시공간 안에서 논리적 혼란 없이 하나의 행위로도 동시에 발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윤리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회정의는 각자 ‘상호간의 이기심’을 증진시킨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질 때 비로소 그 현실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롤즈(John Rawls)에 따르면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집단의 ‘공동이익(common interest)’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적인 개인은 내가 상대방의 이익을 존중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나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조금 비약하면 붓다의 자리이타행 개념 가운데 엿볼 수 있는 이기적 합리성 또한 근본적으로는 롤즈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모든 법회의 마지막 절차인 사홍서원(四弘誓願)에서 대승보살이 지향해야 할 자리이타행의 궁극적인 목표를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사홍서원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誓願度)/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誓願斷)/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誓願學)/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誓願成)’라는 네 가지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사홍서원은 맨 앞의 이타행 하나가 나머지 세 가지 자리행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형식을 취한다. 각각의 요소가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라는 첫 번째 서원이 사홍서원의 나머지 항목들을 압도하고 있는 모양새다. 아무튼 이러한 엄숙한 의례를 통해서 불자들은 자기 자신이 곧 대승보살이라는 자각을 함과 동시에 보살로서의 종교적 위상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 순간 보살로서의 자기정체성 확인과 더불어 멀고도 험한 보살행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많은 붓다를 만나거나 시봉하고 난 뒤 마침내 불퇴전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붓다는 보살에게 다음 생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확약, 즉 수기를 내려준다.

▲ 허남결 교수
여기서 보살의 자리이타적 구도행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고 환희심 가득한 회향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요약하면 대승보살은 자리이타행을 원력으로 삼아 중생구제의 길에 나선 위대한 윤리적 롤모델로 성격규정 될 수 있는 것이다.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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