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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사회에서의 보살행

기자명 법보신문

눈앞 이익서 벗어나 남 위해 어려움 감내하는 삶

돈·명예·권력 좇지 않고
어려운 이 고통 나누면서
수행으로 삼는 것이 보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건
수많은 사람·생명 ‘덕분’
보은하며 사는 삶 돼야

인권·녹색·통일운동 등
다양한 분야서 활동하되
돕는다는 생각도 버려야
참 의미의 보살행 실천

▲ 다른 이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고통과 어려움을 자발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죽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 곧 타인을 살리는 길이며 세계를 살리고 그 속에서 자신도 살아나는 길이라고 필자는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지역 재건 사업에 참여한 한국제이티에스 소속 한 여성이 마을 주민들에게 옷과 이불을 나눠주고 있다.

필자는 9.11사태 이후 23년간의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에서 2001년부터 만 4년간 긴급구호와 개발협력활동을 했다. 우리는 칸다하르에서 난민지원활동과 카불 북부지역에서 마을개발협력, 대불로 유명한 바미안 지역의 겨울철 지원프로그램을 전개했다. 우리의 지원방침은 주민들이 부지를 제공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되 우리는 그들에게 없는 시멘트와 철근,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립적 삶을 지원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고한 우리와는 달리 다른 정부기구(GO)뿐 아니라 NGO들은 부지매입비를 주고 인건비를 지불하는 형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원하는 마을은 카불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로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스투파)이 있어 이름도 탑다라(Topdara)였다. 종교를 앞세우지 않는 우리지만 내심 너무도 고맙고 반가운 마음으로 마을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마을사람들도 우리의 요구조건을 흔쾌히 수용하여 부지도 내놓고, 노동력도 스스로 제공하여 학교공사를 시작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겨울철 담요와 의류 분배, 어린이들에게 교복과 교과서 지원, 주민들에게 의료지원도 하는 등 1년간을 온갖 정성을 다해 지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지도자가 내게 갑자기 주민들의 인건비를 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인건비 없이 일하기로 서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회사라면 노동자에게 인건비를 주지만, 우리는 회사가 아니다. 이 일은 누구의 일인가? 당신들의 일이다. 당신들의 일에 우리가 인건비를 지원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당신들에게 없는 것을 옆에서 지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그 중요한 이유와 그 원칙이 마을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간곡히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시장통에서 다른 마을은 여러 나라 정부기구(GO)나 비정부기구(NGO)가 우리와는 달리 부지구입과 인건비를 지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동요된 것이다.

이곳은 내가 1년간 온갖 정성과 공을 들여온 마을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마을의 리더와 합의서와 약정서까지 써놓고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꿔 딴소리를 하는 그와 마을사람들이 너무도 얄밉고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지원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바뀌어 미안하다. 냇가의 물이 처음에는 얕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깊어서 건너가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그래도 이제껏 우리가 당신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폭발했다. 이제까지 1년 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그 먼 길을 매일 오가고 마을에서 살면서 함께 일을 해왔는데, 자신이 약속을 어겨놓고 오히려 나에게 착한 일을 할 기회를 주었고, 큰 시혜를 베푼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며칠간 배신감과 분노로 몸져누워있고 기도하는 중에 나는 백은 선사와 문수보살이야기가 떠올랐다.

백은 선사가 어느 추운 겨울날에 큰 절의 초청을 받아 법문을 해 주고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헐벗고 남루한 옷차림의 문둥병 환자가 떨고 있었다. 그 순간 하도 불쌍하고 보기에 딱하여 자신이 입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다.

그러나 문둥이는 이렇다 저렇다 아무런 한 마디의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선사는 그에게 말 했다. “이 사람아! 남의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나 무슨 표정이라도 지을 일이지 어찌 그러한가?”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문둥이가 말하길. “여보시오 대사! 내가 옷을 입어주었으니 ‘문둥이님! 보시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나 표정이라도 지을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단 말이요”라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 거지의 호통을 들은 백은 선사는 그 순간 깜짝 놀라 길에 엎드려 “소승의 수행이 모자라 성현을 몰라 뵈었습니다. 거룩한 깨우침에 감사합니다”라며 큰 절을 올리고 일어나보니 방금 앞에 있던 그 문둥이는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제야 그 문둥이는 문수보살이 화현한 것이라는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베풀었다는 상을 짓지 않고, 보시했다는 그 마음조차 갖지 않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가장 최고의 보시라는 가르침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의 말이 옳았다. 내가 공덕을 쌓게 만들어준 그는 나에게 문수보살이었다.

세상에 살면서도 돈과 명예, 권력 등을 좇지 않고, 넘어진 자 일으켜주고 돈 없는 가난한자에게 돈을 주고, 괴로운 사람을 보면 위로해 주며 고통을 함께하고 더불어 나누는 사람, 또 그것을 스스로 수행으로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우리는 보살이고 부른다. 그는 다른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곧 자기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관계 맺고 있는 세상에서 한 사람의 고통은 곧 나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된다. 나는 밝은 해탈의 세계로 가고 싶지만 중생들의 어두운 고통의 그림자가 항상 자신을 비추고 있다. 때문에 밝은 빛으로 가려는 나는 발걸음을 거꾸로 돌려 중생의 고통 속에 들어가 그들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궁극으로 밝은 지혜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연과의 이치로 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과 생명 ‘덕분’이다. 그들이 거기서 자기역할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농부가 식량을 만들어주고 있는 그 덕분에,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준 덕분에, 집짓는 사람이 집을 만들어준 덕분에, 나무가 수풀을 이루어준 덕분에, 풀벌레와 새들이 울어준 덕분에, 바람이 불어주고, 태양이 비춰준 그 덕분에, 물고기가 바다에 있는 덕분에…. 그 수많은 덕분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덕분에’에 둘러싸여 있고, 그들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다. 따라서 나의 삶은 당연히 그 은혜를 보답하는 보은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은혜를 갚는 삶에 내가 베푼다는 생각이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마땅히 가난한 사람을 돕고, 소외된 사람을 도우며,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외국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고통 받는 소수자들이 눈물 나지 않도록 돕고 지원해야 한다. 대지와 강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다양한 녹색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농촌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는 협동조합운동, 사회의 민주주의를 확대시키고, 남북의 통일을 앞당기는 모든 활동을 해야 한다. 나아가 이들이 고통을 받지 않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시스템과 정치를 만드는 일도 큰 보살행이다.

이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지만 남을 위하는 일이고 전체를 위하는 일로 큰 보살행이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능력으로 돕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돕고,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지위로 돕는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행위를 ‘보살행’이라고 평가해주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기 스스로 ‘좋은 일을 한다’든가 ‘보살행을 한다’는 상(相)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많은 생명들의 ‘덕분에’ 살아온 그 은혜의 빚을 갚는 것이므로 조용히 남모르게 할 일이다.

다양한 사회봉사나 해외 개발구호 활동을 하다보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주는 사람이 큰 시혜를 베푸는 생색을 내는 경우가 많다. 사진을 찍고 표시내기 위해, 표를 얻기 위해, 잘난 걸 드러내기 위해 하는 모든 보시와 보살행은 그 복을 까먹고도 남을 일이다. 왜냐하면 받는 사람을 대상화시키고, 가난해도 거리낌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비루한 사람으로 구걸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기 위해 섬세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대상자로 하여금 수혜를 받는데 익숙하게 만들고,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자립심을 퇴화시킨다. 나아가 주는 사람에게 의존성을 높여 궁극적으로 예속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심히 남을 돕되,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존감에 상처를 주지 않게,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도움이 진정한 보살행이 된다. 그래서 주는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와야 한다. 돕는다고 다 도움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유정길 이사
경쟁사회는 타인의 고통 위에 나의 행복을 쌓으려는 것, 상대를 죽임으로 내가 사는 일이라고 여기게 한다. 그러나 결국 나도 사회적 죽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이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고통과 어려움을 자발적으로 감내하는 삶은 지금 당장은 자신이 죽는 듯 보이지만, 곧 타인을 살리는 길이며 세계를 살리며 그 속에서 자신도 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이 보살의 삶이다. 이기적 이타주의(The Selfish Altruist)라는 말이 있다. 보살의 이타행은 가장 위대한 이기심인 것이다.

유정길 에코붓다 이사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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