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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거울 없는 거울

거울 없는 거울로 여전히 우리를 비춰주고 있는 스님이 있다. 경허(鏡虛) 스님이다. 허공을 거울로 비춰준다. 허공도 비어있고 거울에 그림자로 뜬 허공도 비어있다. 경허 스님에겐 그 거울마저 텅 빈 것일 뿐이다.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잔뜩 해놓고 거울을 본다. 낙서가 보인다. 그것도 거꾸로 보인다. 자신의 얼굴에 낙서가 된 것을 모르고 거울을 탓한다. 거울은 말이 없다.

거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실제모습 거꾸로 되어있어
얼굴에 낙서 잔뜩 하고서
말이 없는 거울을 탓하네

낙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직지사의 조실스님이셨던 관응 큰스님 덕택에 중국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았다. 조실스님께 말씀드렸다. “조실스님. 중국에 왔더니 화장실의 낙서도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빙그레 웃으셨다. 우리나라 화장실에 대부분 한글로 낙서가 되어있고 미국의 화장실엔 영어로 낙서가 되어있고 중국 화장실엔 한자로 낙서되는 것이 생각해보면 간단한 상식인데 그때는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한문이나 영어 좀 한다고 폼 잡을 일이 아니다.

필자가 받은 충격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낙서가 한자로 되어있다는 그 사실뿐만 아니라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문의 전문가 축에 든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중국 화장실에 일반 사람들이 가볍게 휙휙 써놓은 한문문장의 의미가 선뜻 들어오지 않다니. 물론 한국어를 교과서로 배운 외국인이 우리나라 화장실에 앉아서 낙서된 우리말을 아주 쉽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필자가 각종 외국어 교과서에 그 나라 화장실의 낙서내용을 교과과정에 반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다.

구한말 우리나라 한학의 대가 한 분이 중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문득 멋진 간판이 멀리 보였다. 오상능설(傲霜凌雪). 서리나 눈보다 하얗다는 뜻이다. 이 한학자분은 속으로 ‘아, 군자의 기상을 말한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중국에서 초청해준 분을 만나서 붓글씨로 일필휘지 ‘오상능설’을 썼다. 내심 반가워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중국의 교양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상능설’은 중국의 방앗간 간판이었다. 서리나 눈보다 하얗게 쌀을 정미해준다는 뜻이었다. 방앗간 간판을 붓글씨로 멋지게 써주었으니 그만 ‘당신은 방앗간을 하면 잘 될 사람입니다’하는 말이 되고 만 것이다.

다시 경허 스님으로 돌아오자. 스님께서 지리산 영은사로 가는 산마루쯤에서 시를 한 수 읊조렸다.

不是物兮早駢拇(불시물혜조변무)
許多名相復何為(허다명상부하위)
慣看疊嶂煙蘿裏(관간첩장연라리)
無首猢猻倒上枝(무수호손도상지)

한 물건도 없다는 말도 벌써 군더더기 / 허다한 이름과 모양들은 또 무엇하자는 것인고 / 첩첩 묏부리 연무끼고 등나무 넝쿨 얽힌 속을 잘 들여다보니 / 머리 없는 원숭이가 물구나무 선채로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고 있구나

거울 없는 거울이란 말도 경허 스님에겐 벌써 군더더기이다. 거울 속에 그림자로 떠오르는 허다한 이야기가 무슨 소용 있으랴. 거울 속에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거울에 비추어지는 실제 물건과는 거꾸로 되어있다. 전신거울에 뜬 사람의 왼쪽에 달려있는 귀는 사실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오른쪽 귀이다.

경허 스님은 시를 짓는 것이 군더더기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필자의 감상은 군더더기에 붙어있는 군더더기이다. 문자로 되어있는 시보다 좀 덜 군더더기인 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의 살아 움직이는 활동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은 훌륭합니다, 하는 말은 훌륭한 것이 아니고 독자님들이 훌륭한 것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45호 / 2014년 5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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