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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는 승려인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1873년 미국. 수전 앤서니(1820~1906)는 신성한 선거장에 나타나 자격도 없는 투표를 하겠다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불법으로 규정돼 재판정에 섰다. 그 자리에서 그는 미국 역사에 길이 남는 명연설을 토해냈다.

“헌법에 명시된 ‘우리(we)’는 현재의 우리들과 후손들의 반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성은 물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여성은 사람입니까?’

그녀 특유의 간단명료한 논거가 전개됐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라 말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여성도 ‘우리’에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곧 ‘국민(people)’이며 ‘시민’이다. 따라서 여성이 시민의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하는 건 합법이다. 연설 후 100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지만 그는 벌금 납부를 거부했다. 40여년이 지난 1920년, 미국은 투표권을 여성에게 확대하는 헌법수정조항을 통과시켰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만의 일이다.

1970년부터 1981년까지 발행된 1달러 동전의 모델로 미국 화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한 수전 앤서니의 연설문이 선거철 언론 매체 지면에 등장할 때마다 뇌리를 스쳐가는 일성이 있다. 비구니 참종권 문제를 놓고 설전이 오갔던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총무원장 되려면 비구니에게 가서 굽실거려야 할텐데, 비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라는 한 비구 스님의 주장에 일연 스님이 강도 높게 반박했다. “비구니들을 배제하고 선출된 총무원장은 결국 교단 절반 밖에 동의를 얻지 못한 총무원장이 될 것입니다.” 본각 스님도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개혁회의 법안이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총무원장을 ‘비구’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승려’로 바꿔야 합니다.”

개혁종단 출범 20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조계종의 비구니 위상은 나아진 게 없다. ‘비구니 징계사안만이라도 비구니가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비구니 스님들의 간청(?)도 외면하고 있는 게 조계종 현실이다. 중앙종회에 열려 있지 않냐는 반문은 설득력이 없다. 81명의 중앙종회 의원 중 비구니에 할당된 의석수는 10석일 뿐이다.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비구니 역시 중앙종회 의원 10명과 각 교구에서 선발되는 선거인단 1∼2명이 전부다. ‘말사 주지도 못하는 종단도 있는 현실에서 조계종 비구니는 말사주지는 물론 문화부장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때로는 ‘조롱’으로도 들린다.

수전 앤서니의 말을 좀 비틀어 조계종 현실을 거론해 보자. 종헌 8조에 ‘본종은 승려와 종도로서 구성한다’고 되어있다. 종헌 9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승려란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수도 또는 교화에 전력하는 출가 독신자’다. 그렇다면 묻는다. ‘비구니는 승려인가?’

‘비구니는 승려다.’ 비구니도 엄연히 조계종을 구성하는 사부대중의 일원이다. 비구가 가질 수 있는 권리권한을 비구니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정당한 이유나 논리는 없다.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비구니 팔경계’를 참종권에까지 결부시켜 비구니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건 억지요 시대에 뒤처지는 의식이다. ‘얌전히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들이나 잘 기르라’며 ‘남자들 정치 얘기 할 때는 뒤로 빠져 조용히 있으라’는 수전 앤서니 시대의 남자들 사고 방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진 게 없지 않은가?

조계종 총무원이 최근 입법예고한 ‘종헌 및 선거법 개정’ 즉 ‘승랍 20년 이상 스님 모두에게 총무원장 선거권을 부여한다’는 이 법안은 비구니 참종권 확대는 물론 비구니 차별을 없애가는 첫 걸음이다. 6월 중앙종회 통과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평등’ 사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비구 스님들이 보인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차별의 악순환’을 끊어야 할 때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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