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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행 과위관

궁극 지향점이 아라한과 부처로 서로 달라

▲ 그림=김승연 화백

불교는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수행이 없으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수행의 정의와 범주를 똑 부러지게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으키는 모든 선한 행위를 수행의 정의로 범주로 삼는다면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초기 대승 모두 해탈지향
수행 결과 동일하지 않아
초기불교 번뇌 제거 초점
대승은 불성 발현에 주목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 깨달음과 열반, 해탈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고 해서 내용마저 동일하지는 않다. 똑같은 목적을 향해 수행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초기불교의 최종 목적은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여의고 열반을 얻어 더 이상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최고의 성자이다. 수행자가 아라한의 경지를 이루면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라한의 경지는 단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제자들이 순식간에 아라한의 지위에 오르는 일들이 자주 소개된다.

하지만 수행단계의 측면에서 볼 때 수행자가 아라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래 단계인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의 지위를 차례로 거쳐야만 한다. 이를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사과(修行四果)라 한다. 또 하나의 과(果)에는 과정으로써의 도(道)가 있기 때문에 도과(道果)를 합쳐 여덟 종류가 된다. 이른바 수다원도 수다원과, 사다함도 사다함과, 아나함도 아나함과, 아라한도 아라한과인데 이를 사쌍팔배(四雙八背)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극복해야 할 번뇌로 크게 열 가지를 말한다. 이른바 십결(十結)이다. 결이란 중생을 결박한다는 의미로써의 번뇌를 가리킨다. 번뇌는 중생의 해탈을 가로막고 괴로움으로 묶어놓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십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몸과 마음을 자아라고 착각하는 유신견결(有身見結), 금해야 할 계율에 집착하는 계금취견결(戒禁取見結), 진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의심결(疑心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탐결(貪結), 분노와 악의로서의 진결(瞋結), 물질계의 선정에 집착하는 색애결(色愛結), 순수한 정신세계의 선정에 집착하는 무색애결(無色愛結), 아직 완전한 지위를 얻지 못하였음에도 얻은 경지에 스스로 만족하는 만결(慢結),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어 흔들림이 다 하지 않은 도거결(掉去結), 근원적 어리석음으로서의 무명결(無明結)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번뇌는 수행의 지위와 깊은 연관이 있어 이들이 얼마만큼 사라지느냐에 따라 수행지위는 올라가게 된다.

첫 단계 수다원과는 십결 중 앞의 유신견결·계금취견결·의심결이 사라진 경지이고 두번째 사다함과는 탐결과 진결이 현저히 약화된 경지이며 세번째 아나함과는 탐과 진이 모두 사라진 경지이고 네 번째 아라한과는 나머지 색애결과 무색애결과 만결과 도거결과 무명이 완전히 사라진 경지이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번뇌를 얼마만큼 멸진하였느냐에 따라 수행의 과위가 결정된다.

초기불교의 이러한 입장에 비해 대승불교는 수행의 목표부터 다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아라한과와는 달리 부처를 이루는 불과를 목적으로 한다. 수행자가 불과를 이루기위해서는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야만 한다. 보살지위는 불과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열 단계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를 보살십지(菩薩十地)라 부르는데 주요 대승경전에서는 보살십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보살십지는 법을 만난 기쁨에 마음이 충만한 환희지(歡喜地), 열가지 계율을 구족하여 마음의 더러움이 없는 이구지(離垢地), 번뇌가 조복되면서 지혜광명이 드러나는 발광지(發光地), 지혜 빛이 불꽃처럼 왕성한 염혜지(焰慧智), 공덕의 힘이 광대하여 그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난승지(難勝地), 일체법의 실상이 온전히 파악되고 부처의 깨달음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전지(現前地), 삼계중생의 번뇌와 괴로움을 멀리 떠나 부처의 지위와 가까워진 원행지(遠行地), 뒤로 물러나거나 흔들림 없이 불과에 오르는 일만 남게 된 부동지(不動地), 지혜가 원만구족하여 부처와 같은 열 가지 힘을 얻고 능히 중생의 근기를 알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선혜지(善慧地), 큰 구름이 일어나 목마른 대지에 비를 내리듯 능히 일체 중생과 보살들을 제도하고자 온갖 공덕을 뿜어내는 법운지(法雲地)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지위는 수행자의 번뇌 속에 감추어진 불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승의 수행자는 그 지위 올라감에 따라 번뇌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불성이 점점 빛을 발하게 되고 법운지에 오르면 불성이 원만 구족해져 부처님과 똑같은 위치에 오른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결국 불성의 완전한 발현과 맞물려 있고 불성의 발현에 따라 수행의 진전도 이루어진다.

초기불교의 수행계위와 대승불교의 수행계위에 있어 다른 점이 있다면 수행목적도 차이가 있지만 번뇌를 제거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차이가 난다. 초기불교가 번뇌를 끊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수행의 과위를 말한다면 대승불교는 번뇌를 끊었을 때에 나타나는 공덕에 초점을 맞추어 수행의 과위를 말한다. 마치 그릇에 흙탕물이 있다고 할 때에 초기불교는 흙을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중심을 둔다면 대승불교는 흙도 문제 삼지만 흙을 제거했을 때에 맑혀지는 물의 정도에 중심을 둔다. 대승불교는 얼마만큼 번뇌를 제거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불성이 드러났느냐에 따라 수행의 과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번뇌의 단절을 수행대상으로 삼는 초기불교와 불성의 발현을 수행대상으로 삼는 대승불교의 차이는 똑같은 수행을 하더라도 지향하는 바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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