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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혜 스님의 동거녀

기자명 성재헌

대혜, 선지 깊은 여인에게 입실 허락하다

▲ 일러스트=이승윤

선사(禪師)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판별하고 대접하는 기준도 “그의 안목이 얼마나 밝은가” 하는 점이 그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안목만 분명하다면 설령 그의 행실이 천박하고 비루하다 할지라도 스승들은 그를 누구보다 아끼면서 가까이 두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신과 신분은 물론이고 학식과 나이, 심지어는 남녀의 구분마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혜(大慧)선사도 그런 분이었다.

대혜선사가 노년에 경산(徑山)에 머물 때였다. 하안거 결제를 맞아 승속들이 한자리에 운집하자 대혜선사는 석두(石頭) 스님께서 약산(藥山) 스님께 하신 말씀을 거론하면서 폭포수처럼 법문을 쏟아내었다. 법회가 끝나고 부동거사(不動居士) 풍즙(馮檝)이 서른 남짓한 한 여인과 함께 방장실로 올라갔다. 풍즙이 여인을 소개하였다.

“이분은 승상 소송(蘇頌)의 손녀딸이십니다.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껴 세속과 인연을 끊고는 이렇게 제방을 편력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지혜와 변재가 보통이 아니랍니다.”

여인은 반짝이는 눈빛을 낮추고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였다.

“여러 어른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이제 겨우 믿음을 일으킨 정도입니다.”

여인은 고운 자태에 기품이 넘쳤다. 찻잔이 돌려지자 다시 풍즙이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 조금 전에 거론하신 공안의 이치를 제가 알겠습니다.”

“거사께서는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석두 스님께서 ‘이렇다 할 수 없다’ 하신 것은 소로사바하이고, ‘이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하신 것은 시리사바하이고, ‘도무지 이렇다 저렇다 할 수가 없다’ 하신 것은 소로시리사바하입니다.”

시랑 풍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혜 스님이 그녀를 돌아보며 엄숙한 낯빛으로 물었다.

“뭘 알고 웃는 거요?”

여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여전했다.

“제가 예전에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註)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곽상이 장자에 주석을 붙였다고들 하지만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장자가 도리어 곽상의 글에 주석을 붙인 셈이지요.”
여인의 통찰력에 대혜선사는 깜짝 놀랐다. 이제 풍즙은 뒷전이었다. 남다름을 간파한 대혜는 여인을 응시하며 천천히 물었다.

“옛날에 암두 전활선사가 동정호에서 뱃사공 노릇을 할 때, 한 노파가 어린아이를 안고 배에 탔답니다. 그 노파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춤추듯 노를 젓는 솜씨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 노파의 손에 안긴 어린아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때 암두 스님이 노로 뱃머리를 쳤답니다. 그러자 노파가 ‘제가 일곱 아이를 낳았는데 여섯이 좋은 도반을 만나지 못했지요. 결국 이 아이마저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하네요’ 하고는 아이를 물에 던져버렸답니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뭘까요?”

그러자 여인이 즉석에서 시를 한 수 읊었다.

아득한 호숫가에 일엽편주 띄우고서
춤추듯 노 저으며 부르는 어부의 노래
구름 낀 산도 바다에 어린 달도 모두 내던져버리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장주의 꿈이 늘어졌구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선사에게 여인이 정중히 청하였다.

“저도 안거에 동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혜 스님은 곧바로 입실을 허락하고, 당신의 옆방을 숙소로 정해주었다. 속인이, 그것도 여인이 시도 때도 없이 방장실을 드나들자 온 산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대중들이 수좌 도안(道顔)을 앞세워 방장실로 쳐들어갔다.

“산중에 여인이 머무는 것은 계율에 어긋납니다. 비구가 한 지붕 아래에서 여자와 지낸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수좌의 날선 비난에도 대혜선사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로만 보지 말게. 그녀가 비록 아녀자이긴 하지만 자네보다 나은 구석이 있어.”

도안이 발끈했다.

“담장너머로 법문 몇 마디 주워들었을 여자에게 무슨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과오를 덮으려 거짓말까지 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당장 내쫓으십시오.”

“정말이야.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자네가 직접 만나봐.”

도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가 그 여자를 뭐 하러 만납니까!”

그러자 대혜 스님이 꾸짖었다.

“만나보지도 않고 사람을 평하다니, 자네가 이처럼 경솔한 사람이었나!”

“좋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지 보겠습니다.”

방장실에서 물러난 도안과 대중은 여인의 방으로 몰려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경산의 수좌 도안입니다. 잠시 시주를 뵙고자 합니다.”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수좌께서는 저와 불법으로 만나시겠습니까, 속세법으로 만나시겠습니까?”

“불법으로 만납시다.”

“그럼, 곁에 계신 분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함께 온 스님들이 물러나자 다시 고운 음성이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방문을 들어서자 휘장 너머로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침상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도안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그 천박한 몸뚱이를 드러낸다 말인가!”

“삼세 모든 부처님과 육대 조사, 천하의 노화상들이 모두 이 몸에서 나왔습니다.”

말로 잔재주를 피우는 것이라 여긴 도안은 은근히 겁을 줘야겠다 싶었다.

“그럼, 내가 들어가도 되겠군.”

“여기는 말이나 당나귀가 건너는 곳이 아닙니다.”

여인의 대답에 도안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안이 응수하지 못하자 여인은 곧바로 몸을 안쪽으로 돌렸다.
“수좌스님과의 첫인사는 끝났습니다.”

여인의 방에서 조용히 물러나온 수좌를 손가락질하며 대혜 스님이 깔깔대고 웃었다.

“거 봐라, 이놈아!”

그해 여름안거를 지내면서 대혜 스님의 지도로 크게 깨달은 그 여인은 훗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법명을 묘총(妙總)이라 하였다. 스승 대혜에게 조차 할을 퍼부으며 준엄한 기봉을 양보하지 않던 묘총은 훗날 사인(舍人) 장효상(張孝祥)의 청으로 자수사(資壽寺)에서 법석을 열고 대중을 교화하였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50호 / 2014년 6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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