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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당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

“작별한지 20여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 되게 하신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부처님께서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

690년대 초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고희를 앞둔 의상(義相, 625~702)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표정에는 늘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극한 신심, 뭇 중생에 대한 연민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스승이 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그 간절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미타불을 등지고 앉지 않는 철저함도 말 없는 큰 가르침이었다.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의상의 10대 제자를 비롯한 많은 학인들에게 의상은 거대한 산맥이었고, 파도가 그친 드넓은 바다였으며,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보살의 화신이었다.

그 중에도 홀어머니를 두고 떠나야 했던 진정(眞定)에게 의상의 존재는 각별했다. 나무를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시절, 그는 무심코 홀어머니에게 출가의 뜻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마지막 남은 자루 속 쌀까지 털어주며 주저하는 아들에게 떠나라고 했다. 지금은 안 된다는 아들도, 불도를 깨치는 게 가장 큰 효도라는 어머니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식의 출가를 막은 죄로 이 어미를 지옥에 빠뜨릴 셈이냐? 그게 정녕 너의 뜻이더냐?”는 말에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3일 밤낮을 걸어 부석사에 도착했다. 의상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삭발도 해주었다. 진정이 의상의 제자가 되어 산문에 머무른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그에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정은 견딜 수 없는 비탄과 자책에 빠져들었다. 진정은 7일간 꼼짝 않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 뒤 스승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때 의상은 진정의 어머니가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소백산 추동의 풀로 엮은 초막에서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했다. 그 같은 자애로운 스승이 있었기에 진정은 어떤 번뇌에도 물들지 않는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엄격한 골품제도를 요구하는 시대. 하지만 의상의 부석사는 평등공동체였다. 가난한 나무꾼인 진정과 노비출신인 지통이 그랬듯 법에 뜻을 둔 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의상을 깊이 존경했던 국왕이 부석사에 토지와 노비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우리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균등하며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논밭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빈도는 법계(法界)로서 집을 삼고 바릿대로 농사지어 익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터럭만치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늘 침묵했던 의상. 그런 스승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세상 그 무엇도 의상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당나라 종남산에서 귀국한 승전이 가져온 책과 편지를 받고나서였다. 의상이 어린 아이처럼 기쁨에 겨워 환히 웃는 게 아닌가. 바로 20년 전 동문수학했던 장안 숭복사(崇福寺) 법장(法藏, 643∼712)이 보낸 편지와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 20권, ‘교분기(敎分記)’ 3권, ‘기신소(起信疏)’ 2권 등 30여권의 책이었다. 승려들이 들고 다니는 인도의 물병도 하나 포함돼 있었다.

690년대 쓴 법장이 쓴 편지
종남산서 동문수학한 선배에
자신의 저술 살펴봐주길 당부
국경 넘어 아름다운 인연
행간마다 빼곡히 담겨 있어

1300년 된 법장 편지 원본
신라·중국·대만 등 거쳐
지금은 일본 텐리대학 보관

측천무후에게서 현수(賢首)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당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법장. 그는 편지에서 의상에 대한 깊은 존경과 찬탄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부지런히 정진했건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널리 폄이 적어 ‘화엄경’을 생각할 때마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또 스승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해 후학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워 이를 풀어쓰니 자세히 살펴보고 가르침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법장은 의상의 화엄 이해가 누구보다 심오하다고 믿었다. 의상이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를 저술하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연기의 도리를 나타내려 했던 것임을 잘 알았다. 그것은 스승 지엄(智儼, 602~668)이 항상 강조했던 가르침이었다. 법장 자신이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다면 의상은 보다 신앙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법장은 신라의 유학승을 만날 때면 의상의 소식을 묻고는 했다. 그들로부터 신라의 화엄학이 의상에 의해 활짝 꽃피워진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법장은 역시 의상답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집필한 ‘화엄탐현기’를 이해해줄 사람은 의상 밖에 없다고 여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법장의 서책을 받아든 의상은 감격스러웠다. 침식도 잊은 채 책 읽기에 몰두했다. 책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도반 법장은 물론 스승 지엄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 해동화엄 초조 의상법사.

 

진골 출신으로 19살에 출가한 의상이 당나라로 건너간 것은 661년이었다. 그보다 11년 전인 650년, 26살의 의상은 자신보다 8살 많은 원효(元曉, 617~686)와 요동을 거쳐 당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의 고구려 침략으로 긴장이 고조되던 요동에서 그들은 변방의 순라군에게 붙잡혔다. 열흘간의 감금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그들은 여전히 구법의 꿈을 접지 않았다. 11년 뒤 의상과 원효는 다시 의기투합해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서해의 뱃길이었다. 그들은 항구로 향하던 도중 쏟아지는 비를 피해 무덤 속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해골물을 들이켰던 원효가 “알겠도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마음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신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항구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곳에서 의상은 당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구법의 대한 의상의 열정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아름다운 선묘의 간절한 구애도 그의 발길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가는 길을 묻고 물어 찾아갔다. 마침내 의상은 다음해 중국화엄 2조 지엄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해동의 큰 나무가 당나라까지 뻗었기에 올라가보니 둥지 안에 마니보주가 빛을 내고 있더라는 얘기를 하며 흔쾌히 의상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은 지엄의 각별한 지도 아래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갔다.

 

▲ 중국 화엄 제3조 현수법장.

의상이 법장을 만난 것은 종남산에 도착한지 오래지 않아서였다. 의상보다 18살 어린 그는 그때까지도 머리를 깎지 않은 재가자였다. 하지만 20살의 젊은 그를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16살 때 이미 대승의 진리를 깨닫겠다고 발원한 뒤 법문사 사리탑 앞에서 연비공양을 했다는 그는 총명함을 넘어 가히 천재적이었다.

지엄은 의상과 법장 두 사람이 장차 이 땅에 화엄의 꽃을 활짝 피울 재목임을 알아봤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의상과 법장을 불렀다. 그러고는 의상에게는 ‘의지(義持)’를,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뛰어났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장점이 있음을 지엄은 간파한 것이다.

지엄은 의상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강조했다. 의상이 극도의 간결함을 추구하고 애써 말을 아꼈던 것도 지엄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지엄은 의상에게 그동안 공부한 내용으로 화엄의 이치를 밝혀볼 것을 권유했다. 이에 의상은 ‘대승장(大乘藏)’ 10권을 지어 올렸다. 그러자 지엄은 의상에게 그것을 더욱 요약할 것을 주문했다. 의상은 얼마 뒤 다시 ‘입의숭현(立義崇玄)’을 썼다. 이것을 받아든 지엄은 의상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이 글이 부처님의 성스런 가르침에 맞는다면 원컨대 타지마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했다. 그런 뒤 책을 맹렬한 불길 속에 집어넣자 210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글자들을 거두어 다시 불길 속에 넣어도 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엄은 눈물을 글썽이며 의상에게 이 글자들로 화엄의 요체를 밝힐 수 있는 게송을 지으라고 말했다.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완성한 것이 바로 30구 210자의 법성게(法性偈)였다. 지엄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의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불에 타지 않는 210자의 언어사리로 하나의 도인(圖印)을 만든 것이다. 의상은 가로 15행 세로 14행의 직사각형 도인을 점선으로 연결했다. 그리고는 점선 사이에 법성게 한 글자씩을 배치한 뒤 중앙의 법(法)자로부터 왼쪽을 향해 구불구불 54각(角)을 돌아 마지막 불(佛)자에 이르도록 했다. 굴곡이 많은 중생들이 각자의 근기와 욕구에 따라 굽이굽이 온갖 길을 거쳐 마침내는 부처에 이른다는 화엄의 세계관을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엄은 크게 감탄하고 이를 널리 유포할 것을 허락했다. 668년 7월15일, 의상이 46살 되던 해였다.

▲ 의상이 만든 화엄일승법계도.

지엄은 그해 10월29일 입적했다. 한동안 종남산에 머물던 의상이 귀국한 것은 670년이었다. 신라에 화엄을 전해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던 의상에게 어느날 당에 볼모로 와있던 태종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으로부터 은밀한 소식이 전해왔다. 당나라가 군사 50만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려하니 이를 고국에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향했다. ‘화엄경’에 통달한 법장은 그해 측천무후가 창건한 태원사(太原寺, 후에 숭복사로 개칭)에서 삭발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됐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 당의 침략 계획을 알린 의상은 수도 경주가 아닌 낙산의 관음굴로 향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피와 눈물의 바다에 난파당한 사람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을 구제하고 위로할 수 있는 해답이 관음보살의 자비에 있다고 믿었다. 의상은 발원했다.

“오직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 관음보살님을 찬탄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보살이 아미타불을 머리에 받들어 모시듯 저 또한 관음대성을 정대(頂戴)하겠습니다.”

의상은 그곳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지극한 기도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의상은 그곳에 낙산사를 세우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동해의 낙산사에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른다는 신앙이 정착한 것도 이 때부터다.

의상은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화엄의 무진등(無盡燈)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화엄도량을 찾아 각지를 떠돌던 그가 마침내 태백산 자락에 이르렀다. 676년 2월, 의상은 이곳에 부석사를 창건했다. “언제까지나 의상법사께 귀명해 대승을 배워 익히고 전법을 돕겠다”며 큰 용이 된 선묘의 도움이 컸다. 의상은 불당 안 서쪽에 오직 아미타불만 조성해 모시고 늘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발원했다.

“원하옵나니 선재와 같은 구도심을 발하고, 원하옵나니 문수보살 깊고 깊은 지혜와 같게 하며, 원하옵나니 관음보살 대자비 얻게 하시고, 원하옵나니 보현보살 광대행 닦게 하시며, 원하옵나니 노사나불 대각 증득케 하시고, 원하옵나니 법계의 모든 중생 건지게 하소서.”

의상은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화엄의 법을 펼쳤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그의 법석에 젊은 구도자들이 몰려들었다. 의상은 그들을 위해 때론 ‘화엄경’을, 때론 ‘법계도’를, 때론 ‘아미타경’을 강의했다. 또 ‘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 ‘투사례’ ‘서방가’ 등 게송을 지어 가르치기도 했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탁본으로 인해 탁이 나오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를 베는 것이니 각자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게나.”

궁벽한 태백산에서 의상의 교화는 신라사회에 널리 퍼졌다. 명리를 떠나 오로지 불법의 길을 걷는 구도자 의상, 그런 의상을 국왕과 백성들은 더욱 공경하게 됐다.

간혹 의상은 세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681년,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단장한데 이어 도성까지 새로 짓겠다는 얘기가 들려왔을 때였다. 의상은 국왕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요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견고하고 긴 성이 있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된 부역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을 돕기 위한 배려였다. 왕은 곧바로 의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공사를 중지하도록 했다.

 

▲ 일본 텐리대학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현수법장의 편지 원본.

의상이 귀국한지 20년 되던 해. 법장의 책과 편지를 받은 의상은 ‘화엄탐현기’를 읽어 내려갔다. 열흘이 지나 방문을 나선 의상은 제자들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진정, 상원, 양원, 표훈을 불렀다. 그리고는 “나의 지식을 넓혀주는 이는 장공(법장)이고 나를 깨우쳐주는 이는 그대들이다”라며 각각 5권씩 나눠준 뒤 이를 깊이 연구하도록 했다. 훗날 의상은 직접 제자들에게 ‘화엄탐현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지극한 신앙과 화엄의 밝은 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히 밝혔던 의상. 그는 702년 세상과의 인연을 접고 그토록 원했던 서방정토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법의 향기로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신라와 고려에 화엄의 꽃이 활짝 핀 것도 오로지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상이 밝힌 화엄의 법등은 “높은 산처럼 우러러 어느 하루도 스승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그의 법제자들에 의해 신라 곳곳으로 확산됐다.

의상의 화엄학을 표방한 태백산 부석사를 비롯해 팔공산 미리사,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보광사, 공주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라는 화엄십찰이 창건됐다. 최치원, 의천, 일연 등 수많은 후학들이 의상의 일생을 찬탄했고, 고려 숙종 때 조정에서는 그에게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했다. 의상의 사상은 해동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널리 퍼졌다. 일본 코잔지(高山寺)의 묘에(明惠)는 의상을 화엄종의 종조로 존경했다. 묘에가 의상과 원효의 생애를 그리도록 해서 만든 ‘화엄연기’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의상에게 ‘만약 제게 악업이 남아 하루아침에 지옥에 떨어진다면 상인(上人, 의상)께서는 옛 교분을 잊지 마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길 원하옵니다’라고 편지를 썼던 법장. 그는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후대 동아시아 화엄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학문뿐 아니라 정치적인 감각에도 밝았던 그는 측천무후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불교가 융성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법장은 신이승(神異僧)이라고 할 정도로 신통력도 뛰어났다. 측천무후는 물론 그 뒤를 이은 중종과 예종은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 때마다 법장에게 기우제를 요청했다. 그때마다 법장이 적절한 의식과 절차를 갖춰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법장은 712년 12월16일 천복사에서 입적했고, 황제 예종은 칙령을 공표해 그의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는 의천의 ‘원종문류’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한다. 놀라운 것은 법장의 편지 원본이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높이 33.3cm, 길이 66.6cm 크기에 21행 319자로 구성된 이 편지는 오랜 세월 신라에 전하다가 11세기 후반 중국으로 건너갔다. 원나라 때 처음 원본이 나타나 근대까지 최소 17명의 명사들 손을 은밀히 거치다 1816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이 편지는 건륭제의 맏아들 성친왕(成親王, 1752~1824)에게 귀속됐다가 대만의 수집가에게로 다시 넘어갔다. 1954년 일본 천리교가 대만인으로부터 이 편지를 고가에 사들여 현재 텐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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