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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필(富弼)의 편지

기자명 성재헌

문고리 소리로 부필의 생사해결 안 수옹

▲ 일러스트=이승윤
 
그 옛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귀(富貴)를 누리는 자가 도를 닦는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사실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그 제행 가운데도서 특히 부와 권력의 덧없음을 유독 강조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니 이른바 성공(成功)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부귀영화를 향해 화살처럼 달려가는 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가울 수가 없다. 추구하는 부귀영화가 잠시 스쳐가는 것일 뿐임을 인정하는 순간, 성공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던 종아리에 힘이 쑥 빠지기 때문이다.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임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부귀영화가 내 손아귀에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것도 나의 것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말씀은 평생의 살림살이를 한순간에 빼앗아가는 도적떼의 협박처럼 들린다. 그런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패한 자들의 투덜거림이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비아냥거림으로 느껴지지, 욕망이 소멸한 고요한 행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옛날 꼬살라의 대왕 빠세나디도 “사랑과 은혜는 슬픔과 눈물의 씨앗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비웃었다. “고따마는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이다.”
 
하지만 지위와 권세를 뛰어넘은 드문 일들이 역사 속에서 간간이 발생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진다. 송나라 때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도 그런 미담의 주인공 중 한분이다.
 
부필은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고, 공명을 한 몸에 지닌 자였다. 젊어서부터 불문에 귀의했다지만 사실 그에게 불교는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고, 고승들과의 교류는 폭넓은 사교의 장일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양이 아닌 종교(宗敎)로 받아들이게 된 사건이 있었다.
 
여러 고관들과 소림사(少林寺)를 방문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모처럼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차나 한잔 마시며 쉬었다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 계획이 그만 어긋나버린 것이다. 산문까지 마중을 나온 지객에게 인사치레로 건넨 말이 화근이었다.
 
“스님,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들으러 왔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오셨다면 법회를 열어야겠군요.”
 
눈치가 없는 것인지, 작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지객은 대꾸할 틈도 없이 곧장 옆 사람에게 일렀다. “얼른 가서 주지 스님께 말씀드리고, 종을 치게나.”
 
숲길을 지나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온 대중이 법당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법회를 주최하게 된 부필은 맨 앞자리로 나아가 향을 사루고 절을 올렸다. 허름한 옷을 걸친 주지가 높다란 법상에 올라 조용히 좌정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조용히 눈을 뜬 주지는 형형한 눈빛으로 가만히 좌우를 둘러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부필에게 되물었다.
 
“아시겠습니까?”
 
뭘 알겠냐는 것인지, 당황스러움에 귀까지 빨개졌다. 주지는 그런 부필의 모습이 재밋거리라도 되는 양 한참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 웃음이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부필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 하늘 아래 더 이상 부러워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던 부필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누더기에 지팡이 하나 뿐인 납승 앞에서 그 당당하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었다. 골수를 꿰뚫는 그 눈빛과 스치는 바람을 닮은 그 웃음 앞에서 그간 치열했던 자신의 삶이 한낱 철부지의 재롱처럼 느껴졌다. 부필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자, 주지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왔다. 그 주지가 투자 수옹(投子修顒)선사였다.
 
부필은 이후 수옹선사를 낙양의 자기 집 후원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아침저녁으로 불법에 대해 물었다. 처음에는 질문에 대해 곧잘 응대도 하고 가부를 가려 설명도 해주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자신이 이해한 바를 말씀드릴 때마다 “불법은 그런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라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자 불쑥 불쑥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하며 말을 잘라버렸다. 또 며칠이 지나자 그마저 귀찮은 지 이렇게 말했다. “산승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서야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필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곧바로 머리를 흔들어버렸다. 서운함과 의심이 찾아들었지만 불법에 대한 부필의 간절함과 수옹에 대한 부필의 공경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부필은 자신의 미련함을 탓하며 참구에 참구를 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말만 꺼내면 수옹선사가 아니라고 했던 까닭을 확연히 깨달았다. 넘치는 희열을 주체할 수 없어 방문을 박차고 보니, 캄캄한 한밤중이었다.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버선발로 후원으로 달려갔지만 수옹선사는 방문을 닫고 잠자리에 든 후였다. 부필이 문고리를 두드리자 방안에서 뜻밖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상공, 축하드립니다. 생사 대사를 완전히 해결하셨군요. 밤이 깊어 문을 열기 곤란하니 아침에 뵙도록 합시다.”
 
부필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문고리 한번 두드렸을 뿐인데, 수옹선사는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부필은 스님의 방에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가 의관을 정제하고 후원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수옹선사는 부필이 다가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필은 넘치는 기쁨을 안고 수옹선사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 후 부필은 죽는 날까지 수옹선사에게 제자의 예를 잃지 않았다. 수옹선사가 초제사에 머물다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으로 옮겼을 때, 부필이 보냈던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제가 스님을 만나 이렇게 불법을 물을 수 있었던 것은 필시 전생의 인연이지 금생의 인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스님과의 인연으로 아득한 세월 잊고 지냈던 일을 하루아침에 깨달아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화엄법회에서 늙고 병든 속인 하나가 나왔다한들 스님에게야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저 쓸모없게 사람 하나 얻은 것뿐일 것입니다.
 
저는 옛 스님들께서 적게는 10여년 많게는 20년 30년씩 스승을 모신 뒤에야 비로소 철두철미하게 깨달았다는 사실을 항상 되새겨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겨우 두 차례 스님의 보살핌을 입고 두 달 동안 법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남보다 조금 총명하여 얼마의 공부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스님의 훌륭한 방편과 매서운 꾸지람이 없었다면 어찌 그 가장자리나마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제 몸이 부서져 뼈가 가루가 된다 해도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다시 뵐 수 있을지, 그저 밤낮으로 그리운 마음뿐입니다.”
 
 
[1252호 / 2014년 7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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