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5. 장승업, ‘태평항해도’

기자명 조정육

반야용선 타고 고통의 바다 넘어 깨달음 세계로 나아가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심경

▲ 장승업의 ‘태평항해도’, 종이에 연한 색, 134×48cm,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비가 내리니 공기가 말끔하다. 당분간은 더위에 헉헉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은 박물관 가는 길에 그 부근에 있는 단골 카페에 들렀다. 원두를 사기 위해서였다. 원두만 사고 그냥 나오려는데 주인이 한마디 한다.
 
“오늘같이 분위기 좋은 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내가 커피 한 잔 대접할 테니 드시고 가세요.”
 
명성황후 친정 조카 민영익이
장승업에 의뢰해서 그린 그림
美 대통령에 국서 전하기 전
무사귀환 바라며 그렸을 것
 
심하게 흔들리는 배 타고도
두려움 없는 관원들 인상적
 
우리들도 인생의 바다 항해
가장 안전한 배는 ‘반야호’
 
그러면서 꿀을 잔뜩 끼얹은 허니브레드에 방금 추출한 예가체프를 내온다. 비오는 날의 커피 한 잔. 생각보다 운치 있다. 이런 선물을 받고나면 허전했던 마음이 넉넉하게 채워진다.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날인데 따뜻한 대화 때문에 밝아졌다. 커피 한 잔으로 사람 마음을 온전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카페 주인은 진짜 장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나올 때는 큼지막한 수박까지 한 통 안겨준다. 내가 지불한 원두값보다 받은 것이 더 많은 날이다.
 
비가 내릴 때면 항상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딱 이맘때였을 것이다. 방학하는 날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신나서 교실 문을 나서니 세차게 비가 내렸다. 이레째 내리는 장맛비였다. 방학인데 그까짓 비가 대수랴. 우산도 준비해왔겠다 일부러 물을 첨벙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은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당시 우리는 아래층이 가게에 위층은 살림집으로 된 상가에 살았다. 보통 때는 가게로 가지 않고 2층집으로 바로 올라가는데 그날은 방학하는 날이라 들떠서 1층 가게로 들어갔다. 반가운 얼굴. 엄마가 앉아 계셨다. 엄마는 일찍 온 막내딸을 보시더니 반색을 하셨다. 나는 엄마를 졸라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와서 먹으며 신나게 방학식 얘기를 했다. 엄마는 그저 웃으시며 말없이 막내딸 수다를 들어주셨다. 아이스크림도 다 먹고 떠들기도 지친 나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몸을 돌려 계단을 막 올라가려는데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어쩐다냐…”
 
그러고 보니 집에 오는 내내 상가 통로에서 물건 사러 다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엄마한테 조잘거리며 떠든 동안에도 손님은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장마철에 칙칙한 청바지를 사러올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야채 가게와 쌀가게도 손님이 끊어졌는데 하물며 청바지 가게는 오죽하랴. 청바지는 사도 그만 안사도 그만인 옷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꼭 사야 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에게 청바지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꼭 팔아야 할 물건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한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절박한 물건이었다. 청바지는 팔아야 하는데 장맛비가 손님들 발걸음을 막고 있었다. 원망스럽고 야속한 비였다. 비가 올 때면 항상 그 때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르면서 독백처럼 내뱉은 탄식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사바세계라는 거친 바다에서 온 가족을 태운 배를 노저어가야 했던 어머니의 탄식소리가 38년의 세월을 넘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내 귀에 들린다. 비 오늘 날이면 항상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이다.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분위기를 즐길 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고단한 뒷모습이다.
 
바다 한 가운데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나머지는 온통 일렁이는 파도다. 바다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걸까. 겹겹이 솟아오른 파도가 마치 용비늘을 그린 것 같다. 파도 위로는 하얀 구름이 덮여 있다. 파도와 구름은 쉽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배를 탄 인물은 모두 다섯 명이다. 노를 젓는 두 사람은 뱃사공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관복을 입고 있다. 이들이 공무를 띄고 항해 중임을 알 수 있다. 관복을 입으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걸까. 높은 파도 때문에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데도 관원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한결같이 밝고 긍정적이다. 배 난간에 기댄 두 관원은 뱃놀이 나온 사람들처럼 느긋하다. 고물(배의 뒤쪽)에서 뒷짐 지고 서 있는 사람은 밀리는 파도를 감상하는 여유까지 지녔다. 그들은 지금 무슨 목적으로 이 배를 탔을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 그린 ‘태평항해도(太平航海圖)’는 2013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에서 처음으로 실견(實見)한 작품이다. 그림 제목 옆에 ‘운미대인의 명으로 그렸다(云楣大人命畵)’는 제발(題跋)이 적혀 있고 장승업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태평항해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논문이 발표되지 않아 확언하기는 조심스럽다. 다만 ‘운미대인의 명으로 그렸다’는 제발에서 제작목적을 추정해볼 수는 있겠다. 운미(云楣)는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호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다. 명성황후의 친정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양자로 들어온 명성왕후의 오빠 민승호(閔升鎬)가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민영익은 양자의 양자인 셈이다. 양자도 엄연히 가족이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조카가 되어 조선말기 정치세력의 중심에서 살았다. 그는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를 시작으로 도승지·호조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는 김옥균과 함께 비공식사절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후 중국에도 파견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미국으로 갈 때 민영익이 포함된 사절단은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長崎), 요코하마(橫濱),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길고 긴 항해였다.
 
‘태평항해도’는 민영익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려진 걸까.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멀고 먼 항해를 앞두고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장승업에게 부탁했을 것 같다. 당시 장승업은 가장 유명한 화가였고 민영환, 민영익 등 민씨 집안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민영익은 그림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고 묵란을 잘 그렸다. 민영익과 장승업이 가까워질 수 있는 공동의 관심사가 서화였다. 장승업이 ‘운미대인의 명’으로 ‘태평항해도’를 그렸다는 제발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비록 멀고 먼 뱃길이지만 그림 속에서 뱃놀이하듯 여유로운 사람들처럼 무탈하게 잘 다녀오십시오. 그런 기원이 담긴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이 보면 볼수록 참 묘하다. 장승업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파도를 그린 선이 너무 약하다. 미완성일까. 색을 올리기 전에 스케치만 한 상태인 듯 뭔가 조금 미진하다. 강약이 없다. 쥐었다 폈다 하는 동세(動勢)가 제거된 파도는 변화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의 시퍼런 파도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다. 배에 탄 관원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다는 단조로운 색을 선택했을까. 이 그림이 가짜가 아니라면 내가 장승업의 제작의도를 읽지 못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태평항해도’를 그리게 한 민영익은 그의 바람대로 무사히 항해를 끝마쳤다. 항해는 무사했지만 그의 인생항해는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상해로 망명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반야심경’의 끝부분에 나오는 진언(眞言)이다. 진언은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외우는 것이 상식이지만 굳이 그 뜻을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우리 함께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속히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오탁악세가 가득한 사바세계다. 저 언덕은 해탈과 열반의 세계다. 두 세계 사이에는 깊은 바다가 출렁거린다. 걸어서는 건널 수 없는 바다다.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 어떤 배인가.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의 배다. 반야바라밀다는 오온(五蘊)이 공(空)하다는 법계의 실상을 통찰하는 지혜의 배다. 우리 모두가 고통으로 가득 찬 오탁악세를 떠나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다라는 지혜에 의지해 건너가야 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다. 또한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주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도 모두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셨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고 있다. 팔리지 않는 청바지를 보고 애가 닳으셨던 엄마도,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했던 민영익도 모두 세찬 파도가 출렁이는 인생의 바다를 건너야 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으로 태어나 생로병사를 겪어야 하는 현실 자체가 격노하는 바다를 건너는 항해다. 우리는 어떻게 이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낡은 배로는 건널 수 없다. 부실한 배는 사고만 초래할 뿐이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오직 반야바라밀다라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반야바라밀다호에는 저 혼자 살기위해 도망치는 선장이 없다. 끝없이 많은 중생이 열반을 이룰 수 있게 생사의 바다를 항해하는 불보살님이 있을 뿐이다. 반야바라밀다라는 반야용선(般若龍船)에는 두 명의 노련한 보살이 앞뒤에서 배를 지휘한다. 이물(배의 머리)에서는 인로왕보살이 서서 길을 인도하고 고물에서는 지장보살이 앉아 중생을 돌봐준다. 중생이 원하면 아미타부처님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배에 승선할 수도 있다. 반야용선은 왕생자의 고혼을 극락으로 실어 나르는 배지만 꼭 죽어야 탈 수 있는 사자호(死者號)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승선할 수 있다.
 
오온이 공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걸림이 없어지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전도된 망상을 여의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살아서 반야용선을 타는 방법이다. 반야바라밀다라는 반야용선을 타는 비법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승선할 수 있는 비법 아닌 비법이다.
 
 
[1252호 / 2014년 7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