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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원 광교산 봉녕사

기자명 김택근

묘엄 스님 따라 최초의 길 걸어온 비구니들의 청정요람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다. 거센 빗줄기를 뚫고 수원 광교산에 있는 봉녕사(주지 자연 스님)를 찾아갔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그래서 다시 본 봉녕사는 맑고 고왔다. 봉녕사승가대학 학감 하연 스님의 미소를 따라서 경내를 돌아봤다. 능소화가 화사하게 한여름 오후를 밝히고, 잊을 만하면 꽃들이 나타나 웃었다. 비구니 사찰 봉녕사는 볼수록 예쁘고 정갈했다. 멀리서 보면 아늑해보였는데 다가가면 문득 우람했다. 넓고 높은 전각임에도 근육질이 아니었다. 부처님만을 모시겠다는 듯, 위압적인 일반 사찰과는 달랐다. 그 속에 ‘인간’이 들어있는 것 같아 정겨웠다. 108평의 법당 대적광전은 꾸밈이 정치(精緻)해서 크다는 느낌은 달아나고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다. 절제되고도 세련된 신행공간은 800년 고찰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흡사 미래의 사찰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경내에 서있는 800년 향나무도 푸르고 건강하다. 오래됨이 낡고 촌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듯 자태마저 활달하다.
 
▲ 볼수록 예쁘고 정갈하다. 위압적인 일반 사찰들과는 달리 ‘인간’이 들어간 듯 따사롭다. 가늘어진 빗줄기 사이로 묘엄 스님이 가꾼 비구니 도량 봉녕사의 고운 모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봉녕사는 고려시대 원각국사가 창건(1208년)하고 조선시대에는 혜각국사가 중수(1469년)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된 인연일 뿐 봉녕사는 묘엄 스님이 다시 세운 사찰이다. 비구니 묘엄은 성철 스님에게서 선(禪)을, 자운 스님에게서는 율(律)을, 운허와 경봉 스님에게서는 경(經)을 배웠다. 그래서 최초의 비구니 강사가 되어 학인들을 가르쳤다. 묘엄 앞에는 ‘비구니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1971년 봉녕사에 든 이후 40년 동안 쉼 없이 불사를 했다. 봉녕사는 비구니들의 청정요람으로 변모해갔다. 승가대학교와 세계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한 것은 인재불사의 정점이었다. 그럼 묘엄 스님의 행장을 살펴보자.
 
전각 허물어져가던 봉녕사를
비구니요람 만든 묘엄 스님
청담 스님 둘째딸로 태어나
1945년 아버지에게 보내져
성철 스님이 출가를 권유해
열네 살, 윤필암서 삭발수계
 
경봉·운허스님에게 전강 받아
해방 후 최초 비구니 강사돼
운문사 떠나 봉녕사에 든 후
오로지 참선수행에만 전념
 
1974년 비구니강원 개설에
1년 만에 70명 학인 찾아와
사찰음식의 전통 이어가기도
2011년 법납 67년으로 입적
 
묘엄(속명 인순)은 청담 큰스님의 둘째딸이었다. 어머니는 일본인들의 종군위안부 징집을 피하려 깊은 산속에 있는 아버지에게 딸을 보냈다. 1945년 4월 인순은 어머니가 써준 편지를 품고 경북 대승사 쌍련선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편지에 인순이를 출가시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편지를 도반인 성철 스님에게 보여줬다. 쌍룡선원에 도착한 날 인순은 원주실 호롱불 아래 아버지와 앉아있었다. 그 곁에 성철이 있었다. 두 스님은 방선 시간이 되면 인순을 찾아왔다. 주로 성철이 얘기하고, 인순은 듣고, 청담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인순을 출가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 인순은 점차 성철 스님의 얘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성철의 이야기는 흥미로움을 넘어 경탄스러웠다. 그러던 며칠 후 성철 스님이 출가를 권유했다. 인순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이 변했다. 성철 스님처럼 되고 싶었다.
 
“출가하면 스님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그럼,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지.”
 
청담, 성철 스님을 만난 지 열흘 만에 열네 살 소녀는 출가를 결심했다. 인순은 대승사 근처 윤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월혜 스님을 은사로 삭발을 했다. 다음날 윤필암에는 수계 연단이 설치되었다. 수계식은 성철 스님이 단독 주재했다. 아버지 청담 스님과 속가의 어머니도 참석했다. 성철 스님이 계율을 설하고, 인순은 이를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수계식을 마친 성철 스님이 묘엄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어머니가 인순이 아닌 묘엄에게 절을 올렸다. 성철이 비구니에게 내린 유일한 사미니계였다.
 
▲ 앞뜰에 서있는 향나무는 봉녕사 800년 역사의 산 증거다.

정신적 의지처였던 청담과 성철 스님이 “부처님법대로 살자”며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자 묘엄도 역사적인 현장에 동참했다. 묘엄은 봉암사 근처 백련암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했다. 성철은 그런 묘엄을 매섭게 몰아치며 분심을 일으켰고, 묘엄은 비구들과 똑같이 울력하며 정진했다. 봉암사 결사에는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이 없었다.
 
봉암사에서 묘엄은 식차마나니계를 받았다. 한국 율장의 거봉인 자운 스님은 여성출가자를 위해 식차마나니계를 재도입했는데 그 첫 수계자로 묘엄을 지명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식차마나니계를 받은 최초의 비구니였다.
 
▲ 경내 세주묘엄박물관에는 스님의 유품들이 모여 있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는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으로부터 율장을 공부했다. 스님의 가르침은 세밀하면서도 엄격했다. 또 1953년 1월 동학사에서 운허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학사 강원의 교육은 서당식으로 이뤄졌다. 운허 스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경을 읽었다. 묘엄의 공부를 눈여겨보던 운허 스님은 초심자 사미니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보라고 했다. 묘엄은 서툴지만 생애 첫 강의를 했다.
1956년 가을 묘엄은 동학사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당시 동학사에는 현대 한국불교 최초로 비구니 강원을 두고 있었고, 경봉 스님이 비구니들을 가르쳤다. 경봉 스님은 묘엄에게 학인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묘엄은 배우면서 가르쳤다. 1957년 묘엄은 경봉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았다. 경전을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인가받은 것이다. 또 그해 겨울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으로부터도 전강을 받았다. 묘엄은 해방 후 최초의 비구니 강사였다. 경봉과 운허 스님이 비구니들에게 전강을 준 것은 한국불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59년부터 묘엄은 동학사에서 비구니 학인을 가르쳤다.
 
이후 묘엄은 강의에 집중했다. 특히 운문사 강원에서 학인들을 가르칠 때는 눈 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한 반 수업이 끝나면 다른 반 학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운문사에서 4년 동안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마음이 허전했다. 그것은 선(禪)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해독해서 가르치겠지만 선사들이 이룬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달해 줄 수가 없었다. 내면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깨달아야 했다. 비구나 비구니를 막론하고 깨달아야 중이었다. 묘엄은 마침내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권속 30여명과 함께 운문사를 떠나왔다. 1970년 가을이었다.
 
묘엄은 경주시 외곽에 있는 암자로 거처를 옮겼다. 좁고 낡은 암자에는 도저히 30여명이 기거할 수 없었다. 당장 끓여먹을 게 없어 묘엄 일행은 시내로 탁발을 나가야 했다. 다시 절을 찾아 나섰다. 1971년 묘엄과 권속은 전각이 허물어져가는 봉녕사로 옮겼다. 나이 든 대처승이 살고 있었고, 한눈에도 여느 살림집처럼 쇠락해 보였다. 대처승은 묘엄 일행을 보자 두 말 않고 절을 비웠다. 칠성각과 약사전, 그리고 요사채만 남아 있었다. 크게 소리치면 금방 주저앉을 듯했다. 밤이 되자 쥐가 떼지어 나타났다. 굶주리면 보이는 것이 없는 법, 배고픈 쥐떼가 밤새도록 요사채 창호지 구멍을 들락거렸다. 그래도 묘엄의 눈에는 봉녕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참선 정진을 하기에, 배운 것들을 풀어놓기에 더 없이 좋아보였다. 이튿날부터 전각을 청소하고 도량을 정리했다. 뜰에는 꽃을 심고, 텃밭에는 채소를 심었다.
 
그러자 신도들이 하나 둘씩 절을 찾아왔다. 참선수행을 할 수 있는 20평짜리 요사채를 지었다. 묘엄은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는 사이 가피가 있었다. 신도가 팔렸던 봉녕사 소유 논을 다시 사 주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시주들이 끊이지 않았다. 봉녕사 비구니들은 이를 아끼고 또 아껴서 불사를 진행했다.
 
▲ 우화궁 2층에는 금강계단이 갖춰져 수계식이 거행되고 있다.

1974년 묘엄은 봉녕사에 비구니들을 위한 강원을 개설한다고 발표했다. 배움에 목마른 비구니들이 몰려왔다. 일 년 후 학인은 무려 70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학인들이 50평짜리 방 하나에서 기거하며 글을 읽었다. 하지만 그 열정만은 뜨거웠다. 당시 화엄경을 공부하러 봉녕사를 찾았던 석담 스님(‘한계를 넘어서’의 저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매일 한 끼 정도는 멀건 된장국을 먹었다. 사찰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니 채소를 살 돈이 모자라 건더기가 풍성한 된장국을 학인들에게 먹일 형편이 되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학인들이 비좁은 잠자리나 청빈한 공양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인들은 묘엄의 가르침 아래 공부에만 전념했고 비구니로 청빈한 삶을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학인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묘엄은 스스로 강사를 길러냈다. 비구니가 비구니 강사를 길러내는 일은 불교 근현대사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제자들에게 전강을 해 주면서 세 가지 증표를 주었다. 가사와 능엄경, 그리고 신라 후기에 살았던 부설거사의 선시였다.
 
가사설법여운우 감득천화석점두 건혜미능면생사 사량야시허부부
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浮
 
설사 설법하기를 구름이 일듯 비가 쏟아진 듯해서/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돌이 수긍하더라도/깨치지 못한 지혜는 생사를 면치 못하나니/생각하니 또한 이 허망하고 우습도다.
 
배워서 좀 안다는 것이 진정한 앎이 아니며, 화두를 붙들고 참선하는 것이 깨침의 유일한 방법이니 참선 정진을 게을리 말라는 경책이었다. 묘엄스님을 따라다닌 ‘최초’라는 수식어가 봉녕사로도 옮겨왔다. 최초의 불사들이 벌어졌다. ‘전국비구니 모임’을 최초로 개최했고, ‘5백제승법회(濟僧法會)’를 최초로 봉행했다. 도서관인 ‘소요삼장’을 사찰 중 최대 규모로 개관했고, 비구니율원인 ‘금강율원’을 세계 최초로 개원했다. 비구니사찰로는 수계 연단인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최초로 갖추었고, ‘대한민국 사찰음식대향연’을 최초로 개최했다.
 
묘엄 스님은 특히 사찰음식을 중시했다. 사찰음식에는 모든 생명에 감사하고 세상의 평화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스며있음을 직시하라 일렀다. 그래서 봉녕사에서는 고기는 물론 오신채를 넣지 않는 사찰음식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지계(持戒)이다. 이제 ‘사찰음식대향연’은 해마다 봉녕사의 중요한 행사이다.
 
▲ 묘엄 스님은 꽃 가운데 능소화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 세주묘엄명사는 2011년 12월 입적했다. 법납 67년, 세수 80세였다. 다비식 때는 비구니 뿐 아니라 이 땅의 고승들이 달려와 마지막을 지켜봤다. 묘엄은 ‘뜻이 있는데 여건이 되지 못해 부처를 모시지 못했던’ 비구니의 한을 씻기 위해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스렸던 청정비구니였다. 비구니도 대장부의 기상으로 살아가야 한다며 늘 당당했다. 누구보다 비구들에게 겸손했고, 또 비구니를 존경했다. 남은 사람들은 묘엄불교문화재단, 세주불교문화원 등을 세워 스님을 기리고 있다. 봉녕사 경내 세주묘엄박물관에는 스님이 남긴 것들이 모여 있다. 손을 대면 아직도 따사롭다.
 
성철 스님의 선맥, 자운 스님의 율맥, 운허 스님의 강맥이 이어지고 있는 봉녕사. ‘수행이 깊으면 두려울 게 없다’던 묘엄 스님의 경책이 있어 오늘 봉녕사의 스님들은 당당하다. 날마다 비구니들의 기도와 글 읽는 소리가 바람으로 날고 꽃으로 피어난다. 생명들의 마음을 씻기는 맑고 고운 절, 봉녕사.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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