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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인문, ‘연정수업’

기자명 조정육

한 구름서 나온 빗물 맞아도 각기 다른 자양분으로 삼나니

“수많은 중생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법을 들으면, 여래는 이때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보고 그의 능력에 따라 진리를 설해준다. 여래가 설하는 법은 일상(一相) 일미(一味)의 법이다.” 법화경
 
▲ 이인문, ‘연정수업’, 종이에 연한 색, 38.1×59.1cm, 국립중앙박물관.

불교경전은 왜 그렇게 방대할까. 성경처럼 간단하면 얼마나 좋을까.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권뿐이다. 그런데 불교경전은 한 두 권이 아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헉 소리가 난다. 어느 세월에 다 읽지?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부처님 제자라고 하자니 왠지 ‘나이롱’ 불자인 것 같은 자격지심이 생긴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가 전부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듯 경전읽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읽으면 된다. 당장 내 앞에 닥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그 공부 범위를 넓혀 가면 된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문제만큼 다급하고 절실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는가.
 
근기 따라 진리 설한 부처님
같은 그림 봐도 해석은 다양
마음 열어놓고 듣지 않는다면
좋은 법문도 아무소용 없어
 
팔만대장경은 팔만사천대장경(八萬四千大藏經)의 준말이다. 팔만사천법문(法文)을 수록한 경전이다. 인도에서는 흔히 많은 수를 얘기할 때 팔만사천이라 표현한다. 그 실제 수량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많을 때 팔만사천이라 한다. 팔만사천의 준말이 팔만이다. 왜 이렇게 많은 경전이 필요했을까. 사람의 번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번뇌가 팔만사천가지나 되다니. 어마어마하다. 내가 지금 한두 가지 번뇌에 시달려도 조금 위안이 된다. 서너가지 번뇌라도 상관없다. 그래봤자 팔만사천가지 번뇌의 1%로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그까짓 것 가지고 내 소중한 인생을 찌푸리며 산다면 진짜 ‘가오’ 상하는 일이 아닌가. 곧 죽어도 또 가오 상하고는 못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얼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다.
 
석가모니부처님은 35세에 성도(成道)하신 후 80세에 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 동안 중생들을 교화하셨다. 45년 동안 갖가지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들의 하소연을 듣고 이에 대해 가르침을 들려주신 내용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겠는가. 팔만대장경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사연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에 대한 해법도 함께 말이다. ‘법화경’을 보면 부처님의 설법이 어떠한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법의 왕으로서 진리를 설함이 참되고 진실하다. 일체 법을 지혜의 방편으로 말하나니, 여래의 설법은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게 한다. 여래는 모든 법을 잘 알며, 일체중생의 마음 속 행하는 바를 잘 알고 통찰하여 걸림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중생에게 온갖 지혜를 보여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절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바른 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이고, 속임 없이 말하는 이며, 사실대로 말하는 이’라고 했다. 같은 말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똑같은 번뇌라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처방을 내리셨다.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될 계와 우바새우바이가 지켜야 될 계도 다르게 정하셨다. 왜 그랬을까.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들에 자라는 초목과 숲속의 약초는 종류가 다양하고, 모양과 이름도 각각 다르다. 비가 내려 모든 초목이 똑같이 비를 맞지만, 숲속의 풀과 초목이 자양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각각 차별이 있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함은 큰 구름이 일어난 것과 같고, 큰 음성으로써 하늘의 천신과 인간 세계와 아수라에게 똑같이 벌을 설함이 저 큰 구름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덮는 것과 같다. 수많은 중생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법을 들으면, 여래는 이때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보고 그의 능력에 따라 진리를 설해준다. 여래가 설하는 법은 일상(一相) 일미(一味)의 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한결같다. 음식으로 치면 똑같은 음식이다. 차별 없이 평등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특정한 사람에게만 뿌려지지 않듯 부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가 다르다. 서로 다른 근기를 가진 사람에 맞춰 가르침을 펼치다보니 각기 다른 처방을 내리셨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똑같다. 비가 수행자의 옷깃을 적시든 고뇌하는 청년의 얼굴을 때리든 마찬가지다. 비는 비다.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일까. 잘 정돈된 연못가에 육모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두 사람 관계는 스승과 제자인 듯 연륜 차이가 확연하다. 유건(儒巾)을 쓴 어른은 수염을 길렀는데 가부좌를 튼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먼 곳을 바라본다. 그는 지금 강의중이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지만 신경은 온통 강의 내용에 집중해 있다. 만약 그가 주변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난간에 편안히 기대 앉아 있으리라. 옛 그림에서 저렇게 꼿꼿한 자세로 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옆에 놓인 책은 펼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굳이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그 내용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 다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스승 옆에 비스듬히 앉은 제자는 한껏 긴장해 있다. 스승의 강의를 들으며 책 내용을 확인하느라 주변 경치를 구경할 겨를이 없다. 고개를 숙여 신중하게 책을 들여다본다. 모름지기 배우는 학생의 자세는 저래야 된다.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정자 뒤쪽 나무 그늘에서는 동자가 바닥에 앉아 화로에 부채질을 한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에서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연정수업(蓮亭授業)’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후)이 그린 ‘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 중 제2면에 있는 작품이다. ‘연정수업’은 화첩(畵帖)의 양면에 펼쳐져 있어 가운데가 접혔다. 접힌 선을 기준으로 양쪽을 비교해보면 좌우 비대칭이다. 오른쪽이 무겁고 왼쪽이 가볍다. 정자 양쪽 연못 속에 세워 둔 괴석(怪石)과 울창한 나무가 그림의 중심이 오른쪽임을 시사해준다. 오른쪽이 무거워도 기우뚱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왼쪽의 가벼움은 가로막힌 담장과 왼쪽 하단의 무성한 나무로 무게중심을 잡았다. 그래도 행여 왼쪽이 가벼우면 어쩌나. 염려된 작가는 낚시질하는 동자를 담장 앞에 그려 넣었다. 정자 위에 앉은 스승과 제자를 보고 난 감상자의 눈길은 대각선으로 이어진 담장을 따라 가다 홀로 앉아 낚시질하는 동자에게 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리라. 동자의 존재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걸까. 동자 뒤로 사슴 한 마리가 이제 막 문을 통과 해 들어오고 있다. 화면 왼쪽 상단은 빈 여백으로 남겼다. 화면의 세 모퉁이가 꽉 막힌 답답함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성긴 곳은 성기게 빽빽한 곳은 빽빽하게 그리는 소소밀밀지법(簫簫密密之法)의 조화로움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굳이 나룻배를 하단에 그려 넣은 이유는 따로 있다. 연못물을 막기 위해서다. 만약 이곳에 나룻배가 없었다고 상상해보라. 연못물이 화면 밖으로 흘러 내려 감상자의 버선을 젖게 할 것이다. 감상자를 불쾌하게 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버선을 적셔도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 그림은 실제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기록화도 아니다. 연꽃이 피는 시기는 여름이다. 그런데 담장이 끝나는 정자 뒤에 모란이 피어 있다. 사슴이 그려진 우측 하단에도 모란이 피었다. 모란은 봄에, 연꽃은 여름에 피는 꽃이다. 계절적으로 맞지 않는다. 같은 계절에 피지 않는 꽃을 굳이 같은 장소에 그려 넣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지만 풍류도 상징한다. 연꽃은 청정한 부처님의 꽃임과 동시에 군자의 꽃으로도 사랑받는다. 사슴은 장수(長壽)와 영생을 상징해 십장생(十長生)에도 포함된다. 정원에 사슴과 학을 기르지 않아도 굳이 그림 속에 그려 넣는 이유는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니 ‘연정수업’은 실경을 그렸다기보다는 마음속의 이상향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이런 장소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상상을 반영했을 것이다.
 
똑같은 그림을 봐도 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똑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도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다. 아무리 좋은 법문도 내가 마음을 열어두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팔만사천가지나 되는 법문도 마찬가지다.
 
조정sixgardn@hanmail.net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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