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 도겸 스님의 심부름

기자명 성재헌

“먹고 싸는 것은 대신 못한다”는 말에 깨우쳐

▲ 일러스트=이승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이기에 자신의 일에서건 타인의 일에서건 ‘기다림’이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혼신의 힘을 쏟고도 뜻대로 성취되지 않을 때, 흔히 좌절과 실망을 품고 뜻하던 일을 포기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는 매우 성급한 판단이며, 일을 그르치는 새로운 원인이 될 뿐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옛말에 “소를 물가로 데려가는 것은 목동의 몫이나 물을 마시고 마시지 않는 것은 소의 마음이다”고 했다. 또, 엄마가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어도 아이들은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투정을 부리기 일쑤이다. 스승이 속에 창자까지 끄집어내 보여주어도 제자는 좀처럼 깨닫기가 어렵고, 매일 보고 듣는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에겐 목에 턱턱 걸려 쉽게 삼킬 수 없는 음식이기가 쉽다.
 
그럴 때, 스승이 “너 같은 놈은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없다”며 제자를 포기하거나 “나는 누군가를 지도할 재량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며 스스로 좌절한다면, 과연 현명한 판단일까? 그럴 때, 제자가 “나 같은 놈은 아무리 배워도 소용없구나” 하며 스스로 좌절하거나 “저 사람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며 스승에게 실망한다면, 과연 현명한 판단일까? 소가 물을 마시려들지 않을 땐, 억지로 목줄을 당겨 머리를 물속에 처박거나 산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 잠시 목줄을 놓고 물가에서 맘대로 노닐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상대에게 시간을 주며 기다려주는 마음, 서로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서로가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다.
 
송나라 때 도겸(道謙)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건녕부(建寧府) 출신인 그는 처음 원오(圓悟)선사를 의지해 공부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성취가 없었다. 도겸은 그 까닭이 스승은 너무 높고 자신은 너무 낮은 탓이라 여겼다. 그래서 바랑을 싸고 떠나면서 원오 스님께 부탁하였다.
 
“스님의 제자 중에 안목이 훌륭한 분이 계시면 한 분 추천해주십시오.”
 
원오 스님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당부하였다.
 
“꼭 가야겠거든 천남산(泉南山)으로 가서 종고(宗杲)라는 이를 찾아보게. 인연이 있다면 자네에게 좋은 의지처가 될게야.”
 
도겸은 천남산 산비탈에서 홀로 괭이질을 하는 종고선사를 만났다. 허술한 차림새에 머리도 제대로 깎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번개처럼 번쩍였다. “이분이 나의 스승이시다”고 직감한 도겸은 종고의 움막에 바랑을 풀었다.
 
도겸은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 종고선사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일어나 함께 밭을 갈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이 들었다. 한 철이 다 지나고서야 종고선사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거든 묻게.”
 
종고선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포수처럼 법문을 쏟아내었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도겸의 가슴 속 열기를 시원하게 씻어 내렸다. 드디어 불법의 청량한 맛을 본 도겸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날이 더해갔다.

그 후 종고선사가 경산(徑山)의 주지로 나가게 되자, 도겸 역시 스승을 따라 경산으로 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솟구치던 환희심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스승의 깨우침으로 생사대사를 해결했다고 여겼었는데, 가만히 되돌아보니 착각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과 욕망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느덧 도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스승이 불러도 모를 만큼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를 감지한 종고선사가 도겸을 불렀다.

“자네 심부름 좀 다녀오게. 장사(長沙)로 가서 이 편지를 자암거사(紫巖居士) 장위국공(張魏國公)께 전하게.”
 
하늘같은 스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편지를 받고 물러나긴 했지만 도겸은 근심이 늘어졌다. 대중처소로 돌아와 한숨을 푹푹 내쉬자 도반 종원(宗元)이 물었다.
 
“왜 그래?”
 
“스승께서 장사로 편지 심부름을 다녀오라지 않는가! 장사가 어딘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가는 데 한 달, 오는 데 한 달일세. 길 위에서 세월 다 보내고 참선은 언제한단 말인가? 나는 가고 싶은 생각이 없네.”
 
종원이 혀를 차며 꾸짖었다.

“20년을 참선했다는 사람이 겨우 그런 소리를 하는가! 길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건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도 없네. 가세. 내 자네와 함께 가주지.”

도겸은 어쩔 수 없이 짐을 싸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한나절쯤 걷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종원이 물었다. “또 왜?”

고개를 숙인 도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평생 참선을 했다지만 곰곰이 돌아보니 제대로 깨친 것이 없더군. 스승님 덕분에 이제 겨우 믿음을 일으켰는데, 또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니 언제 깨달을 날이 있겠나.”
 
종원이 도겸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네, 일단 제방에서 참구했던 것, 깨달았던 것, 원오 스님과 종고 스님께서 자네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몽땅 내려놓게. 그 무엇도 깨달으려 들지 말게. 그리고 가는 길에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내가 다 대신해 주겠네.”
 
도반의 따듯함이 고마웠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자 종원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섯 가지는 대신해 줄 수 없어. 그것만큼은 자네 스스로 감당해야 해.”
 
궁금했다.
 
“그 다섯 가지가 뭔가? 말해 주게.”
 
종원이 눈길을 부딪치며 손가락을 꼽았다.
 
“옷 입고, 밥 먹고, 똥 누고, 오줌 누고, 그 송장을 끌고 길을 걷는 일이지.”
 
도겸은 이 말에 크게 깨치고, 자신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자 종원이 도겸에게 말하였다.
 
“이젠 자네 혼자 심부름을 다녀올 수 있겠군. 자, 길을 나서게. 나는 그만 돌아가겠네.”
 
물 흐르듯 장사로 흘러간 도겸은 무사히 자암거사에게 편지를 전하였고, 자암거사의 어머니를 제도해 크게 신심을 일으켰다. 그들의 만류를 거절치 못해 한참을 그곳에 머물다 6개월 만에 쌍경사(雙徑寺)로 돌아오자, 종고선사가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고선사는 도겸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건주 아이야! 길을 떠나던 날 이 늙은이를 많이도 원망했겠지. 하지만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단다.”
도겸은 길바닥에서 크게 절을 올렸다. 도겸은 훗날 현사산(玄沙山)의 주지로 나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재tjdwogjs@hanmail.net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